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동성 결혼 인정하니 문화 전쟁 발발하네
  • 워싱턴/변창섭 (cspyon@sisapress.com)
  • 승인 2004.04.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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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보수·진보 세력 대립과 세대간 갈등 몰고와
미국에서는 출생아 10명 중 3명이 사생아요, 아이들 절반이 이혼한 부모를 두고 있을 정도로 가정이 파괴된 지 오래다. 엎친 데 덥친 격으로 최근에는 남성 혹은 여성끼리 ‘결혼’해 부부의 연을 맺는 일이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가족의 근원이라 할 결혼 제도마저 무너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높은 이혼율이 가정 파괴의 ‘주범’이었다면, 지금은 동성 결혼이 결혼 제도는 물론 가족의 울타리를 무너뜨리는 최대 위협 요인으로 떠올랐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사태의 발단은 미국 동부 매사추세츠 주에서 비롯했다. 지난해 11월 주 대법원이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같은 판결이 나오자마자 진보 성향이 강한 캘리포니아·뉴욕·오리건 주 등에서 수많은 동성 커플이 경쟁하듯 결혼식을 올리기 시작했고, 일부 시에서는 시장이 직접 결혼을 주선하기까지 했다.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시 당국은 법원의 금지 명령이 있던 지난 3월 초까지 4천여 쌍에게 결혼허가증을 내주었으며, 오리건 주도 지난 4월 중순까지 2천8백여 쌍에게 결혼허가증을 발부했다. 매사추세츠 주는 오는 5월17일을 기해 주 대법원 판결에 따라 식을 올린 동성 커플에 대해 남녀 신혼 부부와 마찬가지로 결혼허가증을 내주어야 한다. 그럴 경우 매사추세츠 주 동성 커플은 물론 다른 49개 주의 동성 커플이 매사추세츠로 몰려와 ‘합법적인 결혼식’을 올릴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매사추세츠 주 법원 판결이 파장 불러

이처럼 동성 결혼을 둘러싼 각 주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매사추세츠 주 대법원의 판결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동성 결혼을 금지하는 연방 헌법 수정안 제정에 찬성한다고 선언했다. 부시 대통령이 헌법 수정이라는 최후의 카드를 꺼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996년 민주당 클린턴 행정부 시절 결혼을 남녀간 결합으로 엄격히 제한한 ‘결혼 수호법’이 발효되어 38개 주가 이를 채택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사추세츠 주처럼 주 사법부의 판결에 따라 사문화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결혼 수호법의 근간을 뒤흔드는 동성 결혼 합법화 판결을 원천 봉쇄할 유일한 방안으로 헌법 수정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말할 것도 없고 부시 대통령이 속한 공화당 내에도 ‘헌법을 고쳐 가면서까지 동성 결혼을 금지해야 하느냐’ 하는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현재 동성 결혼에 대한 미국인의 여론은 반대가 다소 우세한 편이다. 전국지인 USA 투데이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10명 중 6명이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들은 법적인 의미의 결혼은 인정하지 않더라도, 자의에 따라 남성 혹은 여성이 부부를 이루어 함께 사는 형태는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민들은 동성 커플에 대해 ‘결혼은 노, 결합은 예스’라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10대, 20대로 내려갈수록 10명 중 7명꼴로 동성 커플에 관용적인 반면, 장년층은 정반대로 나타나 이 문제를 둘러싼 세대간 의식 차가 매우 큰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은 동성 결혼 문제에 관한 한 구미 다른 나라에 비해 다소 보수적인 편이다. 미국과 이웃한 캐나다의 경우 이미 지난해 6월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이후, 현재 연방 차원에서 법제화를 논의하고 있다. 서유럽에서는 2001년 4월 네덜란드에서 처음 동성 결혼을 합법화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동성 결혼이 주춤하고 있다.

덴마크는 1989년 동성 커플에게 결혼과 동등한 권리를 인정하는 ‘시민적 결합(civil union)’ 자격을 부여했다. 동거가 일종의 결혼 문화로 정착한 프랑스는 1999년 이른바 ‘시민연대협약’(PACS)을 도입해 동성 커플이 시청에 가서 혼인신고서만 제출하면 일반 부부들과 동등한 혜택을 누린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의 영향력이 비교적 큰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동성 결혼에 관해 아직은 엄격한 편이다.

미국의 경우 매사추세츠 주에 앞서 이미 1971년 미네소타 주에서 동성 결혼을 금지한 주 법이 위헌이라는 소송이 제기된 바 있고, 뒤이어 켄터키 주와 워싱턴 주에서도 비슷한 소송이 제기되었으나 모두 기각되었다. 그러나 1993년 하와이 주 대법원이 동성 결혼 금지가 연방 헌법의 차별 금지 조항에 위배된다고 판결하자 동성 결혼 문제는 단숨에 전국적 이슈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 판결은 1999년 하와이 주 주민들이 주민 투표를 통해 동성 결혼을 금지함으로써 ‘없었던 일’이 되었다.
사그라져 가던 동성 결혼의 불씨는 미국 북동부에 있는 버몬트 주에서 되살아났다. 주 대법원이 동성 커플에 대해서도 전통적인 남녀 결혼에 준하는 주 차원의 혜택과 보호를 허용할 것을 판시한 것이다. 이에 따라 버몬트 주 의회는 이듬해 주 차원에서 동성 커플에 대해서도 ‘결혼’과 같은 형태의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시민적 결합’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버몬트 주에서는 지난해 말까지 총 6천6백83쌍이 이런 방식으로 부부가 되었다.

많은 동성 커플이 시민적 결합에 만족하지 않고 굳이 결혼이라는 ‘면허증’을 요구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에 대한 법적 차별이 남녀 부부에 비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 의회 산하 일반회계감사국(GAO)이 1997년 발표한 특별 보고서에 따르면, 동성 커플은 결혼한 남녀 부부에 비해 연방 차원에서 최소한 1천49 가지, 주 차원에서는 3백50 가지 이상의 법적 차별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결혼한 남녀 부부의 경우 새집을 공동 명의로 구입할 수도 있고,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집을 팔 때 부부가 각각 25만 달러씩 도합 50만 달러까지 세금을 공제받을 수 있지만 동성 커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결혼한 부부는 해마다 공동 명의로 합산 소득을 신고해 환불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동성 커플은 따로따로 정산하게 되어 있어 환불은커녕 도로 물어내기 일쑤다. 또 은퇴 후 국가에서 주는 연금인 사회보장제도의 혜택, 혹은 무료 의료 혜택인 메디케이드에서도 동성 커플은 일반 부부에 비해 훨씬 불리하다.

또한 일반 부부의 경우 어느 한쪽이 상대 배우자의 서면 동의 없이 몰래 연금을 수령하는 행위 자체를 금지하는 보호 조항이 있지만, 동성 커플은 이런 보호를 받지 못한다. 동성 커플은 배우자가 응급센터에 입원해도 그 옆에서 간호할 수 있는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의료 보험의 경우, 일반 부부는 자녀를 포함하는 가족까지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동성 커플은 가입 당사자와 10세 미만 자녀만 혜택을 받는다.

그밖에도 남녀 부부는 상속권, 자녀 입양과 양육권, 접견권 등 법이 주는 모든 혜택을 누리지만, 동성 커플은 그렇지 못하다. 또한 결혼한 영주권자 부부는 가족을 이민 목적으로 초청할 수 있지만 동성 커플은 설령 시민권자일지라도 초청이 불가능하다.

이같은 항목은 1천3백여 개에 달하는 연방 및 주 차원의 혜택 가운데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동성 커플은 주 정부나 연방 정부로부터 정식으로 결혼을 인정받지 못하는 한 영원히 누릴 수 없는 것들이다. 주 차원에서 남녀 부부와 100% 똑같은 혜택을 주는 버몬트 주의 동성 커플이나 제한된 혜택을 받는 캘리포니아·하와이·뉴저지 주에 사는 동성 커플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시민적 결합조차 인정하지 않는 주에 사는 동성 커플들은 뾰족한 대책도 없이 차별 대우를 감수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미국의 동성애 권익 옹호론자들이 시민적 결합에 만족하지 않고 100% 법적 보호를 받는 ‘결혼권’을 쟁취하기 위해 사생 결단식으로 매달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 보스턴 시에서 입양한 두 자녀와 함께 사는 동성 커플 클레어 험프리 부부는 “우리가 결혼을 인정받아야 주 정부는 물론이고 연방 정부와 사법부, 정치권, 나아가 일반 국민도 우리들 주장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동성 커플의 애절한 호소에 대해 기독교 우파를 중심으로 한 보수 세력은 일고할 가치도 없다는 반응이다. 부시 대통령이 헌법 수정안에 찬동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현정부가 적극 대처하지 않을 경우, 2000년 대선 때처럼 기독교인이 이번 대선에서 또 기권할지 모른다’는 이들의 엄포 때문이었다.

보수 세력은 동성 결혼이 전통적인 남녀 결혼 제도의 근간을 뒤흔들 뿐 아니라, 가정의 뿌리인 아이들에게도 해로운 영향을 줄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들은 특히 동성 커플이 키운 아이들이 정상적인 부모 밑에서 큰 아이들에 비해 성적이 나쁘고 법을 잘 어길 뿐 아니라 마약 사용 빈도와 자살률도 높다고 주장한다. 동성 결혼이 허용될 경우, 아이들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쳐 궁극적으로 결혼이라는 유서 깊은 제도가 붕괴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아무런 과학적 통계나 근거도 없는 데다 단편적인 사례에 의존한 평가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오늘날 미국 아이들이 겪는 정서적 황폐화는 동성 커플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남녀 결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전통적인 결혼 제도의 결함에서 주로 비롯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의 3분의 1이 사생아이며, 비슷한 규모의 아이들이 부모 가운데 한 사람과 살거나 아예 고아이다. 설상가상으로 결혼한 부부 중 절반이 이혼하고 있다.

가정 파괴 막으려고 계약 결혼 장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각 주에서는 결혼의 근간인 가정을 지키기 위한 각종 프로그램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플로리다 주에서는 고등학교 때부터 학생들에게 결혼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고, 루이지애나·아칸소 주에서는 이혼을 억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계약 결혼’을 장려하고 있다. 애리조나 주는 주 차원에서 부부가 백년해로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무료 세미나를 열고 있다. 오클라호마 주에서는 이혼율을 낮추는 사업에 주 복지기금까지 투입할 정도다. 이쯤 되면 전통적 결혼 제도의 파괴범은 동성 커플이 아니라 동성 커플의 결혼을 그토록 반대해온 일반 남녀 부부들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닌 듯싶다.

하지만 매사추세츠 주의 동성 결혼 합법화가 몰고온 심리적 파장은 기존 결혼 제도의 붕괴가 가져다주는 효과를 압도한다. 전문가들은 1973년 연방 대법원의 낙태 합법화 판결 이후 미국 사회가 극심한 사회 혼란을 겪었던 것처럼, 이번 동성 부부 합법화 또한 미국 사회 내 보수와 진보 세력 사이에 양보 없는 ‘문화 전쟁’을 부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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