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경제 기적 이루다
  • 아일랜드·韓准燁 편집위원 ()
  • 승인 1997.1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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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1인당 국내총생산 등 영국 따라잡아
“끊임없이 계속되는 외부로부터의 억압 속에서 이들은 아예 모든 것을 체념해야 하는 민족으로 전락해 가고 있다. 이제 영국은 물론 멀리 미국·호주 같은 나라에 기껏해야 창녀나 매춘 알선업자, 도둑·사기꾼·부랑배·잡역부 등으로 나라를 떠나야 하는 것이 아일랜드인들의 신세다.”

칼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하던 런던 망명 생활 중 동료 사회주의자 프리드리히 엥겔스에게 쓴 이 편지는 계급 투쟁 관점에서 피지배 국가 아일랜드의 경제 낙후상을 적나라하게 언급했다. 종주국 대영제국의 7백50여 년에 이르는 식민 통치와 식민지 지배 계급의 수탈에 분개하던 마르크스가 아일랜드인의 참상을, 바로 그 가해국의 심장부에서 목격하고 적은 이 편지는 1856년에 씌었다.

국내총생산 연평균 4% 이상 성장 전망

지난 수세기 동안 유럽에서 가장 낙후한 빈국으로 낙인찍혔던 아일랜드는 이제 더 이상 마르크스가 걱정했듯이, 이른바 ‘아일랜드병’에 걸려 신음하는 경제 후진국이 아니다. 지난 10년 사이 유럽연합 국가 가운데 가장 건전한 경제 지표를 나타내면서 경이로운 경제 성장을 이룩한 아일랜드 공화국은, 켈트 민족이 에메랄드 빛 섬 아일랜드에 경제 기적을 이룩했다 해서 ‘켈틱 타이거’ 또는 ‘에메랄드 타이거’라는 자랑스런 칭호까지 받고 있다. 아일랜드의 경제는 지난날 지배국이었던 영국을 능가할 정도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의 경우 87년에는 영국의 3분의 2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으나, 10년이 지나면서 영국을 따라잡아 96년에는 무려 1만1천6백28파운드(약 2만달러)를 기록했다. 국내총생산 성장률 역시 금년 예상치가 7.7%에 이르며, 2005년까지 연평균 4% 이상 안정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인플레도 연평균 2.2% 선에 잡아두고 있다. 실업률은 올해의 경우 지난해에 이어서 11% 대를 나타내고 있지만 오히려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역이민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같은 경기 지표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4마리 용을 훨씬 앞지르는 것이다.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해외로부터의 대규모 투자 유치 사업에 따라 아일랜드 곳곳에서 다국적 기업 천여 개가 가동하고 있다. 이중에는 인텔·모토롤라·애플·IBM·마이크로소프트 등 세계 유수의 컴퓨터 및 통신 관련 기업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 외국 기업이 창출한 고용 효과는 아일랜드 총인구 3백60여만 명의 2.5%인 9만여 명에 이르며, 아일랜드 전체 제조업의 40%를 외국인 투자가 점하고 있다. 다국적 기업이 전체 제조 분야 수출 규모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무려 75%나 된다. 유럽에서 팔리는 퍼스널 컴퓨터의 3분의 1이 아일랜드산일 만큼 아일랜드에서 제조되는 각종 전자 및 컴퓨터 관련 제품은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한국 기업의 아일랜드 진출은 87년 첫 테이프를 끊은 새한미디어(비디오 테이프)와 90년에 진출한 코니 정밀(전자기기)이 선두 주자이다. 그외 금성사(산업디자인 연구 분야)·대한항공(유럽예약본부)에 이어 95년과 97년 외환은행과 산업은행이 각각 투자·융자 업무로 진출해 모두 7개사가 뛰고 있다. 이 가운데 새한미디어는 국내 대기업들이 세계화 경영에 눈뜨기 전인 87년에 유럽 통합 같은 시장 환경 변화에 적극 대응하고, 현장 위주의 고객 서비스를 추구하기 위한 해외 진출 구상을 현실화해 아일랜드 진출에 앞장섰다. 현재 아일랜드 북서쪽 항구 도시 슬라이고에서 현지인 4백50여 명을 고용해 연간 매출 1억5천만달러가 넘는 세계적인 비디오 테이프를 생산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대만 등 동아시아권 고도 성장 국가를 일컫는 4마리 용에 맞서 유럽 대륙의 호랑이, 즉 ‘켈틱 타이거’로 불리는 아일랜드의 경제가 발전한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 아일랜드 무역진흥청 톰 헤이즈 수출부장은, 낙농 국가이던 아일랜드가 50년대 말 자국 산업 보호 위주의 폐쇄적 경제 정책을 과감히 청산하고, 각종 규제 정책을 완화해 대외 개방과 수출 위주 경제 정책을 펴면서 일찍이 세계화 개념을 채택한 것이 오늘날 켈틱 타이거가 된 밑거름이 되었다고 강조한다.

이 세계화 기조 위에 아일랜드 정부는 산업 구조를 고도화해 경제 성장을 꾀하고 실업률을 잡기 위해 해외 기업 유치 및 대규모 투자 유치 정책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정부는 금융·세제 상의 인센티브를 제공해 왔는데, 현재 제조업에 투자할 경우 2010년까지, 금융 부문에 투자할 경우는 2005년까지 50%의 기본 세율을 10%만 부과하는 파격적인 세금 감면 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또 아일랜드의 낙후 지역에 기업을 신설할 경우 고정 자산 투자액의 최고 60% 선까지 정부로부터 무상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정치 안정이 경제 성장 원동력

아일랜드 정부의 해외 투자 유치 정책은 일찍이 80년대 중반부터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지금은 세계 각국에 아일랜드 산업개발청 사무소를 설치해 이같은 파격적인 유치 조건을 내세우며 기업 유치 쟁탈전에서 영국과 선두를 다투고 있을 정도다.

아일랜드의 미래 경제가 앞으로도 2000년 초반까지 평균 5% 대씩 경제 성장을 계속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낙관론자들은, 켈틱 타이거 신화의 원동력으로 무엇보다 연정 성격의 민주적 정권 교체가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면서도 정치적 안정이 유지되어 왔다는 점을 꼽는다. 이에 따라 성장 위주 경제 정책이 일관되게 추진되어 왔다는 것이다.

의원내각제인 아일랜드 정치 제도에서 양대 정당인 공화당(Finna Fail)과 아일랜드통일당(Fine Gael)은 모두 전통적인 기독교 가치관에 기초를 둔 우익 보수 성향을 띠고 있어, 경제와 복지 정책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 6월 실시한 총선에서 다수당인 공화당이 군소 야당의 하나인 진보민주당과 손잡아 연정을 구성하기는 했지만, 버티 아헨 총리가 이끄는 새 공화당 정부는 전 통일당 정부의 경제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지난 10월30일 치른 7년 임기 대통령 선거에서 집권 공화당 후보인 메리 매컬리스는 북아일랜드의 카톨릭교도 출신인데도 무려 59% 지지를 얻어, 전임자 메리 로빈슨에 이어 두 번째로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과 총리가 같은 당 소속이라는 점과, 신임 대통령이 사상 최초로 북아일랜드 출신이라는 점은 남북 아일랜드간 긴장·갈등 해소에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정부가 지속적인 성장 위주 경제 정책을 추진하는 데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 확실하다.

그럼에도 상당수 비관론자들은 그간의 소득 증가와 생활 향상이 지역간·계층간, 그리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간의 격차를 두고 이루어진 탓에 앞으로 사회적 갈등이 심해질 가능성이 많다고 우려한다. 또 지난날 임금 동결 및 인상 억제를 겨냥해 정부가 중재해 노사 간에 맺은 계약 합의(Social Contract)조차 앞으로 노조의 입김이 세지면서 흔들릴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임금 면에서 국제 경쟁력이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본다. 게다가 유럽연합의 구조 조정 자금 수혜 자격이 99년에 끝나고, 99년 1월 유럽통화동맹(EMU)에 가입하게 되면 통합 유럽 내에서 새로운 시련에 부딪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일랜드가 이같은 어려움들을 극복해 오는 10년을 지나온 10년처럼 헤치고 나아갈 경우 그것은 지구촌에서 가장 큰 경제 기적으로 기록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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