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먼저 군비 축소하라" 미국의 야릇한 메시지
  • 南文熙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8.04.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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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신뢰 구축, 후 군비 축소’ 종전 입장 번복… 한·미 갈등 불씨
온나라가 북풍 의혹에 휩싸인 지난주 미국 <워싱턴 포스트>의 전직 거물 기자 돈 오버도퍼(존스 홉킨스 대학 외교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씨가 한국을 다녀갔다. 그의 방한은 조용히 이루어졌지만 그가 불쑥 던진 ‘미국의 메시지’에 북한 문제 전문가들이 긴장하고 있다. 70년대부터 <워싱턴 포스트>의 외교 전문 기자로 활약하다 90년 초 은퇴한 그는 미국 내에서 손꼽히는 동북아 전문가이다. 얼마전에는 남북한 외교 비사를 다룬 <더 투 코리아스>라는 저서를 내놓아 깊은 인상을 남겼다.

미국공보원(USIS) 초청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진 그의 방한이 주목되는 것은 남북한 군축 문제와 관련한 그의 파격적인 제안 때문이다. 그는 방한 이튿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에서 행한 ‘남북한과 미국의 3각 관계, 그 전망’이라는 강연에서 “남북한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을 위해 한국측이 먼저 군사비 삭감을 단행할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의 이같은 제안은 90년대 초 군축 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을 때부터 한·미 양국이 견지해 온 ‘선 신뢰 구축, 후 군비 축소’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북한 군사력 약해져, 전쟁 위험 줄었다”

당연히 강연회 참석자들로부터 ‘신뢰 구축이 안된 상태에서 일방적인 군축 단행은 위험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그는 “바로 신뢰 구축을 위해 먼저 군사비 삭감을 단행하자는 것이다. 북한측도 이에 상응하는 조처를 취할 것이다”라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거물급 언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발언에 무게가 실린 것은 아니다. 그의 발언 배경에는 미국 정부의 최근 입장이 깔려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 강연을 주관한 곽태환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소장은 “그의 방한 메시지는 미국 정부가 정책 추진 단계에서 흔히 사용하는 ‘애드벌룬 띄우기’로 보아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곽소장의 이같은 지적은, 오버도퍼 씨가 한국에 오기 직전 미국 국무부 군축담당관과 이 문제를 깊이 논의했다는 소식통들의 전언에 의해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국방연구원 고위 관계자는 ‘요즘 워싱턴 정계에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흐름을 반영한 발언’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워싱턴의 이런 흐름은 미국 우드로 윌슨 연구소의 셀리그 해리슨 연구위원이 지난 1월10일자 국내 언론에 ‘김대중 대통령에게’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발표함으로써 포문이 열렸다. 해리슨 씨는 “IMF 체제에서 실업자 대책과 중소기업 지원 자금 확보에 고심하고 있을 김대중 대통령은 이런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군사비를 삭감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김대통령이 먼저 10만 병력 삭감을 선언하면 북한도 호응하고 나설 것이라고 구체 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와는 다른 각도이지만 미국 의회 산하 평화연구소의 스캇 스나이더 박사 역시 지난 2월23일자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긴장 완화를 위해 한·미 양국이 먼저 군사력 후방 배치와 유엔사령부 해체를 단행할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평소 진보적 색채를 보이는 해리슨의 주장은 그렇다고 쳐도, 미국 정부 입장에 정통한 스나이더의 주장은 미묘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최근 이들 인사들을 통해 나타난 미국 정부 입장은 분명 지난해 중반까지와 크게 다른 것이다. 외교안보연구원 윤덕민 박사는, 지난해 여름까지 미국이 타깃으로 삼은 것은 한국이 아니라 북한이었다고 말했다. 즉 당시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는 ‘북한이 먼저 군사력을 후방으로 재배치해야 대규모 식량 지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미국측 입장이 최근 들어 정반대로 바뀐 이유는 무엇인가. 전문가들은 그 첫째 요인으로 미국 정보기관들에 의한 북한 군사력 재평가를 들고 있다. 북한 경제난 이후 미국 정보기관들이 북한의 군사력 실체에 접근하기는 상당히 쉬워졌다. 외부로 유출되는 비밀 문건이 많아진 것이다. 이들 문건들을 분석한 결과 그동안 북한의 군사력과 그 위험성이 과장되었으며, 특히 경제난 이후 군사력이 심각하게 약해지고 있는 것으로 결론지었다는 것이다.

지난 1월7일자 영국의 군사 전문 주간지 <제인스 디펜스 위클리>와 1월12일자 미국의 <디펜스 위크>는 미국 국방정보국(DIA)·중앙정보국(CIA)·국무부가 미국 상원 정보위 및 고위 정책 결정자 들에게 제출한 북한 군사력 평가 보고서를 대서 특필한 바 있다. 이 보고서는 공통적으로 ‘경제난이 북한군 내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북한군도 식량난과 유류난에 허덕이고 있어 전쟁 위험이 상당히 감소했다’고 지적했다. 곽태환 소장은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군사비 50억달러 중 10%만 줄여도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는데, 미국측은 북한이 이런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 같다”라고 지적했다.

두 번째는, 미·북한 간의 막후 대화 가능성이다. 특히 지난해 12월12일 유엔 주재 북한대사로 새로 취임한 이형철이 그 채널로 지목된다. 이형철은 미국통이자, 평화군축연구소 실장을 지낸 경력이 말해주듯 군축 전문가이기도 하다. 북한이 이형철을 유엔대사로 보낸 것은 바로 미국과의 군축 협의를 염두에 둔 포석이라는 것이다. 이런 분석을 뒷받침하듯 그는 지난해 12월15일 취임후 첫 세미나에 참석해 남북한 상호 병력 감축을 역설하기도 했다.

최근 주한미군을 둘러싸고 막전 막후에서 전개되고 있는 흐름을 살펴보면, 미국이 이미 한국군의 군비 축소에 대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도 가능하다. 지난 3월13일 발표된 미 8군 개편 방안이 그 대표적 움직임이다.
국방부 고위 당국자 “수용하기 어렵다”

8군을 ‘미국 육군구성군 사령부’로 전환한다는 이 개편안의 취지는 △현재 한미연합사에 소속된 미군을 유사시 독자적 작전 수행이 가능하도록 독립 편성하고 △기존 방어형 대형을 공세적으로 전환하며 △유사시 병력 증강이 가능하도록 유연한 체계로 바꾼다는 것이다. 서방의 한 외교 소식통은 이와 관련해 ‘IMF 사태 후 한국의 국방비 삭감에 따라 드러날 안보 공백을 미군을 강화해 메우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막후 움직임도 있다. 주한미군의 성격을 ‘평화유지군’으로 바꾸어 비무장지대에 주둔시키려는 움직임이 그것이다. <시사저널>은 지난해 12월 4자회담 1차 회담을 전후한 미·북한 접촉에서 북한측이 미국측에 이같이 제안한 사실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최근 제네바에서 열린 4자회담 2차 본회담에서도 이 문제가 비공개리에 토론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일련의 정황을 종합해 볼 때, 남북한 군축과 관련한 큰 흐름을 짐작할 수 있다. 즉 한국의 선(先) 군축 단행으로 인한 안보 공백을 단기적으로는 미군 전력을 강화해 대체하고, 북한이 호응해 남북간 군축이 본궤도에 오르면 주한미군을 비무장 지대에 평화유지군으로 주둔시켜 남북 간에 완충 역할을 하게 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측은 현재 군축의 선행 조처로,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남북 양측의 장거리 직사포 부대를 32㎞ 정도 후방에 재배치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한 서방 소식통은 “이런 조처를 통해 서울을 북한 직사포 부대의 사정권에서 벗어나게 하고, 유사시 ‘워닝 타임(warning time)’을 확보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같은 일련의 움직임은 단지 구상 차원이 아니라 실행 단계에 들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3월13일 베를린에서 열린 미·북한 고위급 회담에서 양측은 그동안 중단했던 미사일 협상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는데, 군축 문제 역시 이 과정에서 협의될 가능성이 높다. 또 같은 날 판문점에서는 7년 만에 유엔 군사정전위와 북한군 대표 회담이 열려 3월 안에 장성급 접촉을 하기로 합의했다. 갑작스런 장성급 접촉 움직임 역시 군축 문제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미국측이 예상 외의 빠른 행보를 보일 경우 한·미 간에 갈등이 생길 소지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선 군축안에 대해 국방부 고위 당국자는 신뢰 구축이 안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수용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전문가도 있다. 즉 새 정부가 출범한 뒤로 독자적인 대북 행보를 자제해 온 미국이 이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새 정부가 북풍 사건 등으로 제살 깎아먹기에서 헤어나고 있지 못한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의 기대감을 접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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