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몰하는 일본 은행,구명정 없는 은행원
  • 도쿄·蔡明錫 편집위원 ()
  • 승인 1998.07.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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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50여 금융기관 퇴출 가능성…90만명 쫓겨날 위기
“도쿄 대학 출신 가운데 가장 우수한 학생은 대장성으로 가고, 그 다음으로 우수한 학생은 은행에 들어간다.” 이는 자민당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간사장이 최근의 한 강연에서 한 말이다.

우수한 인재가 은행으로 몰리는 이유는 두말할 나위 없이 다른 직장에 비해 보수가 월등히 좋기 때문이다. 한 통계에 따르면, 일본 시중 은행원의 평균 연봉은 도요타·소니 등 일류 제조업체에 비해 30% 가량 높다.

몇 년 전 신병으로 휴직하던 부장급 은행원이 홋카이도에서 국내선 여객기를 하이재킹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있었다. 이때 밝혀진 그의 연봉은 장기 병가 중인 데도 2천만엔이 넘었다. 그래서 제조업 중심의 게이단렌(經團連)은 은행원 봉급을 제조업체 수준으로 깎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은행으로 인재가 몰리는 또 다른 이유는, 절대 도산할 이유가 없는 안전한 직장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일본 금융기관들은 지금까지 이른바 ‘호송 선단 방식’으로 정부 보호를 받아 왔다. 대형·지방·군소 은행을 불문하고 일단 대장성의 금융 선단에 편입되면 대장성이 각종 특혜를 베풀어 안전하게 호송해 주었기 때문에 은행들은 침몰할 위험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일본 은행들의 ‘불침 항공모함’ 신화는 이제 옛 이야기가 되었다. 화이트 칼라의 대명사인 은행원들의 높은 보수도 점차 낮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말을 바꾸면, 일본에서도 은행과 은행원들의 전성 시대는 가고 그들의 빙하기가 도래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일본 정부는 지난 3월 금융 시스템 안정 대책으로, 18개 대형 은행의 자본을 늘리기 위해 공적 자금 1조7천억엔을 투입했다. 18개 대형 은행은 그 대신 2001년 3월까지 총 1만3천명을 삭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중에서도 규모가 큰 9개 시중 은행은 약 1만1천명을 줄일 예정이다.

자민당 실력자 “은행 숫자, 현재의 절반으로”

부실 은행을 구제하는 데 공적 자금, 즉 세금을 투입하는 것에 대한 여론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은행원들의 보수와 경비도 대폭 깎을 계획이다. 18개 대형 은행은 인건비를 삭감하기 위해 연봉제를 도입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인건비 총액을 10% 정도 줄일 예정이다. 은행원들의 윤활유로 불려 온 접대비도 대폭 줄일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도쿄 미쓰비시 은행은 거래처 접대와 명절 선물을 최소화할 예정이고, 스미토모 은행은 증정품 발송과 수령을 금하는 조처를 내렸다.

일본 장기 신용 은행이 스미토모 신탁 은행에 흡수 합병된다는 최근의 발표도 일본 은행들이 더 이상 불침 항공모함이 아니라는 것과 ‘은행원 전성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충격적인 사건이다.일본 장기 신용 은행은 46년 전에 설립된 국책 은행으로 말 그대로 일류 대학 출신 엘리트가 모여드는 선망의 직장이었다. 대학생들에게 장기 신용 은행과 일반 시중 은행에 시험을 쳐 모두 합격한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느냐고 물으면 대부분이 장기 신용 은행을 선택하곤 했다.

총자산이 26조엔에 이르는 장기 신용 은행의 경영이 악화한 것은 거품 경제 시절 무턱대고 부동산 업자들에게 융자를 확대했기 때문이다. 거품 경제 붕괴와 함께 장기 신용 은행이 안게 된 ‘리스크 관리 채권’ 즉 부실 채권은 약 1조4천억엔에 달한다. 부실 채권 규모가 밝혀진 뒤 이 은행의 신용 평가 등급이 하락하고 주가가 곤두박질해 자력 회생이 어렵게 되자 결국 스미토모 신탁 은행과 합병하게 된 것이다.

일본 정부와 자민당은 장기 신용 은행과 스미토모 신탁 은행의 합병 발표를 계기로 경영이 파탄한 은행들의 부실 채권을 관리할 ‘가교 은행’ 설립을 지난 7월2일 정식 결정했다. 미국의 80년대 부실 금융기관 처리 방식을 모델로 한 가교 은행 설립은, 부실 채권 정리를 원활히 함으로써 일본 경제의 암적 존재로 떠오른 금융기관 부실 채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발판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가교 은행 설립으로 경영이 부실한 금융기관을 빠른 속도로 정리할 것으로 예상되어 곧 일본 금융계에 대대적인 재편이 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자민당의 한 실력자도 최근 공개 석상에서 일본의 은행 수는 현재의 절반으로 족하다고 지적했다.

일본에서 대형 은행이라고 하면 일반 시중 은행 9개, 장기 신용 은행 2개, 신탁 은행 7개를 꼽는다. 그렇다면 이 18개 대형 은행 중에서 살아 남을 은행은 과연 몇 개일까. 일본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18개 대형 은행의 3월 말 결산에서 보유 증권의 평가익이 마이너스로 전락한 은행이 7개에 달한다. 이는 이들 은행이 앞으로 부실 채권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본을 까먹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대출 회수가 불가능해지는 것에 대비해 은행 내부에 적립하는 대손충당금 비율이 50%를 밑도는 은행도 7개나 된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지표를 토대로 18개 대형 은행 중 일본 채권 은행, 야스다 신탁 은행, 주오 신탁 은행, 일본 신탁 은행이 자력으로 회생하기 어려우리라고 내다본다. 9개 시중 은행 중에서도 국제적 경쟁력을 갖춘 은행은 도쿄 미쓰비시 은행·스미토모 은행·산와 은행 정도이고, 부실 채권 정리가 지지부진한 후지 은행과 아사히 은행은 장래 전망이 매우 불투명하다는 진단을 내렸다.

그래서 일본 정가에서는 일본의 대형 금융기관이 머지 않아 시중 은행 4개, 신탁 은행 2개, 장기 신용 은행 1개로 압축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돈다. 이 소문에 따르면, 신탁 은행과 장기 신용 은행 중 퇴출하게 될 은행 명단이 이미 확정된 상태이고, 시중 은행 중에서는 하위인 다이와·도카이·아사히·후지 은행과 경영 성적이 부진한 다이이치 간쿄 은행 등이 정리 대상이라는 것이다.

지방 은행을 포함하면 예상되는 퇴출 은행 수는 비약적으로 늘어난다. 대장성 내부 자료에 따르면, 현재 채무가 자산을 초과하는 은행 수는 15개에 달하고 있고, 국제결제은행(BIS) 자기 자본 비율이 4%를 밑도는 은행도 30여 개에 달한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일본 전역에서 50여 개 은행이 곧 퇴출될 운명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은행 파산→기업 도산→실업자 9백만 발생

일본 전국은행연합회 추산에 따르면, 하위 시중 은행과 대형 지방 은행에서 경영 파탄이 일어날 경우 실업자가 90만명 발생하게 된다. 여기에 부양 가족을 합치면 약 2백만명의 생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 대출 잔고 약 25조엔 규모의 대형 시중 은행이 파탄하고 거래 기업이 일제히 도산할 경우 실업자가 약 9백만명 발생하고, 약 1천8백만명이 그 영향을 받게 된다. 일본의 총 근로자 수가 6천7백만명이므로 7명 중 1명이 직장을 잃게 되는 셈이다.

일본 정부는 이런 최악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 ‘가교 은행’ 설립을 결정했다. 대신 일본 정부는 은행을 파탄시킨 경영자들에게 그 책임을 엄격하게 물을 방침이다. 그러나 은행 간의 흡수 합병과 부실 은행 퇴출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 실업자가 많이 발생하게 되는 것은 뻔한 이치이다. 일본 정부도 부실 은행에 공적 자금을 투입하는 대신 경영 합리화와 대폭적인 인원 삭감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아직 한국에서와 같은 은행원들의 격렬한 저항은 없다. 국민성의 차이 때문인가? 아니다. 일본의 은행 퇴출 작업이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백만에 달하는 퇴출 예상 은행의 은행원이 일제히 거리로 내몰릴 경우, 그들도 한국의 은행원들처럼 격렬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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