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하원의 <북한 식량난 리포트> 독점 공개
  • 워싱턴·卞昌燮 편집위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7.10.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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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하원 <북한 식량난 리포트> 단독 입수·공개/부패 관료의 식량 빼돌리기 심각
‘8월21일 목요일. 평양에서 북쪽으로 자동차로 1시간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인구 18만명의 구장면. 지난해 수해로 14만명이 해를 입은 곳. 이 마을에서 한 해 필요한 식량은 4만t이지만 지난해 이 마을 집단 농장 24개와 국영 농장 2개의 수확량은 고작 7천5백t. 당국의 긴급 구호 식량으로 1인당 하루 백g씩 식량이 배급되었으나 지난 1월 중단. 전체 5백명이 다니는 마을 유치원의 경우 식량 위기로 등교율이 35%에 불과했으나 국제 구호 식량이 배급되기 시작한 지난 2월 이후 85%로 치솟음. 현재 마을 창고에는 옥수수 2천8백53㎏, 쌀 45㎏, 식용유 1백14㎏을 보관 중이며 이대로라면 10월 중순까지는 문제 없을 듯.’

8월말 7일간 북한 방문해 보고서 작성

추수기를 코앞에 두고 식량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한의 이곳저곳을 돌아본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소속 전문위원 마크 커크·아모스 혹스타인 두 사람이 지난 9월2일 작성한 현장 보고서의 일부 내용이다. 특히 공화당 소속 벤저민 A. 길먼 위원장과 이 위원회 국제경제정책 및 통상분과위원장인 민주당 소속 샘 게이댄슨 의원이 의회 차원의 북한 식량 문제 논의에 대비하여 실태 파악 차원에서 앞의 두 사람을 파견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시사저널>이 단독으로 입수한 이번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식량난은 북쪽 지역으로 갈수록 특히 심각하며, 올해 추수분도 내년 3월이면 동 날 것이라고 전망해, 내년에도 대규모 식량 원조가 불가피함을 강하게 시사했다.

지난 8월19~25일 북한의 식량난 현장을 찾은 이들은 이 보고서 말미에 자신들이 북한 김계관 외교부 부부장과 면담했을 때 제시한 여덟 가지 권고 사항을 결론으로 제시해 눈길을 끈다. 그 내용을 보면, △ 세계식량계획(WFP) 및 비정부기구 요원들이 북한 관리의 동행 없이 병원·보건소·유치원을 불시에 방문할 수 있도록 허용할 것 △지금껏 국제 구호 요원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양강도와 자강도 방문을 허용할 것 △한국어를 할 줄 아는 국제 요원의 입국을 허용할 것 △미국 텔레비전 방송사 중 한 회사 기자의 입국을 허용해 영양 실조에 걸린 어린이들을 촬영할 수 있도록 허용할 것 △식량 원조 부대에 쓰는 글씨는 영문말고 한국어로도 함께 표기할 것 △국제 감시 요원들의 농산물 물물교환 시장 참관을 허용할 것 △현재 30평으로 묶여있는 사유 농토를 최소 3천평으로 확대할 것 △현재 진행 중인 4자 회담이 성공리에 마무리될 때 대북 장기 개발 원조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할 것 등이다.

이들은 북한 방문에 앞서 일본과 중국을 각각 방문해, 북한 식량 원조 관계자들을 두루 면담하고 해당 정부의 원조 계획에 대해서 상세한 브리핑을 받았다. 특히 일본에서 이들은 주일 미국대사관 정치과의 닐 실버·캐럴 레이널스 1등 서기관으로부터 브리핑을 받았다. 이들을 만난 한반도 전문가 시즈오카 대학 이즈미 하즈메 교수는, 극심한 식량난에 농산물 품귀 현상까지 겹쳐 북한에는 얼마 전까지 2개였던 암시장이 현재 40개로 불어났다고 밝혔다. 그는 또 원조 식량이 군수용으로 전환될 가능성과 관련해 ‘중국이 이미 50만t을 군용미로 약속한 상태이므로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다.

모두 34쪽으로 된 이 보고서 표지에는 청진시 한 병원에 영양 실조와 설사병으로 누워 있는 한 살짜리 어린이 사진이 실려 있으며, 보고서 곳곳에 영양 실조에 걸려 입원한 어린이와 뼈만 앙상히 남은 어른들의 컬러 사진을 싣고 있어, 식량난의 현주소를 텔레비전 화면만큼이나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95년부터 대규모 식량 원조를 받아온 북한의 대외 식량 창구는 형식적으로는 이원화되어 있다. 하나는 대외무역부 산하 큰물피해대책위원회이고 또 하나는 해외동포원호위원회이다. 외교부 관리가 대거 파견되어 있는 큰물피해대책위원회는 식량 원조 내역을 비교적 잘 기록해 놓고 있지만 정보요원들이 주로 근무하는 해외동포원호위원회의 경우 어디서 얼마나 식량을 조달하는지 실태를 파악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그런데 북한이 해외로부터 조달하는 상당 부분을 해외동포원호위원회가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큰물피해대책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북한은 지금까지 세계식량계획의 1억2천만달러와 국제 구호기관들의 8천4백만달러 등 모두 2억4백만달러를 원조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는 북한의 대외 식량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큰물피해대책위원회의 위상이 북한 정부 내에서 상대적으로 커지고 있음을 특히 주목하고 있다.

국제 구호기관들의 식량 원조가 줄을 이으면서 이를 관장하는 일선 관리들의 부정 부패도 심각한 것 같다. 보고서는 미국 관련 소식통의 말을 빌려, 현재 식량 배급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은 평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일수록 악화하고 있으며, 특히 각 지역으로 운송되는 과정에서 곡물이 빼돌려지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북한 당국 방해로 식량 감시 활동 지지부진

관리들의 부패와 식량 포탈 현상이 빚어지는 것은 북한내 유일한 감시 기관인 세계식량계획의 감시 기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지난 8월23일 세계식량계획의 커츠 감시국장과 미국의 비정부기구 식량 원조 감시요원들이 평양에 도착함에 따라 감시 활동이 다소 나아질 기미를 보이고 있지만 실효성은 의문이라는 것이 보고서를 작성한 두 미국 전문위원의 판단이다. 이같은 회의론의 가장 큰 배경은 감시 요원 중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은 세계식량계획이나 다른 국제 구호기관의 한국 말을 할 줄 아는 요원에 대해서는 혹시 한국의 정보원일지 모른다는 우려를 갖고 있다고 한다.

현재 식량 감시 문제와 관련해 두 전문위원이 평양에서 만난 세계식량계획 브리지타 칼그린 북한 담당 국장과 존 프라우트 부국장의 설명은 이렇다. 현재 감시요원은 모두 7명이다. 이들은 1주일에 보통 15∼20곳씩을 돌아보는데, 항만이나 배급 지정소의 경우 비교적 감시 활동이 원활하다. 그러나 각급 지방 단위 유치원·병원·보건소의 경우 당국의 제한 때문에 제대로 감시할 수가 없어 감시 대상 지역도 전체의 30% 미만으로 뚝 떨어진다는 것이 이들의 고민이다.

커크·혹스타인 두 사람의 북한 방문은 북한측이 잡은 일정에 따라 8월19일 평양의 김일성 주체탑 앞에 헌화하는 것을 시작으로 일정에 들어갔다. 이들은 평양에 있는 동안 큰물피해대책위원회 정윤형 국장을 만나 양강도와 자강도 방문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대신 이들은 함경북도와 황해도 일부 마을을 돌아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평양에서 이틀을 보낸 다음 날인 8월21일 이들이 맨 처음 찾은 곳은 차편으로 1시간 30분 거리인 평양 북쪽 구장면으로, 지난해 수해로 막대한 해를 입은 곳이다. 여기서 이들은 구장면 유치원을 찾아 영양 실조로 등교하지 못하거나 쓰러진 아이들의 참상에 관해 들었다. 김영선 원장에 따르면, 현재 전체 유치원생 5백명이 국제 기준인 하루 2백50g에다 채소를 50g씩 배급받고 있다. 특히 지난 4월까지만 해도 자기가 가르치던 어린이 가운데 35명이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영양 상태가 나빴지만 구호가 시작된 뒤 지금은 단 3명만이 입원한 상태라고 밝혔다.

병상 3백개인 구장면의 한 병원에 기록된 환자 상황을 보자. 박삼규 총무과장에 따르면, 지난해 영양 실조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어린이 2백50명과 어른 3백80명 등 무려 6백3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올해에는 많이 줄었지만 어른 1백80명과 어린이 18명이 영양 실조로 사망했다. 실제로 이들은 병원에서 이종휘라는 18개월 된 여자 어린이가 입원한 지 한 달이 다 되도록 제대로 설 수 없는가 하면, 12개월 된 오성지라는 어린이가 영양 실조와 설사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구장면은 다행히도 세계식량계획이 성인을 대상으로 연장 근로에 대한 대가로 식량을 지급하는 ‘근로 식량제(Food-For-Work)’를 실시해 9천명이 혜택을 입었다. 이 프로그램에 따르면, 일반 성인들은 하루치 근로 대가로 2㎏씩 식량을 배급받고 있는데, 현재 이 마을은 1천5백t을 배급받은 상태라고 한다.

이 마을 큰물피해대책위원회 채의석씨에 따르면, 당국으로부터 식량 배급을 받은 때는 93년이 마지막으로, 당시만 해도 하루 평균 8백g씩 식량이 배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94년 수해로 그 해 수확이 몽땅 날라간 뒤 주민들이 풀뿌리에 의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집단 농장과 별도로 가구당 최고 30평까지 사유 농작물을 기르게 한 덕에 여기서 나는 채소나 옥수수로 겨우 연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구장면 방문 중 주부인 이영선씨 집을 불시에 찾았다. 탄광 기술자인 남편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둔 이씨는 당국의 식량 배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30평 남짓한 자신의 농토에서 기르는 감자와 채소로 연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겨울에 땅이 얼면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비축한 옥수수를 열흘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꾸릴 예정이라고만 대답했다.

구장면 방문을 끝내고 이튿날인 8월22일 찾은 황해남도 인산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한 관계자는 이들에게 마을의 한 해 식량 소요량은 19만t인데 지난해 수확량은 고작 9천5백t이었으며, 올해 추수 역시 만t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게다가 올해 태풍 위니의 여파로 옥수수 작물의 60%가 해를 입었다고 한다.
어린이만 식량 배급, 어른들은 끊긴 지 오래

이런 사정은 사리원시도 비슷했다. 이 도시 큰물피해대책위원회 안종팔씨에 따르면, 현재 하루 2백50g씩 식량을 배급받는 사람은 어린이뿐이며 어른은 7월 말 이후 배급이 끊겼다고 한다. 사리원시 30만 인구가 한 해 필요한 식량이 4만t이나 지난해 추수는 만t이었다. 올해는 1만6천t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적정 소요량에는 크게 못 미친다. 따라서 이런 상황이라면 올해 추수분이 내년 2월 말이면 바닥난다는 것이다.

이들은 사리원시에서 김상교씨 집을 불시에 찾았다. 그는 건설노동자인 아들과 며느리·손자 등 3명과 살고 있는데, 유치원에 다니는 손자만이 식량을 배급받을 뿐 자신들은 벌써 3주째 배급을 받지 못한 상태라고 말했다.

사리원시 방문을 끝낸 다음 날 이들은 함경북도 도청소재지인 청진시를 찾았는데 그곳 실상은 앞서 찾은 지역과 마찬가지였다. 함경북도 큰물피해대책위원회 김 근 위원장은 당국의 공식 식량 배급이 지난 5월로 중단되었고, 시의 임시 식량도 7월 말에 모두 바닥이 났다고 밝혔다. 그나마 어린이들은 세계식량계획이 제공한 구호 식량으로 위기를 넘겼지만 어른들은 대용 식량이나 중국에서 반입한 식량으로 연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청진시의 한 유치원(정원 4백50명)의 경우 등교율이 30%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7월2일 식량이 배급된 뒤부터 90%로 껑충 뛰었다고 한다. 현재 어린이들은 하루 2백50g씩 식량을 배급받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최소 30명이 영양 실조로 입원한 상태이며, 50명은 체중 미달이라고 밝혔다. 한 예로 다섯 살 난 김옥리라는 아이는 키가 69㎝에 몸무게는 10㎏, 역시 다섯 살인 박철혁 어린이도 키 70㎝에 몸무게가 10.5㎏일 정도로 발육 부진 상태가 심했다. 특히 청진시 인근 포흥병원에는 나이는 열여섯 살인데 몸무게가 고작 20㎏인 김은실이라는 소녀가 입원해 있어 충격을 주기도 했다.

일요일인 8월24일 이들이 찾은 함경북도 경성면의 한 병원 역시 영양 실조로 입원한 환자가 전체의 80%에 달할 정도였다. 게다가 이 병원에서는 외제 약품이라고는 구경도 할 수 없었다. 시 당국은 병원에 대한 식량 배급을 금하고 있지만 일부 간호소와 유치원은 세계식량계획이 나눠준 식량 일부를 병원의 어린이들용으로 몰래 공급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난해 이 병원에서 영양 실조로 목숨을 잃은 어린이가 8명에 이르며 올해도 2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1주일간 머무르며 북한의 식량난 실상을 돌아본 두 사람은 북한 방문 마지막 날인 8월25일 김계관 외교부 부부장을 만나 앞서 보고서의 결론 부분에 나온 여덟 가지 사항을 권고했다. 그러나 이같은 요구에 대해 김부부장과 정윤형 큰물피해대책위원회 국장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보고서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어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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