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당·정·군 대대적 물갈이
  • 南文熙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7.04.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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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정·군 세대 교체…군부 실세 이하일 경질, 김용순·김영남도 위태
북한 노동당 군사부장 이하일이 금년 초 전격 경질된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올해 나이 62세인 이하일 당 군사부장은 김정일 체제에서 조명록 인민군 총정치국장, 김영춘 총참모장과 더불어 군부내 실세 3인으로 분류되었던 인물이다. 또 그가 부장으로 있는 당 군사부는 당중앙위원회 군사위원회 상설 기구로 조선인민군에 대한 인사 행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평화시 북한 군부의 최고 사령부라 할 수 있는 요직 중의 요직이다. 당 군사부의 이같은 성격에 따라 이하일 군사부장은 인민무력부장보다 막강한 권한을 가진 군부내 실세로 평가되어 왔다. 이런 이유로 이하일은 김일성 사망 후 북한 군부 내에서 비밀리에 결성된 것으로 알려진 ‘16인 군사위원회’의 핵심 인물이라고 거론되어 왔다.

북한 권부 소식에 정통한 서방의 한 소식통은, 이하일이 금년초 경질되었으나 그동안 극비에 부쳐졌다가 황장엽 사건이 터진 후 외부에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경질된 배경과 관련해 이 소식통은 “그동안 군 내에서 이하일의 평판이 안좋았다. 김정일에게 아부해서 출세한 인물이라고 원로들로부터 지탄을 받아왔다”라고 지적했다. 이하일에 대한 이같은 평판에 눈감아 왔던 김정일이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당·정·군에 대한 대대적 개편에 따라 주변 인물에 대한 정리를 결심하게 되면서 이하일이 전격 경질되었다는 것이다.

이하일 외에도 지난해 말부터 북한에서는 당·정·군 고위 인사들에 대해 대대적인 물갈이가 진행되어 왔다. 최근 일본의 조총련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지난 20여 년간 조총련을 총괄해온 강주일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이 올해 초 간첩 침투 작전을 수행하는 노동당 산하 사회문화부장으로 전격 발령받은 사실을 둘러싸고 인사의 배경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형식적으로는 제1부부장에서 부장으로 옮긴 것이므로 영전이라고 볼 수 있으나 ‘떡고물’이 많은 통일전선부에서 떡고물과 거리가 먼 사회문화부로 옮긴 것은 좌천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북한내 실세 중의 실세로 분류되어 온 김용순 대남 담당 비서 역시 위태롭다는 분석이 대두하는 것을 보면 북한 인사 태풍의 강도를 실감할 수 있다. 김정일의 술친구로서 김정일과 막역한 사이라고 알려진 김용순조차 최근에는 그동안의 실적 미비 등을 이유로 경질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북한 외교의 대부인 김영남 외교부장도 지난번 뉴욕의 미·북한 고위급 회담 직후 해외 순방길에 올라 이미 실무 라인에서 배제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자아냈다. 올해 74세의 고령인 김부장 역시 올 4월까지의 인사 개편에서 경질되거나 은퇴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지적된다.

국내에서는 황장엽 비서의 망명 사건을 계기로 북한 권부의 심상치 않은 동향을 주목하기 시작했지만, 일부 정보 소식통들은 황장엽 망명 역시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인사 태풍에서 파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황 사건의 경우 그 배후로 지목된 김덕홍 여광무역총회사 사장이 이미 돈 문제와 실적 문제 등으로 인해 경질될 위기에 몰려 있어 그 자구책으로 망명 사건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다만 황 사건이 당·정·군 세대 교체에 대한 김정일의 결심을 앞당긴 효과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한 서방 외교소식통은 “김정일은 이번 인사 개편에서 세대 교체까지 포함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그러나 황 사건 이후 결심을 굳히게 된 것으로 보인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런 시각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이미 지난해 말부터 김정일을 중심으로 한 권력 핵심 그룹에서는 올해로 예상되는 김정일의 권력 승계를 앞두고 세대 교체를 포함한 대대적인 물갈이를 극비리에 추진해 왔다고 주장한다. 특히 물갈이 시기와 관련해 적어도 권력 승계에 앞서 마무리해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2월16일 김정일 생일에서 4월25일 조선인민군 건군 65주년 기념일 사이를 ‘거사 기간’으로 잡았다는 것이 이들의 분석이다. 한 북한 소식통은 이와 관련해 “김정일 등 수뇌부는 이 기간에 쌀·외교·인사 문제를 마무리하고, 4월25일을 전후해 지난 3년 간의 ‘고난의 행군 기간’이 종료됐음을 내외에 선포하려 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김정일 친위세력 대거 등장…40~50대가 주축

올해 초부터 시작된 북한 권부의 긴박한 움직임은 이같은 사전 각본에 따라 치밀하게 단행된 것이고, 3월 말 현재 개편 작업은 이미 완료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국내외 소식통들의 정보를 종합하면, 최근까지 진행된 북한 권부 개편 작업은 이미 상당히 진척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노동당의 경우 이미 수뇌부 인사까지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 있다. 정무원은 4월 말을 목표 시점으로 인사 개편을 진행 중이고, 군부는 일부 인사와 관련해 갈등을 빚고 있다. 인사의 큰 방향은 당·정·군 공히 김정일 친위 세력 대거 등장으로 요약된다. 연령대로는 일부 책임자급에 1.5세대 내지 2세대가 포진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50대 중반 이후는 거의 예외 없이 물갈이 대상이다. 이에 따라 실무 핵심의 연령이 40~50대 초반으로 훨씬 젊어졌다. 북한의 새로운 권력 실세로 떠오르고 있는 이 40~50대 초반 인사들의 면면은 아직 베일에 가려 있다. 다만 이들이 그 전 세대에 비해 국제 감각이 풍부하고 개방 지향 성향을 지닌 점만은 분명하다.

당과 정 쪽에서 새로 떠오르고 있는 인물들이 이처럼 개방 지향인 데 비해, 군부는 그동안의 대외 교섭에 대해 회의적인 강경파가 득세하고 있다.

이들이 최근 당에서 떠오르고 있는 젊은 세력과 성향 면에서 대립하면서도 정면 충돌은 자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전략적 제휴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일 권력의 양대 주축이라 할 당과 군의 이질성 문제는 앞으로 출범할 김정일 시대의 딜레마가 될 것으로 보인다. 권력 승계 후 정상적인 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될 경우 그동안의 군부 통치를 종식해야 하나, 군을 제자리로 돌리기 위해서는 김정일이 식량과 물자 공급 능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신진 세력 최종 지향점은 ‘개방 확대’

당과 군 내부의 권력 균형에도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바로 `‘혼란의 시기에는 금력을 쥔 자가 힘이 있다’는 말처럼 당의 재정관리팀과 군의 군수물자 공급팀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한다는 점이다. 자금 동원 측면에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정무원은 이 점에서도 대외용 얼굴 마담 역할에 그칠 수밖에 없다.

북한의 권력 개편을 정무원의 변화에 초점을 맞춰 보면 특징이 발견된다. 우선 기존 과도 내각을 담당해온 총리·부총리는 개편 대상이다. 현재 관건은, 최근 총리로 내정된 것으로 알려진 김달현 체제가 등장하는 시기인데, 김정일 승계 시기에 맞춰 발표할 가능성이 높다. 정무원 산하 대외경제위원회는 이성대 위원장, 이성록·김정우 부위원장 등 기존 3두 체제가 지난해 말 이후 약간 재편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아직 구조 변화까지는 나타나지 않으나 임태덕 등 하위 서열자의 변동도 예상된다. 또한 대외경제위원회가 주도해 온 나진·선봉 정책 등에 당의 개입이 강화되는 등 독자성이 흔들릴 우려도 배제할 수 없다.

외교부는 그동안 북한 내에서도 전문 분야로 인정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김영남 부장의 실각 내지 은퇴가 점쳐질 정도로 어수선한 분위기다. 또 김용순 대남 담당 비서가 맡아왔던 아태평화위원회는 그동안 존립 근거가 약해져 머지 않아 당조직으로 흡수되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조직이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최근 복권설이 나도는 연형묵·김달현 전 부총리 중 한 사람이 총리가 된다면 나머지 한 사람이 아태위를 대체할 새 조직의 간판으로 떠오를 가능성도 있다.

최근 진행되는 북한 내부의 인사 개편은 중앙 무대뿐 아니라 시당이나 도당 차원에서도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전국적 인사 태풍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인사 개편 결과 새로 등장할 체제는 우여곡절은 있겠지만 앞으로 북한의 유일한 탈출구인 ‘개방 확대’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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