일본 종합상사들의 "회춘" 몸부림
  • 도쿄/채명석 (cms@sisapress.com)
  • 승인 2000.01.2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영 환경 악화하자 구조 조정 박차…지원 업무 통합 등으로 활로 찾기
‘일본주식회사’의 첨병으로 전세계를 누벼온 일본의 종합무역상사가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옛 재벌계 종합상사인 미쓰이(三井) 물산·미쓰비시(三菱) 상사·스미토모(住友) 상사는 지난해 말 총무·인사·경리·정보 시스템 등 지원 분야의 업무를 통합한다고 발표했다.

이들은 우선 프로젝트 팀을 발족해 오는 4월부터 통신회사에서 국제 전화 전용 회선을 공동으로 빌려 사용할 계획이다. 통신회사에 대한 가격 교섭력을 강화해 100억 엔에 이르는 통신 비용을 연간 25% 가량 절감하기 위해서이다.

세 회사가 별도로 설립·운영하고 있는 인력 관리·연수 관련 계열 회사는 합병해서 공동으로 운영할 계획이다. 인력 파견·재취업 알선·교육 연수·노무 관리를 3사가 공동으로 하자는 취지에서다. 장차 통합되는 계열 회사를 인사 종합 서비스회사로 성장시켜 다른 회사들에 문호를 개방할 방침이다.
또 막대한 개발비가 드는 정보 시스템을 함께 개발하고, 시스템 운영과 유지도 같이 관리할 계획이다. 중복 투자를 피하고 비용을 절감하자는 것이 목적이다.

비용 줄이기 위해 ‘한집 살림’

이런 사실을 특종 보도한 <니혼 게이자이 신분(日本經濟新聞)>은 ‘일본의 종합상사 중 상위권 3사의 강자 연합이 출현함으로써 9대 종합상사 재편에도 박차가 가해질 것이다’라고 예견했다.

미쓰이 물산은 지난해 매출액이 약 13조9천억 엔에 이르는 일본 종합상사 순위 1위이다. 미쓰비시 상사는 지난해 매출액이 약 13조6천억 엔으로 업계 3위, 스미토모 상사는 매출액이 약 11조3천억 엔으로 업계 5위에 올라 있다.
이처럼 일본을 대표하는 재벌계 종합상사가 재벌 간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제휴·협력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라면에서 인공 위성까지’ 모든 품목을 취급한다는 일본 종합상사들은 일본의 경제 부흥과 함께 ‘소고쇼사(總合商社)’라는 이름을 전세계에 널리 알리게 되었다. 일본의 상사원이 일본주식회사의 첨병으로 전세계 오지를 누빈 덕택에 일본이 경제 대국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때는 소고쇼사의 정보 수집력이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을 능가한다는 평가도 있었다. 그 결과 일본 수출의 약 35%, 수입의 약 55%가 이들 소고쇼사를 통해 이루어져 왔고, 소고쇼사의 매출액이 일본 국내 총생산(GDP)의 3분의 1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경제지 <포천>이 1998년에 발표한 매출액 대비 세계 기업 10위권에 일본 기업 4개가 선정된 바 있다. 도요타 자동차를 빼면 미쓰이 물산(4위), 이토츄(伊藤忠) 상사(6위), 미쓰비시 상사(7위) 등 일본의 소고쇼사 3사가 10위권에 들었다.

미국에서는 일본과 무역 마찰이 극심하던 때 일본의 집중호우식 수출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도 소고쇼사를 육성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한국이 일본의 소고쇼사를 모방해 종합상사를 육성했던 것처럼 러시아와 베트남에서도 일본의 소고쇼사를 모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과로사(過勞死)’라는 말이 일본 발음 그대로 ‘가로시’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도 일본의 상사원들이 잦은 출장과 접대로 쓰러져 불귀의 객이 되었다는 뉴스가 전세계로 타전되면서부터이다.

1990년대 초 까지만 해도 소고쇼사는 일본 대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다이아몬드 사가 1991년 3월에 조사한 ‘대학생 인기 회사’ 순위에 따르면, 인문계 대학생이 가장 선호하는 회사는 미쓰비시 상사였다. 2위 미쓰이 물산, 5위 이토츄 상사, 9위 스미토모 상사, 11위 마루베니(丸紅), 12위 닛쇼이와이(日商岩井) 등 9대 종합상사가 상위권을 휩쓸고 있었다.

하지만 다이아몬드 사가 지난해에 똑같은 내용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종합상사의 인기도는 급강하하고 있다. 즉 소니·마쓰시타 전기·도요타 자동차·혼다 자동차같이 독자 브랜드 제품을 갖고 있는 기업이 상위권에 진출하고 있는 반면, 중간 거래상 성격이 짙은 종합상사는 뒷전으로 밀려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9대 종합상사 중 10위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미쓰이 물산(4위)과 미쓰비시 상사(5위) 정도이다.
종합상사 전성시대, 이제는 옛말

일본 대학생의 인기도를 반영하듯 종합상사를 둘러싼 경영 환경은 날로 악화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 종합상사가 지난해 발표한 결산 보고에 따르면, 9대 종합상사의 매출 총액은 약 71조1천억 엔에 달했다. 하지만 이것은 재작년에 비하면 16.1%가 감소한 액수이다.
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국내 거래 감소와 수입, 아시아 지역 수출이 감소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게다가 주가 하락과 경영 재구축에 따른 손실이 늘어나 4개 사가 적자를 기록했다.

그뿐이 아니다. 9대 종합상사의 한 축을 이루어 왔던 가네마쓰(兼松)가 경영이 악화해 스스로 종합상사 간판을 내렸다. 업계 9위인 가네마쓰는 거품 경제 시절의 방만한 경영으로 종합상사 업무를 수행하기 어려워져 대담한 구조 개혁을 발표하고 종합상사에서 전문상사로 환골탈태해 재발족한다고 선언했다.

이 구조 개혁에 따르면, 사원 2천명·총자산 1조 엔·계열 2백여 개 회사를 2002년 2월까지 각각 3분의 1로 절감할 방침이다. 이와 함께 철강·건설·섬유 등 채산성이 낮은 부문을 정리하고 반도체·정보통신과 같이 경쟁력을 갖춘 분야를 특화할 예정이다.

중견 종합상사 5개 중 3개도 모습을 감추었다. 1백25년 역사를 갖고 있던 오쿠라(大倉) 상사는 법원으로부터 파산 선고를 받아 사실상 도산했고, 도쇼쿠(東食)는 회사재생법의 지정을 받아 세계 최대 곡물회사인 미국 카길 사 산하에 들어갔다. 노자기(野崎) 산업은 가와데쓰(川鐵) 상사의 구제 합병을 받아들여 흡수되었다.

나머지 8개 종합상사도 살아 남기 위한 구조 개혁에 여념이 없다. 업계 2위인 이토츄 상사의 니와 우치로 사장은 지난해 한 월간지에 ‘리스트라(정리 해고) 완수 논문’을 발표해 화제를 모았다. 그는 이 글에서 ‘나는 사원들에게 당신의 급여는 1분에 1달러이지만, 파트타임 아주머니의 급여는 1시간 7달러라고, 다시 말해서 정사원이 고액 봉급자라는 것을 주지시킨다. 그것을 누가 주느냐면서 사원들을 독려하고 있다’라고 털어놓았다.

니와 사장은 또 ‘중요한 것은 돈을 버는 것이다. 계열 회사 직원이 정리 해고를 염려하고 있다면, 그런 시간에 메이크 머니를 생각하라고 충고하고 싶다’라고 밝혔다.

지난해 봄 일본에서는 정리 해고에 불만을 품은 타이어 회사 브리지스톤의 과장이 사장실을 점거했다가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니와 사장은 ‘정리 해고를 과감히 추진하다가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나는 전혀 개의치 않겠다’는 결의를 피력하기도 했다. 그만큼 업계 2위 이토츄 상사의 구조 개혁이 시급하다는 얘기이다.

이토츄 상사는 지난해 9월 말 계열 회사(약 천개)에 파견된 상사원 2백여 명을 계열 회사 직원으로 눌러앉히겠다고 발표했다. 일본주식회사의 세일즈맨으로 전세계를 누비며 본사 복귀를 학수 고대하고 있던 이토츄 상사원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일본 경제 전문가들은 일본 종합상사가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인원을 대폭 삭감하고, 계열 회사와 방계 회사를 정리해 부채를 크게 줄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세 가지 구조 조정을 서두르면 인건비를 크게 절약할 수 있고, 계열 회사를 정리해 회수한 자금을 부채 상환에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정리 해고와 계열 회사 정리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 이토츄 상사만은 아니다. 업계 3위 미쓰비시 상사와 5위 스미토모 상사는 각각 종업원 천여 명과 5백여 명을 삭감할 방침이다.

그밖에도 업계 7위인 토멘이 6백여 사원을 줄이고 계열 회사를 3백30여 개로 압축할 예정이며, 업계 8위인 니치멘은 계열 회사를 3백여 개로 줄일 예정이다.

이렇게 보면 일본 종합상사들은 당분간 ‘동면 시대’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라면에서 인공위성’까지의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는 일본 종합상사들이 이대로 넘어질 리는 만무하다.

미쓰이 물산이 지난해 밝힌 장기 비전처럼 물류와 사업과 금융을 일체화한 새로운 공룡으로 태어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