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F 포기 안하는 일본의 꿍꿍이
  • 도쿄·蔡明錫 편집위원 ()
  • 승인 1998.1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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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지역의 ‘엔 경제권’ 구축 노려
일본 가고시마에서 열린 한·일 각료 간담회에 참석한 김종필 총리가 아시아 경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이 아시아통화기금(AMF) 창설에 앞장서라고 요구해 한·일 양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한국 정부는 미국이 반대하는 아시아통화기금 창설에 찬성할 수 없다는 것이 공식 입장이다. 파문이 일자 김종필 총리도 김대중 대통령에게 주례 보고하는 자리에서 ‘기초적인 생각을 가볍게 얘기한 것이며 연구 과제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일본측도 김종필 총리의 제안을 받고 깜짝 놀란 것은 마찬가지이다. 일본 언론들의 보도에 따르면, 양국 총리 회담에서 동북아시아의 경제 위기가 화제로 떠오르자 김종필 총리가 돌연 “3천억 달러 정도를 목표로 아시아통화기금을 창설하면 어떻겠는가. 일본이 찬성한다면 한국도 응분의 부담을 할 용의가 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는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대장상이 제창한 3백억 달러 규모의 아시아 지원 계획을 설명하면서 “연구 검토할 여지가 있다”라고 일단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언론들에 따르면, 오부치 총리가 그 자리에서 고개를 끄덕인 것은 김종필 총리의 제안에 전적으로 동감해서가 아니라 그의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한 것이었다.

우선 일본측이 염려한 것은 작년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총리가 제안한 천억 달러 규모의 아시아통화기금 구상보다 규모가 3배나 크다는 점이다. 대장성 관료들의 주장에 따르면 3천억 달러는 일본의 연간 국가 예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이런 막대한 금액을 어떤 나라, 어떤 기관이 부담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라는 것이다.

작년에 하시모토가 제안한 아시아통화기금 구상은 천억 달러 기금 중 일본이 절반인 5백억 달러를 내고, 나머지 5백억 달러는 한국 등 아시아 각국이 출연해 아시아 지역의 외환 유동성 부족을 보완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을 제외하고 통화 위기에 직면해 있는 아시아 나라들 처지에서는 5백억 달러는커녕 백억 달러를 출연하는 것도 어렵다고 대장성 관료들은 입을 모은다.

일본측의 조심스런 태도는 일본이 작년에 제안했던 아시아 통화기금 구상이 무산된 것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작년 11월19일 마닐라 국제회의장에서 아시아 통화 안정 문제를 협의했던 관계국의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대리가 모여 공동 성명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미국의 로렌스 서머스 재무부 부장관, 국제통화기금(IMF)의 피셔 부 전무이사, 일본의 사카기바라 에이스케 대장성 재무관 등이 의장석 좌우에 포진했다. 그러나 일본의 사카기바라 재무관은 거의 입을 열지 않고 서머스와 피셔 두 사람이 기자회견을 이끌어 갔다.
미국·중국 반대로 AMF 논의 주춤

국제 금융계에서 ‘미스터 엔’으로 통하는 사카기바라 재무관이 이처럼 국제 무대에서 침묵으로 일관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그것은 일본이 아시아에서 존재를 과시하기 위해 작년 9월에 제창한 아시아통화기금 구상이 이 회의에서 뼈만 앙상히 남은 채 국제통화기금을 보완하는 ‘협조 지원 협정’으로 둔갑해 버렸기 때문이다.

일본의 전문가들은 아시아 통화의 헤게모니 전쟁에서 일본이 패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첫째는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 연합군의 저항이 상상 외로 컸다는 점이다. 국제통화기금은 미국이 주도해 탄생한 국제기구이자 세계 통화·금융 전략의 아성이다. 달러 편중 현상에서 비롯된 아시아 통화 위기는 일본 처지에서 보면 이 아성을 공략할 절호의 찬스였다. 그래서 일본은 아시아 지역에서 통화 위기가 확산되자 잽싸게 이 지역을 방패로 한 아시아통화기금 구상을 제창했다.

그러나 천억 달러 규모의 거대 기금을 국제통화기금 틀 밖에서 창설한다는 것은 미국을 크게 자극하는 행동이었다. 만약 미국이 이 구상을 허용하면 국제통화기금 체제가 유명 무실해질 수 있고, 아시아 지역의 경제적 주도권을 일본에게 넘겨 주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무엇보다 기금 창설의 주요 목적이 아시아 지역의 과도한 달러 의존 체질을 시정하는 데 있다는 점이 미국 정부 당국자들의 신경을 자극했을 것이다.

두 번째 큰 이유는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중국이 일본의 구상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전문가들은 중국이 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에게 헤게모니를 뺏겨서는 안된다, 세계무역기구(WTO) 가맹을 원활히 추진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협력이 절실하다, 홍콩이 베이징 정부를 제치고 일본의 구상에 선뜻 동의한 것이 못마땅하다는 등의 이유로 반대한 것으로 분석한다. 그러나 사실은 일본이 작년 9월 홍콩에서 아시아통화기금 구상을 제창하기 전에 미·중 연합군이 형성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일본의 전문가들은 아시아통화기금 구상 자체가 지닌 결함도 일본의 구상이 햇볕을 못본 중요한 이유라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천억 달러 기금을 창설한다 해도 헤지 펀드라고 불리는 투기 자금의 규모가 2천억∼3천억 달러에 달하기 때문에 아시아 통화 시장을 제압할 힘을 발휘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경제 위기 때마다 ‘엔 경제권’ 들먹

따지고 보면 김종필 총리의 발언은 일본의 아시아통화기금 구상에 브레이크가 걸린 뒤 1년이 지나서 나온 발언이다. 가고시마에서 열린 한·일 각료 간담회에서 일본측이 김종필 총리의 발언에 적극 찬성 의사를 표명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본이 내부적으로 아시아통화기금 구상을 완전 포기한 상태도 아니다.

일본 정부가 엔의 국제화를 추진하겠다고 공식 천명한 것도 아시아 지역의 경제 주도권 탈환과 이른바 ‘엔 경제권’ 창설을 위한 포석이나 다름없다. 일본의 마쓰나가 히카루(松永光) 대장상은 지난 5월 캐나다에서 열린 제5차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재무장관 회담에서 “아시아 통화 위기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아시아 국가들이 미국 달러화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외환 제도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내 통화 이용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하고, 일본도 엔의 국제화를 적극 추진해 가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이같은 발언에는 ‘엔’을 미국의 ‘달러’와 유럽의 ‘유로’와 함께 세계의 3대 기축 통화로 육성하겠다는 포부가 담겨 있다.

엔을 국제 결제 통화로 끌어올리려면 엔 경제권을 창설해야 한다. 일본의 아시아통화기금 구상이나 엔의 국제화도 따지고 보면 국제 거래 확대를 통해 엔의 지위를 끌어올리자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엔의 국제화나 엔 경제권 구상이 새로운 발상이 아니라는 점에 문제가 있다. 미국과 무역 마찰이 격심해지던 80년대 일본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아시아 지역에 엔 경제권을 설치할 것을 검토한 바 있다. 일본의 우파 논객들도 ‘탈구입아(脫歐入亞)’‘아시아 공생론’을 부르짖으며 그런 구상을 적극 후원했다.

그러나 대미 무역 마찰이 수그러지자 슬그머니 그 구호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지금 일본이 또다시 엔 경제권 구상과 유사한 방안을 들먹거리고 있는 것은 일본이 직면한 경제 위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일본은 미국과 경제 문제로 마찰이 일어날 때마다 아시아 지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아시아와의 공생하자고 부르짖는 경향이 있다. 아시아통화기금 창설도 똑같은 발상에서 나온 구상이다.

일본의 전문가들은 아시아통화기금 구상이 완전히 물 건너간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의 실현을 위해서는 미국과 중국의 반대도 큰 문제이지만, 일본이 아시아 각국으로부터 어떻게 신뢰감을 획득해 갈 것인가가 가장 큰 관건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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