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대학 개혁'에 교수·학생 아연실색
  • 베를린·金鎭雄 통신원 ()
  • 승인 1997.10.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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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학 기간 제한·연구 업적 평가 등 ‘교육개혁안’에 아연실색
최근 남부 독일 프라이부르크 행정법원이 내린 한 판결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이 소송의 원고는 57년부터 무려 40년 동안 대학을 다닌 한 만년 대학생이다. 그는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우리만큼 수많은 학과에 걸쳐 다양한 과목을 마음껏 공부했지만, 어느 한 과정도 끝까지 이수해 학위를 받은 적은 없다. 프라이부르크 대학 당국은 이를 문제 삼아 그를 제적하려 했다. 그러나 법원은 대학측에 패소 판결을 내렸다. 학위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공부를 지속할 의사가 없다고 판단할 수는 없으며, 반드시 졸업을 목적으로 해서 입학을 허용한다는 대학 규정도 없다는 것이 판결의 근거였다.

한국에서라면 수십 년 동안 대학을 다니는 학생에게 더 관심이 쏠렸겠지만, 독일 사회에서는 오히려 대학측이 학생을 강제로 제적하려 했다는 것이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독일에서는 평생을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과정에 해당하는 김나지움을 졸업하면서 치르는 시험(아비투어)에 합격하면 대학 입학 자격을 갖추게 된다. 의과대학을 비롯한 일부 학과의 정원이 연방 단위에서 통제되는 것을 제외하면 원칙적으로 입학도 자유롭다. 학기마다 내는 등록금도 몇 만원밖에 안되어, 돈 걱정 없이 원하는 동안 공부할 수 있다.

1386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이 생긴 이래 학생들의 천국처럼 여겨져 온 이같은 독일 대학의 모습이 이제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90년대 접어들면서 대학 위기라는 말이 등장하더니, 몇년 전부터는 대학 개혁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금과 같은 상태로 가다가는 다른 선진국 대학에 뒤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독일 사회에 팽배하고 있다.

독일 대학 위기론은 대학 교육 환경이 변한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우선 대학 진학자 수가 급증하면서 대학이 포화 상태가 되었다. 60년에 대학에 진학한 고교 과정 졸업생은 5만명으로 전체의 8%였다. 대학생 수도 25만명을 밑돌았다. 그 뒤 지속적으로 늘어난 학생 수는 80년에 백만을 넘어섰고, 90년대 초를 지나면서 1백80만을 웃돈다.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청소년 3명 중 1명이 대학에 진학하고 있다. 이같은 학생 수는 독일 대학 전체의 최대 수용 능력인 90만의 두 배에 달하는 것이다.

진학률이 급증한 것은 무엇보다 직업 교육 기회가 적어진 것과 관련이 있다. 공공단체나 기업체가 제공하는 도제식 전문 교육은 장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이지만, 지난 5년간 기업체가 운영하는 직업 교육은 25%나 줄어들었다. 또 직업 전선에 일찌감치 뛰어들기보다는 대학에서 즐기려는 젊은이들의 심리도 이같은 현상에 한몫을 하고 있다.

심각한 재정난 또한 대학 위기의 주원인이다. 대학이 모두 공공 지출로 운영되는 상황에서, 재정난으로 빚더미에 올라앉은 정부는 대학에 대한 지원을 더 확대할 수 없는 상태이다. 70년대에 국내 총생산의 1.3%에 달했던 대학 운영 지출 규모는 90년대에는 0.9%로 줄어들었다. 지난 30년 동안 학생 수가 네 배로 늘었는데도 교수 충원은 두 배를 약간 웃도는 선에 그쳐, 교수 1명당 학생 수가 75년 13명에서 94년 24명으로 늘었다(의대 제외). 현재 50세를 넘은 교수의 비율이 전체의 70% 이상이어서 10년 뒤에는 절반이 퇴직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이들을 이을 교수를 충원할 예산도 막막한 상태이다. 한 교수는 “10년 뒤에는 교수 없이 비서만 근무하는 대학 연구실이 절반에 이를 것이다”라고 비꼬았다.
평균화한 대학에 경쟁 원리 도입

지난 9월24일 콜 정부가 의결한 대학교육법 개정안은 수년간 논의되어 온 대학 개혁의 윤곽을 제시했다. 그 골자는 △대학 재학 기간을 종합 대학은 4년 6개월, 전문 대학은 4년으로 제한한다 △정기적으로 교수의 연구 업적을 평가한다 △현재 석사로 단일화되어 있는 학위말고도 국제 기준에 따라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추가로 준다 △대학에 대한 정부 지원을 연구 성과에 따라 차등 지급한다는 내용이다. 교수와 학생 들로 하여금 느슨한 자세를 탈피하게끔 만들고, 평균화한 대학 사회에 경쟁 원리를 도입하려는 이 개정안은 위르겐 뤼트거 연방 교육장관이 21세기 교육 정책으로 적극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연방 차원의 대학교육법은 일반적 방향을 제시할 뿐, 구체적인 정책은 주 정부가 결정권을 갖고 있다. 이와 관련해 몇몇 지역에서는 이미 독자적으로 대학 개혁이 추진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좌파 사민당이 이끄는 주에서는 아직 논의 차원에 머무르는 데 비해, 보수 기민당이 집권하고 있는 주에서는 이미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예컨대 바덴-뷔텐베르크 주는 정해진 기간을 초과해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로부터 학기당 등록금을 천 마르크씩 받기로 결정했다. 대학 재정난을 해결하는 동시에 오랫동안 재학하는 학생을 간접으로 추방하는 이중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베를린의 경우는 직접 학생 수를 줄이는 수술을 모색하고 있다. 적은 액수이기는 하지만 등록금을 징수하고, 정해진 수업 연한을 넘기면 단계를 거쳐 강제 제적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로 인해 베를린 대학의 경우 93~94년 겨울 학기에만 4천명 이상이 타의로 대학을 떠났다. 당시 학생과 교수 들은 새 제도에 반발해 대규모 가두 시위를 벌이고, 시청 앞에 몰려가 ‘시위 수업’을 실시하기도 했으나 헛일이었다. 17개 대학(종합 대학 3개 포함)과 15만이 넘는 대학생이 몰려 있는 베를린은 통일 후 극에 달한 재정난을 타개할 한 방안으로 대대적인 대학 감소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연방이나 각 주가 실시하고 있는 대학 개혁 방안은 질적인 개선보다 우선 양적 억제를 목표로 하고 있다. 정해진 기간(4∼5년) 안에 졸업하는 학생이 10명 중 1명에 불과하고, 대부분 훨씬 긴 기간(평균 7년) 공부하는 현실을 바꾸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3명 중 2명이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동시에 하면서 생활을 꾸려가는 독일 대학생들이 법정 기간에 졸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1백50년 이어온 ‘휴머니즘 교육’ 무너지나

교육의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는 차원에서 70년대 초부터 빈곤층 자녀를 대상으로 지원되어 온 장학 제도 역시 날이 갈수록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도입할 때 40%가 넘는 학생들에게 주었던 장학금이 지금은 학생 13%에게만 지급된다. 그나마 물가가 오르는데도 액수는 제자리에 머물러, 현재 6백 마르크 안팎이어서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대학법 개정안은, 졸업한 뒤 상환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세대간 계약’에 속하는 이 장학 제도를 현실적으로 개선하는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대학 당국은 장학 제도를 획기적으로 확대하라고 촉구하지만, 뤼트거 교육장관은 오히려 기존 예산에서 1억2천만 마르크를 깎겠다고 공언했다. 한 언론은 “정해진 기간에 졸업하도록 학업에 전념하라고 재촉하면서, 동시에 일을 계속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모순이다”라고 뤼트거 장관의 대학 정책을 비난했다.

대학에 대한 재정 지원이 확대될 전망이 없는 가운데 일부 주가 시행하고 있는 등록금 납부 제도도 점차 확대될 전망이다. 지겨울 정도로 오랜 기간에 걸쳐 논의하고 서서히 추진하는 독일 사회 특유의 개혁 방식을 감안하면 등록금 시대는 이미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사민당은 대학을 개혁할 필요성에는 대체로 동감하면서도 등록금 징수는 결사 반대하고 있다. 사민당은 대학법 개정에 등록금 징수 금지 조항을 명시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공식으로 학비 징수에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는 뤼트거 장관의 답변은 다분히 정치적이다. “뭘, 그런 것까지 법으로 정할 필요가 있나.”

이제 독일 대학에서는 1백50여 년 전 프로이센 제국 시대 이래 유지되어 온 훔볼트의 휴머니즘 교육 이념이 흔들리고 있다. 뤼트거 장관은 “훔볼트의 휴머니즘적 교육 이상은 이미 사라졌다”라고 단언한다. 나아가 그는 평등과 사회적 상호 연대보다는 엘리트주의·경쟁주의를 새로운 정책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정치적 규제로 관료화했다는 비판을 받아온 대학 사회가 이제는 경제적 이유로 변신을 강요당하고 있다. 그 속에서 교수와 학생은 개혁의 주체이기는커녕 그 대상으로 도마 위에 올라 있다. 개정 대학법이 발효될 내년 4월 독일의 대학가에는 때아닌 한파가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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