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선 ‘좌우합작’ 수수께끼
  • 파리·高宗錫 편집위원 ()
  • 승인 1997.03.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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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테랑, 94년 발라뒤르 견제하려 시라크 지지” 주장 나와…시라크, 미테랑 사후 예우극진
미테랑은 시라크를 지지했는가? 전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 서거 1주년을 맞은 지난 1월부터 프랑스는 온통 미테랑과 현직 대통령 자크 시라크 사이의 ‘은밀한 관계’에 대한 갖가지 소문과 증언 들로 소란스럽다.

사회당 출신 대통령 미테랑이 자신의 후임자를 뽑는 대통령 선거에서 자기 당 후보인 조스팽을 팽개치고 우파인 공화국연합의 시라크 후보를 지지했다는 것은 언뜻 믿기 어렵다. 그러나 파리 정가와 언론계를 한 달째 달구고 있는 ‘미테랑-시라크 공조 논쟁’의 추이를 찬찬히 살피면, 미테랑이 적어도 묵시적으로는 그 선거에서 시라크를 지지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리고 이런 결론은 30년대에 우파 운동에 몸담은 것을 시작으로 예상 밖의 이력과 엉뚱한 일화로 점철된 ‘사회주의자 미테랑’의 삶에 또 하나의 수수께끼를 더한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 1월 출간된 <마지막 미테랑>이라는 책이다. 미테랑과 가까웠던 저널리스트인 조르주-마르크 브나무는 미테랑 시대 후반의 비화를 담은 이 책에서, 94년 11월1일 당시 대통령인 미테랑이 파리 시장이자 공화국연합 총재이던 시라크에게 밀사를 보내 대통령 선거 출마 선언을 종용했다고 주장했다.

그 때 시라크는 자기가 키우다시피 한 자기 당 출신 현직 총리 발라뒤르의 대권 야망에 밀려, 그 이듬해 5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은커녕 우파 대통령 후보로 나서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해 보이던 처지였다. 사회당 대통령 시대 14년을 끝장내기 위해서는 우파가 대동 단결해 단일 후보를 내야 한다는 것이 당시 우파 유권자들의 분위기여서, 각종 여론조사에서 발라뒤르보다 한참 뒤지고 있던 시라크는 적전 분열이라는 비난을 받을까 봐 출마 선언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미 40대에 총리를 지내고 공화국연합이라는 간판 아래 드골주의자들을 모아 20년 동안 대통령 자리를 넘보던 시라크에게는 정치 생활을 시작한 이래 최대 위기였다. 그 시점에 정적인 현직 대통령 미테랑이 그에게 망설이지 말고 출마를 선언하라고 격려했다는 것이 브나무의 주장이다.

이 책이 출간된 직후 시라크의 대통령궁은 이례적으로 즉시 성명을 내어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지만, 브나무는 더 나아가 94년 11월1일 파리 시청의 시라크 사무실에서 시라크와 미테랑의 밀사가 2시간 동안 밀담을 나누었다고 주장했다.

94년 11월1일의 상황이 아직 세세하고 구체적으로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출마 종용 여부와 상관 없이 그 해 10월 말부터 11월 초 사이에 미테랑의 측근들이 시라크를 여러 차례 만났다는 사실은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10월 말 어느날 미테랑이 측근들과 담소하는 자리에서 혼잣말하듯 큰 소리로 “시라크는 왜 움직이질 않는 거지, 지금이 적기인데. 보름 안에 출마를 선언하지 않으면 가망이 없을 텐데. 출마 선언은 지방에서 하는 게 좋을 거야. 그걸 그에게 알려줘야 할텐데”라고 말했다는 사실도 확인되고 있다. 그러니 노회한 미테랑이 사회당 출신이라는 자신의 처지를 고려해 측근들에게 직접 지시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말을 들은 측근 가운데 하나가 미테랑의 마음을 읽고 시라크를 만나 출마를 격려했을 수 있다. 이것이 대부분의 언론이 동의하고 있는 시나리오다. 실제로 시라크는 11월4일 드골의 고향 릴에서 출마를 선언했다.

시라크측으로서는 브나무의 주장을 부인하는 것이 당연하다. 시라크가 우유부단했고, 망설임 끝에 좌파 대통령의 조언을 받아 출마를 결심했다는 이미지는 현직 우파 대통령에게 감점 요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라크도 미테랑이 만년에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미테랑이 퇴임한 뒤나 지난해에 타계한 뒤에 시라크가 미테랑에게 보인 예우는, 그들의 관계가 단순한 호의를 넘어 전략적 공조였다는 짐작을 가능케 하고 있다.최근 지은 국립도서관에 미테랑 이름 붙여

좌파 대통령과 우파 대통령 후보 사이의 전략적 공조.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실상 시라크는 미테랑의 오랜 정적이었다. 81년 선거 때는 예선에서, 88년 선거 때는 본선에서 두 사람은 대통령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 93년 총선에서 사회당이 대패해 제2차 동거 내각이 시작되었을 때, 미테랑은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좌파 후보는 47~48% 지지밖에 얻지 못할 것이고, 그 좌파 후보를 이길 우파 후보는 시라크라고 정확하게 예언한 바 있다. 우파는 총선을 승리로 이끌자 총선거를 통해 실질적 불신임을 당한 미테랑 대통령은 임기와 상관 없이 물러나는 것이 프랑스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그것이 미테랑의 심기를 건드렸다.

미테랑으로서는 자신의 임기 말을 무사히 보내기 위해 우파를 분열시킬 필요를 느꼈고, 그래서 처음에는 총리로 지명된 발라뒤르를 전폭 지원했다. 발라뒤르의 인기는 급상승했고, 그 인기에 고무되어 그는 자기 보스이던 시라크 총재를 제치고 공화국연합 후보로서 대통령에 출마하겠다는 야심을 품게 되었다. 사회당의 장기 집권에 염증을 내고 있던 당시의 프랑스 분위기로 보아서 공화국연합의 후보가 차기 대통령이 되리라는 것은 거의 불문가지였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시라크에 견주어 두 배 이상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던 발라뒤르는 일찌감치 출마를 선언했고, 미테랑이 전립선암 수술을 받고 병원에 있을 때는 국무회의를 주재하며 실질적인 대통령 노릇을 하기도 했다. 때로는 대통령의 고유 직무인 외교 문제에 관한 인터뷰를 미테랑에게 사전에 통보하지도 않은 채 독단으로 하기까지 했다.

그것이 발라뒤르의 실수였다. 사회당이 재집권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미테랑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있는 두 우파 정치인, 즉 발라뒤르와 시라크 가운데 자신에게 유리한 사람을 지지해 후임자로 만들고 싶었고, 그가 원했던 사람은 대통령이 다된 듯 건방을 떨고 있는 발라뒤르가 아니라 심복에게 배반당한 뒤 사면초가에 빠져 있던 시라크였다. 미테랑 자신도 68년 5월 사태 직후 미셸 로카르가 이끈 신좌익의 공세에 밀려 좌파 내부의 주도권을 상실할 위험에 처한 적이 있다. 친구에게 공격받고 배반당한 자의 처절한 심정을 미테랑은 이해했을 것이다.

게다가 몇몇 주치의들은 미테랑이 과연 임기 말까지 살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다. 미테랑과 정권의 핵심 인물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미테랑이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것은 발라뒤르에게는 하늘이 준 선물이 될 것이다. 당시 발라뒤르의 인기는 프랑스의 어느 정치인보다 앞서 있었으므로 대통령 선거가 앞당겨지는 것이 유리했다. 반면에 시라크로서는 반전시킬 기회를 얻기 위해 대통령 선거가 조금이라도 늦춰지는 것이 좋았다.

즉 정치 지형상으로 발라뒤르는 미테랑의 죽음을 원하고, 시라크는 미테랑의 쾌유를 원하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실제로 미테랑의 건강이 악화했다는 다소 과장된 정보가 발라뒤르 측근들을 통해 언론에 유포되기도 했다. 이후 미테랑에게는 발라뒤르와의 싸움이 자신의 삶을 건 싸움이 되었다.

시라크가 출마를 선언한 이래 미테랑은 공·사석에서 시라크를 직접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예컨대 ‘프랑스에는 프랑스인을 사랑하는 대통령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발언해 시라크 진영을 고무하곤 했다. ‘프랑스인을 사랑하는 대통령’은 당시 시라크 진영이 내건 표어였다. 그리고 미테랑은 또 측근인 미셸 샤라스를 시라크에게 보내 자신이 시라크에게 ‘아무런 적의가 없다’고 전하기도 했다. 시라크는 샤라스에게 ‘미테랑의 뜻이 무언지 알 것 같다’고 화답했다.

시라크는 자기가 전임자에게 진 빚을 잊지 않았다. 미테랑이 죽은 직후에 그가 전임자에게 표한 감동적인 경의를 시작으로 시라크는 공·사석에서 기회 닿는 대로 미테랑을 옹호해 왔다. 최근에는 일부 측근의 반대를 무릅쓰고 새로 지은 유럽 최대 규모의 국립 도서관을 프랑수아 미테랑 도서관이라고 명명했고, 미테랑의 외교 정책에 관한 국제 심포지엄을 정부가 후원토록 했다. 사회당과 그 지도자 조스팽이 미테랑 시대의 어떤 유산들에 대해 가차없이 자기 반성을 하는 것과는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감정은 이념을 넘어선다는 증거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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