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홍콩 민주화, 어림없는 소리”
  • 베이징·이기현 통신원 ()
  • 승인 2004.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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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 거부…올림픽 앞두고 ‘미리 고름 터뜨리기’ 전략
“하나의 국가가 우선이고 두 개의 체제는 그 다음이다.” 쩡칭훙(曾慶紅) 중국 국가 부주석의 말이다. 중국은 건국 이래 ‘하나의 중국’을 일관되게 고수해왔다. 중국이 홍콩·마카오·타이완과 통일을 하기 위해 내세운 정책은 하나의 국가와 두 개의 체제, 즉 일국양제(一國兩制)이다. 홍콩 등 이미 자본주의 체제에 속해 있는 지역은 중국이라는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되 자치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중국의 고위 인사가 새삼 ‘양제’보다 ‘일국’을 앞세우는가. 하나의 중국이지만 체제가 다른 홍콩의 민주화가 골머리를 썩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홍콩의 기존 질서와 자치를 보장한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홍콩인들에게 중국의 철석 같은 공약은 ‘공약(空約)’이 되어버린 지 오래이다.

지난 4월26일 중국 최고 의결 기관인 전국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회(전인대 상무위)는 2007년으로 예정된 홍콩 행정장관 선거에서 직선제 방식을 도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전인대 상무위원 1백57명 전원이 출석해 실시한 투표에서 단 한 명이 기권해 사실상 만장일치였다. 현재 홍콩은 친중국 인사가 다수를 차지한 선거인단에서 행정장관을 뽑는 간접 선출 방식을 시행하고 있다.

홍콩 반환 이후 지속되는 경제 침체와 실업 증가로 인해 홍콩 정부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진 상황인 데다, 홍콩인들이 둥젠화(董建華) 행정장관을 중앙의 꼭두각시로 인식하는 상황에서 나온 이번 결정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최근 발표된 홍콩의 한 여론조사 결과도 이런 민심을 반영했다. 둥젠화 정부에 대한 신임도가 최악으로 떨어진 것이다.

지난 3월 말 홍콩대학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홍콩 정부에 대한 불만족 지수는 50%에 육박했다. 특히 응답자의 과반수 이상이 정부의 민주 개혁 작업에 강한 불만을 제기했으며, 중국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40%에도 미치지 못했다. 여론조사를 담당한 로버트 청은 “전인대의 홍콩 정치 개혁안의 대강이 나온 이상 지지도는 더 떨어질 것이다”라고 밝혔다.

홍콩 정치인들의 불만도 높다. 2007년 행정장관 선거에서 직선제를 도입하기 위해 홍콩 민주당은 대륙을 상대로 강력한 항의 활동을 전개해 왔다. 그러나 대륙에서는 이들을 ‘반애국자’라고 비난하거나, 아예 외면하는 반응을 보였다. 일부 홍콩 입법의원들이 홍콩 민주화와 관련해 연설을 하고 나면, 이들은 예외 없이 반애국자가 되어 있었다. 대륙 정부에 눈엣가시가 되어버린 일부 의원은 입국 거부자 명단에 오르기도 했다. 홍콩의 민주화 운동가들도 민주화와 관련한 요구안을 제출하러 대륙을 방문할 때면, 입국심사장에서 곤욕을 치르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홍콩인의 반감은 격렬한 시위로 확산되고 있다. 홍콩 전역에서 정치 개혁 법안 개선과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지난 4월11일에는 2만여 명이 홍콩 중심가를 돌며 ‘민주 쟁취’ ‘둥 장관 퇴진’ 구호를 외쳤으며, 일부 과격한 군중은 중국 정부에 노골적인 적대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번 사태의 핵심은 홍콩의 ‘미니 헌법’이라 할 ‘기본법’과 관계가 깊다. 홍콩 기본법에 대한 해석 권한은 대륙의 전인대 상무위가 가지고 있다. 지난 4월8일 전인대 상무위는 홍콩의 기본법에 대해 해석권을 행사해 그 결과를 발표했다. 해석안은 홍콩 입법의회가 각종 개혁안을 심의하기 전에 전인대의 심사를 거칠 것을 의무화했다. 중앙의 허가 없이 홍콩 단독으로 개혁안을 결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재확인한 것이다. 이미 그때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 거부가 예견되었다.

결국 중국은 홍콩에 대해 통제를 선택한 것이다. 중국이 ‘직선제’ 요구를 거부한 진정한 의도는 홍콩 민주 인사들과 재야 세력의 정치 민주화 요구가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확산되는 것을 막는 데 있다. 중국은 지난해 7월 홍콩 기본법의 ‘국가 안전법’ 관련 조항을 통과시키려다 실패했다.

‘홍콩판 국가 보안법’이라고 불릴 정도로 홍콩 시민의 반발을 부른 이 법안의 통과 시도는 1989년 톈안먼 시위 이후 최대 규모 시위(약 50만 참가)로 이어졌고, 시위 이후 치러진 구 의회 선거에서는 친중국계 후보들이 줄줄이 낙선했다. 직선제 도입을 내걸었던 홍콩 민주당이 약진했던 것도 바로 이 때다. 홍콩에서는 지난 1월에도 10만 군중이 모여 직선제를 요구해 중국 당국을 불안케 했다.

홍콩의 민주화 요구에 대한 중국의 단호한 대처에는 또 다른 이유가 숨어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한 전문가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홍콩 민주화 요구가 확산되면 서방과 외교 문제가 복잡해질 수 있다고 우려해, 중국이 사전에 ‘고름을 터뜨리는 전략’을 구사한다고 주장한다. 중국 당국은 올림픽 때까지 민주화 문제를 끌고 가기보다는 미리 홍콩의 반응을 살펴보면서 대책을 마련하려는 심산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민주화 요구를 무마하기 위한 각종 특혜 정책이 이어질 것’이라며, 지난 ‘기본법 제정 파동’ 때에도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홍콩을 방문해 대륙에 수출하는 홍콩 상품에 대해 무관세 원칙 적용을 골자로 하는 협정을 체결한 예를 들었다.

타이완 문제 또한 중국이 홍콩 문제 해결을 서두르게 한 요인이다. 한 소식통에 따르면, 타이완 독립 주장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홍콩에 더 많은 자유를 보장하면 통제가 어려워질 뿐 아니라, 홍콩에서마저 독립 요구가 나올지 모른다고 우려한다는 것이다. 또 홍콩의 반발은 곧 중국의 화약고인 티베트의 독립 움직임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

타이완·티베트 독립 움직임에 쐐기 박기

홍콩 문제를 처리하는 데 영국은 중국의 눈엣가시다. 홍콩을 장기 통치해온 영국은 홍콩 민주화를 놓고 사사건건 중국에 시비를 걸어왔다. 이번에도 영국의 빌 랄멜 외무장관은 “이번 조처는 홍콩 주권을 중국에 돌려줄 때 합의한 공동 선언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라고 중국 당국을 비난했다. 중국은 리자오싱(李肇星) 외교부장을 통해 “어떠한 외국 간섭도 허용하지 않는다”라며 맞섰다. 그러나 중국은 5월 초로 예정된 원자바오 총리의 유럽 순방 때 이 문제에 대해 영국의 양해를 요청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의 이번 결정으로 홍콩의 분위기는 격앙되어 있다. 지난해 50만 민주화 시위를 주도한 홍콩의 민주 단체들은 촛불 시위 등 대규모 항의 집회를 계획하고 있다. 이미 국가안전법안 통과를 저지한 홍콩인들의 저력이 당분간 중국 정부의 골머리를 썩일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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