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유럽 무기 시장 ‘큰손’으로 떠오르나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4.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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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 금수 조처 머지 않아 해제…빗장 풀리면 첨단 군비 확충 본격화할 듯
세계 각국의 군사비 동향에 대한 조사 연구 기관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약칭 ‘시프리’)가 지난해 펴낸 연감에 따르면, 1998∼2002년 5년간 세계에서 가장 무기를 많이 사들인 나라는 중국이었다. 이 기간에 거래된 무기의 9.5%(거래액 기준)를 중국이 사들였다. 같은 기간에 중국 다음으로 무기를 많이 사들인 나라는 타이완. ‘통일’과 ‘독립’을 둘러싼 타이완 해협 양안의 물밑 각축이 얼마나 치열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중국 요청에 유럽연합 ‘화답’

군비 확충을 둘러싼 양측의 불꽃 튀는 접전은 현재까지는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해왔다. 타이완은 군사력 규모의 상대적 열세를 미국이 지원하는 최신 무기 체계와 잘 훈련된 소수 정예 병력으로 극복해 왔다. 중국은 경제 성장의 효과를 군 현대화에 돌리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1989년 톈안먼 사태 이후 중국에 대한 무기 판매 금지라는 높은 벽에 가로막혀 번번이 꿈을 접어야 했다.

하지만 오는 3월 이후, 상황이 크게 변할 공산이 높아지고 있다. 미국과 함께 중국에 대한 무기 금수 조처의 양대 기둥이었던 유럽연합(EU)이 최근 기존 방침을 바꾸어 빗장을 풀어버리려는 움직임이 포착된 것이다. 전문가들은 유럽연합의 대중국 무기 금수 조처 해제가 이르면 타이완 선거가 끝나는 오는 3월 말, 늦어도 오는 5월께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한다. 첨단 무기에 목말랐던 중국으로서는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지만, 타이완으로서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될 만한 소식이다.

유럽연합이 1989년 톈안먼 사태 이후 10년 이상 유지해온 대중국 무기 금수 입장에 변화가 있을 것임을 시사한 때는 지난해 10월. 그 무렵 유럽연합은 ‘중국의 인권 상황에 대한 과도한 기준 탓에 유럽연합이 중국과 경제 협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제약당하고 있다’는 내용의 정책 보고서를 펴냈다. 보고서에 ‘무기 수출’을 말한 대목은 한 줄도 없었지만, 이 보고서는 중국으로부터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보고서가 발표되기 무섭게 중국 당국이 유럽연합에 무기 금수 조처를 풀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유럽연합 회원국 가운데 대중국 무기 금수 조처 해제에 가장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나라는 프랑스다. 독일과 함께 유럽연합의 양대 구심점 노릇을 하는 프랑스는 1997년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중국을 ‘전략적 동반자’라고 천명했다. 지난 1월 말 시라크 대통령은 프랑스를 찾은 후진타오 중국 국가 주석을 극진히 대접하며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재확인했다. 양국 수교 40주년을 맞는 올해를 아예 ‘중국의 해’로 선포해 대대적인 이벤트를 준비하는 등 분위기 띄우기에 나선 것이다.

유럽연합 본부가 있는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대중국 무기 금수 조처가 재론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브뤼셀의 유럽연합 본부에서 프랑스·독일·오스트리아 외교관들이 대중국 무기 금수 조처를 해제할 필요성과 당위성을 역설하는 목소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최근까지 자체 생산 능력을 가진 전략 무기 분야를 제외하고 중국이 필요로 하는 각종 첨단 무기를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파이프는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대중국 무기 수출 덕분에 2002년 한때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무기 수출국 자리에 올라섰다. 전세계 무기 거래량의 36%를 거머쥐어, 같은 기간 전체의 24%를 판매한 미국을 따돌리고 무기 수출 분야 1위를 차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 나라에 대한 지나친 무기 수입 의존은 일국의 전력 운용에 심대한 악영향을 줄 수 있다. 먼저 과도한 무기 의존은 개별 무기뿐 아니라 무기 체계마저 수입국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건국 초기에 군비를 소련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중국이 아직도 러시아 무기 체계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과도한 의존은 또 실질적인 협상력도 떨어뜨린다. 무기 공급국은 수혜국에 무기를 독점 공급함으로써 값을 높게 부르고 기술 이전을 꺼리는 등 이른바 ‘공급자 횡포’를 부릴 수 있다. 이 부분 또한 중국이 무기 수입 통로의 다변화에 절치부심하게 하는 주요 동기로 작용하고 있다.

만약 유럽연합의 무기 창고 빗장이 풀릴 경우, 중국은 먼저 해군력과 공군력 확충을 위한 무기와 부품, 각종 관련 기술 수입에 열을 올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미 일부 군사 전문가들은 구체적인 목록까지 거론하고 있다. 이를테면 프랑스가 자랑하는 첨단 전투기 라팔이나, 유럽연합이 합작 생산하고 있는 전투기 유로파이터가 대표적이다.

중국은 상대적으로 열세를 보인 공군력을 보강하기 위해 그동안 러시아제 SU 27과 SU 30을 들여다 실전 배치했다. 또 중국은 SU27을 자체 조립한 J11을 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중국의 공군력이 타이완을 따라잡았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해·공군 전력 보강에 주력

미국 전략및국제연구소가 지난해 펴낸 아시아 지역 군사력 균형에 관한 보고서에 따르면, 타이완은 최신 기종인 F16을 1백46대 운용하고 있다. 이에 비해 중국은 F15와 동급인 SU30을 38대 보유하고 있다. 중국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SU27 기종 국산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이 또한 실적이 미미하다. 지난해 미국 외교위원회(CFR)가 펴낸 중국 군사력 평가에 관한 보고서에 따르면, SU27의 자체 개량형인 J11의 부품 국산화율은 고작 10%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중국 공군이나 해군이 현재 운용하는 전투기의 결함을 공개적으로 거론하거나, 언론에서 ‘유럽제를 쓰지 못할 이유가 뭐냐’고 문제 삼는 것은 중국이 유럽을 새로운 전투기 수입 루트로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해군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중국계 군사 전문가로서 캐나다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핑커푸(平可夫)는 최근 홍콩계 시사 잡지 <야조우조우칸>에 중국 무기 구매 동향에 관한 장문의 예측 기사를 기고했다. 이에 따르면, 중국은 잠수함 또는 구축함의 성능 개량을 위한 각종 무기와 핵심 부품 수입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예컨대 중국은 현재 중국 해군의 신예인 ‘쑹(宋)’급 잠수함(러시아 킬로급 잠수함 자체 개량형)과 ‘054형’ 구축함의 성능을 개량하기 위해 독일·프랑스가 합작 생산하는 신형 디젤 엔진 수입을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다.

핑커푸는 또 구축함의 성능과 파괴력을 강화하기 위해 중국이 미사일 교체를 검토하고 있다면서 프랑스제 에스터15 함대공 미사일을 구체적으로 지목했다. 중국은 전함 방어를 위해 현재 ‘HQ7’과 러시아제 ‘SA-N-7’을 혼용하고 있다. 이들 미사일의 단점은 직선으로 날아오는 목표물만 타격할 수 있으며, 사정 거리도 짧다는 것이다.

중국 해군력은 보완이 시급한 것이 사실이다. 구축함만 따질 경우, 타이완은 중국에 비해 한수 위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구축함은 속력과 무장력, 그리고 전투기나 미사일의 공격에 대한 자체 방어 능력이 핵심 요소로 꼽힌다. 이런 기준으로 볼 때 중국이 그런대로 쓸 만한 구축함은 10여 척에 불과하다는 것이 군사 전문가들의 평가다.이밖에도 핑커푸가 언급한 유럽제 무기 및 관련 기술은 상당히 많다. 전투기나 전함의 작전 능력을 향상시킬 각종 항법 장치 및 통신 장비, 엔진, 어뢰 등을 적시한 것이다. 더욱이 중국은 군 현대화의 핵심 과제로 ‘신식화(信息化·정보화)’를 천명해놓은 상태다. 신식화란 각종 첨단 장비의 지원을 받아 공격과 방어의 정밀성을 높이는 것. 이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전자 장비와 정보 통신 기술 혁신이 필수이다. 이들 기술은 미국은 물론 중국에 무기를 팔아온 러시아도 한사코 이전을 꺼려온 품목에 속한다. 중국은 신식화를 위한 기술을 유럽에서 구입하려는 것이다.

미국 압력 물리칠 수 있을지가 관건

물론 유럽연합이 대중국 무기 금수 조처를 해제한다고 해서 핑커푸가 적시한 모든 품목에 대해 대규모 거래가 성사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한림대 김태호 교수에 따르면, 중국은 비록 군 현대화를 달성하기 위해 무기 구매 욕구가 강하지만 실제 구매 행태는 상당히 보수적인 양상을 보여왔다. 수입 무기는 사들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기존 무기 운용 체계와 얼마나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가 관건이며, 들여온 무기를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교수는 이같은 상황에 비춰볼 때 핑커푸가 제시한 ‘구매 예상 품목’은 당장은 실현성이 낮은 ‘구입 희망 품목’에 불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단 유럽연합이 무기 금수 조처를 풀 경우, 그 효과가 상당히 클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김교수도 동의한다. 중국은 지금까지와 달리 러시아제 전투기를 수입할 때 프랑스의 라팔기와 유럽연합의 유로파이터 등을 입찰에 참여시켜 러시아와 흥정할 수 있으며, 러시아제 구축함 값이 떨어지지 않으면 독일제 메코 구축함이나 프랑스제 라파예트 구축함을 들먹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상 효과’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유럽연합이 과연 금수 조처를 유지하라는 미국의 압력을 뿌리칠 수 있는가이다. 중국은 지금 돈 보따리를 싸들고, 무기 금수 조처 해제에 호의적인 프랑스·독일·이탈리아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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