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 대결 슈퍼 컴퓨터의 괴력과 한계
  • 卞昌燮 기자 ()
  • 승인 1997.05.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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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체스 대결한 디프 블루, 15수 내다보는 능력 불구 논리·추리에는 한계
최근 뉴욕의 한 고층 빌딩에서는 슈퍼 컴퓨터와 인간과의 세기의 체스(서양 장기) 대결이 벌어졌다. 6전 4선승제인 이번 대결의 주인공은 러시아가 자랑하는 체스 귀재인 게리 카스파로프(34)와 이번 경기를 위해 IBM이 특별 제작한 슈퍼 컴퓨터 디프 블루(Deep Blue). 9일 현재 1승1무2패로 카스파로프가 다소 불리한 처지이다. 그러나 승패 여부를 떠나 이번 경기가 디프 블루 같은 슈퍼 컴퓨터가 아직 컴퓨터의‘숙제’로 남아 있는 인간의 지능 분야에 얼마나 도전할 수 있느냐를 들여다볼 계기를 제공했다는 평이다.

체스는 64칸으로 이루어진 장기판에 병마를 16개씩 가진 두 경기자가 상대측의 왕을 먼저 잡으면 승리한다. 정해진 길을 따라 말이 움직이는 장기와 달리 체스는 우군 말끼리의 이합집산에 따라 행마가 달라진다. 바로 이런 행마법과 무궁무진한 대응수 때문에 체스는 흔히 인간의 지력을 시험해볼 수 있는 최고의 지적 게임으로 인식된다.

이 분야의 최고수로 꼽히는 카스파로프는 러시아 연방 아제르바이잔 태생으로 스물두 살 때 최연소 세계 체스 챔피언 자리에 올라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주인공이다. 85년 이래 세계 체스의 1인자 자리를 놓쳐본 적이 없는 그는 지난해 2월 디프 블루의 원형인 디프 소트(Deep Thought)를 상대해 4승 2패로 힘겹게 꺾은 바 있다.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일 뿐”

반면 IBM의 최고 프로그래머들이 개발한 디프 블루(정확한 명칭은 IBM RS/6000SP)는 무게가 1.4t이나 나가며, 초당 2억번의 행마법을 계산해 최적의 대응수를 예측해내는 무시무시한 괴력을 지닌 슈퍼 컴퓨터이다.

이번 대결을 준비한 IBM측이 가장 관심을 가진 부분은 디프 블루 같은 슈퍼 컴퓨터가 주특기인 연산 영역을 넘어, 넘볼 수 없는 성역으로 인식되어온 논리·추리와 같은 지능의 영역에 얼마나 도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실제로 모든 컴퓨터는 아무리 고차원의 방정식이라도 해법에 필요한 프로그램만 갖추면 순식간에 풀어낸다. 문제는 이런 컴퓨터가 과연 사물을 인지하고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며 나아가 체스 경기처럼 사고와 논리가 필요한 영역에서 인간을 뛰어넘을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디프 블루 제작에 참여한 정젠 탄씨는 이 슈퍼 컴퓨터가 인간처럼 실생활의 문제들을 풀 수 있는 나름의 인공 지능을 갖추었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열다섯 수 앞까지 내다보는 디프 블루의 엄청난 능력은 인간이 만든 고차원의 프로그램 덕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반론이 만만치 않다.

매릴랜드 대학 벤 슈나이더맨 교수는 <뉴욕 타임스>와의 회견에서‘컴퓨터 자체는 나무 연필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지능을 갖고 있지 않다’고 잘라 말한다. 그저 인간이 짜놓은 프로그램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뿐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체스처럼 상황 변수가 많은 게임에서 슈퍼 컴퓨터는 인간이 실수를 하지 않는 한 이기기보다는 질 가능성이 더 크다는 지적이다.

또 하나, 슈퍼 컴퓨터인 디프 블루는 일반 컴퓨터와 마찬가지로 오직 프로그램에 따라 충실히 임무를 수행하는 기계에 불과하다. 이 프로그램에는 역대 체스의 명수들이 대전한 수많은 대국에서 드러난 정석법이 모두 입력되어 있다. 만일 상대인 인간이 변칙적인 포석을 하면 디프 블루와 같은 슈퍼 컴퓨터라도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다. 카스파로프가 이번 대결에 임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전략도 컴퓨터의 이같은 맹점을 최대한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아무튼 체스처럼 논리와 판단력이 필요한 분야에서 앞으로 더욱 정교한 슈퍼 컴퓨터가 등장해 인간을 압도하는 상황이 벌어질 때 국제 외교 무대에서 슈퍼 컴퓨터가 외교관을 대신하는 날 역시 멀지 않을 것이라는 흥미로운 예측마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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