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의 긴장 녹인 평화의 연주회
  • 판문점·金鎭華 편집위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8.1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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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연주회 참관기/주최측 “남북 공동 음악회 추진”
삽상한 바람이 손등의 솜털을 스치는 청명한 가을, 하늘 가득 쏟아지는 맑은 햇빛. 깊숙한 산속에 들어앉은 듯한 적막과 고요.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들꽃과 청량한 새소리. 아직도 시들지 않은 파릇파릇한 잔디. 이렇듯 완벽한 야외 세팅 속에서 모차르트의 선율은 펼쳐졌다. 따갑도록 찬란한 한국의 10월 햇볕을 향해 얼굴을 돌려 일광욕을 즐기며 지긋이 눈 감은 채 모차르트를 듣는 청중의 표정은 그토록 포근하고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이토록 꿈속을 헤매다가, 선율이 어딘가 불협화음 속에서 비틀거린다고 느끼며 눈을 뜨는 순간, 그것은 어김없이 차디찬 ‘현실’이었다. 연주장 바로 곁의 3중 철조망과 정면의 4층짜리 북한군 감시 초소는 바로 모차르트와의 불협화음이었다.

지난 10월20일 정오. 판문점 군사 분계선 30m 앞, 중립국감시위원단 스위스 캠프 잔디밭에서 남북 분단 이후 처음 열린 연주회. 철조망과 감시 초소에 둘러싸인 풍경과 지난 반 세기 한반도의 비극적 상황을 상징하려는 듯 스위스의 카르미나 현악4중주단은 모차르트의 <디조난첸(불협화음) 4중주>로 판문점의 적막을 깨뜨렸다.

초대받은 국내외 손님 중에는 폴란드인도 2명 있었다. 이들은 중립국감시위원단 폴란드 대표로 분계선 북쪽에서 근무하던 중 북한의 요청으로 철수했다가 이번 공연을 보기 위해 바르샤바로부터 날아온 것이다.

연주회장 뒤쪽 70m. 북측 감시 초소 옥상에 설치된 대형 망원경 4대 중 2대가 연주장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는데, 감시병 2명이 연주 시작 전부터 망원경으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연주회장 주변은 야릇한 긴장감이 섞인 조용함 속에 풀벌레 소리와 함께, 북한 병사들의 말소리까지 간간이 들렸다. 그러나 연주 시작 후 정확히 40분, 확성기를 통해 음악이 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북측이 연주회를 방해하는구나.’ 조용한 긴장감이 청중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첼리스트는 고개를 반쯤 돌려 북쪽을 흘낏 보고 연주를 계속했다.

북한측, 확성기 틀었지만 큰 방해 안해

그런데 뜻밖에도 북측의 음악 소리는 더 커지지 않았다. 오히려 평상시와 달리 요란한 구호도 군가도 없이 조용한 음악을, 그것도 이따금씩 흘려 보냈다. 1시간 30분이 흘러 연주회가 끝난 후 첼리스트 스테판 괴르너 씨는 사상 첫 판문점 공연에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말했다. “북한이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주의를 사전에 들었지만 갑자기 등뒤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 당황했다. 아마 쇼팽의 음악이었던 것 같다. 처음엔 저 사람들이 미쳤나 생각했다. 유럽인들에게 모차르트는 평화·자유·생명을 상징한다. 그런 음악을 모독하려는 심리를 이해할 수 없다. 독일 통일 직후 베를린 장벽에서 연주할 때보다 더 큰 감격과 보람을 느낀다.”

제2부에서 카르미나와 함께 슈베르트의 현악5중주(작품 956)을 연주한 첼리스트 정명화씨는 상기된 표정으로 “너무 감격스러워 북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전혀 방해받지 않았다. 매주 이곳에서 연주하라고 하면 매주 오고 싶은 마음이다. 하루빨리 북한 음악인들과 함께 연주할 날이 오기 바란다”라고 했다.

이번 연주회를 구상한 판문점 중립국감시위원단 스위스 대표 페터 수터 소장은 북한 음악가들을 초청해 남북 공동 음악회를 판문점에서 여는 문제를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북 음악가들과 함께 외국 음악가도 초청하는 것이 쉬울 것이다. 중립국감시단으로 오래 활동한 스위스는 영세 중립국이므로 남·북한 화해를 위해 공헌하고 싶다. 북한측도 우리에게 신뢰를 보낼 것이다”라고 희망을 표시했다.

그는 또 “당초에는 역효과를 염려해 북한측에 연주회를 통고하지 않으려 했으나, 아무래도 걱정이 돼 하루 전에 북측에 양해를 구했다”라고 밝히고, 북측이 확성기로 방해하지 않은 것은 앞날의 남북 음악회를 위해서도 좋은 징조가 아니냐며 반겼다.

이 날 판문점 수풀 속을 뛰노는 다람쥐들도 들었을 모차르트와 슈베르트를 북한 초소의 병사들도 분명 들었을 것이다. 평양의 북한 동포들에게도 들릴 날은 언제 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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