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이 북한 지원에 팔 걷어붙인 까닭
  • 卞昌燮 기자 ()
  • 승인 1997.06.1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EU, 정치·경제적 지분 확보 위해 식량 지원 앞장
99년 단일 통화 제도 채택을 끝으로 명실공히 세계 최대의 단일 정치·경제 블록으로 자리잡을 유럽연합(EU)이 그동안 소홀히 해온 아시아 외교를 강화하고 있다. 특히 94년 7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유럽 기업들이 앞으로 10년 동안 날로 성장하고 있는 아시아와 적극 협력하지 않을 경우 국제 경쟁에서 처질 가능성이 있다’면서 신아시아 전략을 채택한 뒤 이런 움직임은 더욱 빨라지고 있다.

15개 회원국으로 구성된 유럽연합에는 대서양 외교의 중심국인 영국·프랑스·독일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앞으로 한반도 문제를 포함해 세계적 관심사에 큰 영향력을 미칠 것이 확실하다. 특히 눈여겨 볼 것은, 유럽연합이 근래 들어 한반도 이해 관계에 깊은 관심을 가지며 정치적·경제적 지렛대를 확보하려 힘쓰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노력은 유럽연합의 북한 지원 정책과 관련해 그대로 드러났다. 단적인 예로 유럽연합은 지난 5월22일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와 앞으로 5년에 걸쳐 경수로 건설 비용 8천5백만달러를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즉 북한에 경수로가 완성될 때까지 매년 최대 1천9백만달러씩 중유 공급 비용을 대기로 한 것이다. 원래 이 비용은 미국이 부담하기로 했으나 3천만달러 이상은 지원할 수 없다는 의회의 반대에 부닥쳐 큰 어려움을 겪어 왔다. 결국 사정이 급한 미국은 지난해 일본에 구원 신호를 보내 부족분 1천9백만달러를 메웠지만, 일본마저 추가 비용 부담에 난색을 나타내는 바람에 유럽연합이 맡게 된 것이다.

유럽연합이 이런 엄청난 금액을 제공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한반도 문제에 나름의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 경수로 부대 시설 같은 수익 사업에 유럽 기업들이 나중에라도 적극 참여할 수 있는 지분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유럽연합은 비용 제공에 대한 반대 급부로 한국·미국·일본 등 3국으로 이루어진 집행이사국에 추가로 참여할 권리를 확보한 상태이다.

현재 국제 사회에서 중요 현안으로 떠오른 북한의 식량난 문제와 관련해서도 유럽연합은 왕성한 지원 활동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유엔의 호소에 부응해 95년과 96년 대북 식량 지원에 나섰던 유럽연합은 지난 2월에도 1천5백만달러어치 식량을 지원한 바 있다. 그런데 지난 5월23일 유럽연합은 또다시 식량 15만5천t(약 6천9백만달러)을 지원하기로 발표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는 세계식량계획(WFP)이 북한의 절박한 식량난 해소를 위해 국제 사회에 요청한 20만t 중 4분의 3 이상을 차지한다.

식량 배급 감시 요원 파견도 성사될 듯

여기에 더해 유럽연합은 북한 어린이들을 위한 식량 지원액으로 1천5백만달러를 내놓을 예정이어서 총지원액 규모는 8천4백만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이는 미국(2천5백만달러)과 한국(1천6백만달러)보다 훨씬 많은 것은 물론, 현재 진행 중인 유엔의 3차 북한 지원 목표액이 1억2천6백만달러이고 그 가운데 세계식량계획의 목표치가 9천5백만달러임을 감안할 때 엄청난 액수이다.
유럽연합 관리들은 북한에 대한 식량 지원이 순수한 인도주의적 배려에서 나온 조처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같은 지원을 통해 한반도에서 긴장이 완화되기를 기대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대북 식량 지원을 통해 4자 회담에 관한 논의가 진전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외교 전문가들은 이번 식량 지원이 아시아에 대한 유럽연합의 정치·안보 유대 관계를 강화한 효과를 가져왔다고 본다.

대규모 식량 지원과 관련해 유럽연합은 이미 지난 3월 북한에 식량 전문가를 2명 파견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원조에 따른 나름의 ‘정치적 지분’을 인정받았다. 이와는 별도로 유럽연합은 유럽연합에 의해 제공되는 식량의 배급을 감시할 자체 요원 4명을 북한에 파견할 예정이며, 이 문제도 북한의 협조로 순조롭게 풀릴 전망이다. 지금까지 북한이 서방에서 파견된 감시 요원에 대해 입국 불허 방침을 견지해온 전례에 비추어 유럽연합의 파견 계획이 성사하면 그 자체로도 큰 의의를 지닐 것 같다.

이처럼 유럽연합의 북한 지원 속도가 빨라지면서 어정쩡한 처지에 놓이게 된 나라는 한국이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의 집행이사국에 유럽연합이 참여하게 됨으로써 그동안 한·미·일 3국 전원합의제로 진행되어온 의사 결정 구조에 변화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게다가 경수로 사업이 본격화하면서 유럽연합이 일정 부분의 사업 참여를 요구해올 경우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이다.

유럽연합의 대북 식량 지원 문제도 한국에 골칫거리를 안겨주고 있다. 한국 정부는 식량 지원을 4자 회담과 연계하는 등 내심 이 문제를 대북 정책의 지렛대로 삼으려 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앞으로 유럽연합의 대북 식량 정책이 활기를 띠면 띨수록 한국의 대북 식량 카드가 빛이 바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최근 몇년 새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강대국은 물론 유럽연합처럼 한반도에 별 이해 관계가 없던 나라들도 나름의 정치적·경제적 실리를 챙기기 위해 총력 외교를 펼치고 있다. 외교 전문가들은 대북 식량 지원이나 경수로 지원 문제가 국제 현안으로 탈바꿈한 만큼 한국이 지금부터라도 유럽연합과 대북 정책을 조율하기 위해 다각도로 외교 노력을 펼쳐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