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물살 타는 일본 헌법 개정
  • 안해룡 (아시아프레스 인터내셔널) ()
  • 승인 2004.05.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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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당·정·언론, 헌법 개정 밀어붙여
‘제1항.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국권을 발동한 전쟁이나 무력에 의한 위혁(威口赫)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포기한다. 제2항.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 기타의 전력은 보유하지 않는다. 나라의 교전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일본 헌법을 ‘평화 헌법’이라 규정짓는 근거가 되는 일본 헌법 제9조의 내용이다. 일본 헌법은 과거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죄과에 대한 반성의 의미를 담은 전쟁 포기 선언이다. 하지만 최근 자위대를 이라크에 파병하는 법적 근거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국회를 중심으로 좀더 적극적이고 속도감 있게 헌법 개정 작업을 밀어붙이고 있다.

핵심 내용은 ‘국제 공헌과 안전 보장을 위해 자위대 유지와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명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각 정당은 중의원·참의원 합동으로 헌법조사회를 꾸려 벌써 5년째 이 문제를 검토해 왔는데, 최근 개정 쪽으로 급물살을 타고 있다.

자민당은 창당 50돌을 맞는 내년 11월 독자적인 헌법 초안을 발표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민주당·공명당도 일정을 정하고 구체적인 헌법 개정안을 마련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경제계와 민간 단체 등 정치권 바깥에서도 헌법 개정 논의가 활발하다. 반면 공산당·사민당은 ‘호헌론’을 고수하고 있다. 일본의 유력 일간지 요미우리 신분은 현재의 국면을 ‘헌법 개정 시비에 초점을 맞춘 ‘총론’ 단계에서 ‘각론’을 논의하는 단계로 돌입했다’라고 평가했다.

요미우리 신분은 지난 5월3일 전문과 11장, 106조로 된 ‘헌법 개정 2004년 시안’을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이 시안이 ‘좀더 자립한 국가로서의 이념과 기본적 가치를 명확히 하고, 국제적인 안전 보장 환경 변화에 대응하고자’ 하는 취지로 제안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근거로 ‘생명 윤리’ 조항 신설을 예로 든다.

하지만 핵심은 다른 데 있다. 개정안의 제3장 안전보장 조항에는 ‘평화와 독립을 지키며, 안전을 보장하고, 자위를 위해 군대를 보유할 수 있다’는 항목이 들어 있다. 합헌적으로 군대를 보유하고, 합법적으로 군대를 해외에 파병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 신문은 개헌 논의를 일반인 차원으로 공론화하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밝히고 있다. 또한 이 신문은 지난 3월에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일본 국민의 67%가 개헌을 찬성하고 중의원 의원 83%가 개헌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개헌 여부는 더 이상 쟁점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앞으로는 ‘개헌의 질’, 즉 내용이 논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요미우리 신분이 개헌 논의를 주도하는 이유는, 이 신문 와타나베 쓰네오 회장의 ‘색깔’과 무관하지 않다. 정치부 기자 출신인 와타나베가 경영을 맡으면서 보수주의 색채가 한층 더 짙어졌다. 요미우리 신분은 나카소네로 대표되는 자민당 내 보수파 실력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1980년대 후반부터 자민당 의견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개헌 논의의 ‘입질’을 시작했다. 이 신문은 10년 전 처음으로 개헌 시안을 입안해서 발표한 바 있다.

자민당의 한 의원은 “평화 헌법은 태평양 전쟁 종전 후, 일본을 점령했던 연합군총사령부가 ‘앗’ 하는 사이에 순식간에 만들었다”라고 주장했다. 일본 헌법은 ‘자위 전쟁 포기와 군대 비보유’라는 맥아더 노트의 두 원칙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일본의 군사 대국화 의지를 아예 싹부터 잘라내려고 한 것이다.

1946년 헌법을 심의한 요시다 총리는 “정당 방위권을 인정하면 전쟁을 유발할 소지가 있다”라며 명백하게 자위권을 부정했다. 하지만 4년 뒤인 1950년, 그는 전쟁 포기가 정당 방위권마저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며 당초 입장을 번복했다. 자위 전력이 아닌 치안 조직으로 창설된 무장 부대는 6·25 전쟁 기간 경찰예비대, 보안대를 거쳐 1954년 7월 방위청이 신설되면서 자위대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헌법 내용을 둘러싼 논쟁이 없지 않았으나, 당시 자위 능력의 필요성을 내세우는 강경파의 주장은 ‘호헌 원칙주의자’들에 의해 묵살되었다.

미국의 세계 군사 전략과 개헌론 맞물려

개헌론에 다시 불이 붙은 것은 페르시아 만 전쟁이 시작된 1991년 이후. 일본은 유엔의 평화유지활동(PKO) 협력법(1992년), 주변 사태법(1999년)을 제정하면서 이른바 ‘비전투 지역’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일본 스스로 금하는 것은 동맹 협력을 위해서는 제약’이라고 평가한 2000년 미국 국방부 <아미티지 보고서>의 지지를 받아 일본은 마침내 전투 병력의 해외 파병을 실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헌법에 대한 임의적 해석에 근거한 것이다.

현재 일본의 개헌 작업은 전방위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후루쇼 해상막료장은 지난 4월19일 도쿄 외국특파원협회 강연에서 “해상 자위대에는 장래 세계의 해군과 함께 국제 평화 협력이 주어질 때까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라면서 집단적 자위권 문제, 다른 나라 해군과 공동 훈련, 정보 공유 등을 언급했다. 현행 헌법 해석이 이를 가로막고 있다고 강한 불만을 표시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북한 핵 문제, 이라크의 일본인 인질 사건 등 최근 잇달아 터진 일련의 사건은 자위대를 ‘군대’로서 확고하게 전환해야 한다는 개헌론을 대중적으로 확산하는 구실을 했다. 최근 사임한 후쿠다 관방장관은 “우리 나라 방위를 목적으로 한다면 집단적 자위권에 문제는 없다”라고 선언했다. 한반도와 타이완의 ‘유사시’를 염두에 둔 미국의 새로운 군사 전략이 수립되었고, 1998년 미·일 양국은 미·일 방위 지침을 근거로 미·일 안전보장 공동 선언문을 발표했다. 미국의 세계 군사 전략 변화와 일본 헌법 개헌론이 맞물리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일본의 개헌 움직임에 반대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헌법 9조가 없으면 집단적 자위권은 인정될 것이다. 그러나 일본과 동맹 관계인 미국이 관계하는 전쟁에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고 참전하게 될 우려가 있다”라고 후쿠다 미즈호 사민당 당수는 말했다. 그는 오히려 일본 헌법 9조가 군사적 중립 입장에서 국제적 신뢰를 구축할 수 있는 안전 장치라고 역설했다.
하지만 일본의 개헌 논의는 이미 일정한 수준을 넘어섰다. 평화를 위해 전쟁을 포기한 일본 헌법은, 안전을 위해 군대를 합법적으로 보유해야 한다는 개헌론자들의 칼날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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