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 휩쓰는 '독립 투쟁'
  • 박재권 기자 ()
  • 승인 1996.10.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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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일랜드·바스크·코르시카 지역 분리 운동 활발
 
동티모르 20만명·스리랑카 5만명·르완다 15만명·브룬디 10만명·보스니아 28만명·체첸 4만명·카슈미르 1만2천명….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진 갖가지 분쟁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숫자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펴낸 96년 연감에 따르면, 지난 한 해에 천명 이상이 사망한 분쟁은 스물다섯 건이나 된다. 그보다 규모가 작은 충돌은 수없이 많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갔는지 파악할 방법조차 없다.

고통은 죽은 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분쟁을 피해 고향을 등지고 떠난 피난민들 역시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지난해 분쟁을 피해 국경을 넘은 피난민은 2천7백40만명이다. 여기에 자기 나라 안의 다른 지역으로 피난간 사람까지 합하면 5천만명이나 된다. 누구한테도 환영 받지 못하는 이들은 탈냉전 시대가 빚어낸 신종 ‘천덕꾸러기’이다.

민족·종교 갈등이 원인

이들이 죽음이나 피난길로 내몰리는 까닭은 대부분 분리 독립운동 때문이다. 예외가 있다면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격 정도가 있을 뿐이다. 자기가 소속된 국가를 상대해 독립 투쟁을 벌인 대가로 이들이 받는 것은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이다. 그러나 피해가 크면 클수록 독립하고 싶은 열망은 더욱 강해진다.

<96 SIPRI 연감>에 따르면, 세계에서 분쟁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지역은 아시아이고, 다음이 아프리카·중동이다. 가난한 나라일수록, 체제 전환을 겪은 나라일수록 싸움이 잦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정치적 안정을 구가하고 있는 서유럽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최근 이탈리아에서 한바탕 촌극으로 끝난 ‘파다니아 공화국’ 수립 사건도 수많은 분리주의 운동의 한 예이다(72쪽 상자 기사 참조) .

현재 서유럽에서 소수민족 분리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지역은 세 군데이다. 가장 격렬한 것은 영국을 상대로 벌이는 북아일랜드 인들의 독립 투쟁이다. 다음으로는 스페인의 바스크 지역 독립 투쟁과,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벌이는 코르시카 인들의 투쟁이다.

이들 투쟁은 민족·종교 갈등이 깊숙이 개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먼저 북아일랜드 인들의 경우를 보자. 이들은 카톨릭을 믿는 켈트족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들이 맞서 싸우는 영국인은 대부분 개신교를 믿는 앵글로 색슨 족이다. 그같은 차이점은 프랑스인과 코르시카인, 스페인 사람과 바스크인 간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민족·종교·언어의 차이는 독립을 향한 열망을 강화시킨다.

먼저 북아일랜드의 경우를 보자.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영국은 2차대전이 끝난 후 ‘해가 지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대부분의 식민지를 포기하고 49년에는 코앞에 있는 아일랜드마저 독립시켰다. 이 때문에 북아일랜드에 대해서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모두 걸어놓고 있는 상태이다. 민족으로 보나 종교로 보나 북아일랜드는 아일랜드의 일부이지만, 영국은 북아일랜드를 끝내 포기하지 않고 있다.

영국이 북아일랜드의 독립을 막기 위해 취한 가장 중요한 정책은 본토의 앵글로 색슨인들을 이주시킨 것이다. 지금은 북아일랜드 전체 인구의 60% 정도가 개신교를 믿는 앵글로 색슨족으로 채워졌다. 이제 선거를 치러도 불리할 것이 없게 된 것이다.

최근 영국이 북아일랜드의 모든 정파가 참여하는 선거를 통해 자치 정부를 구성하도록 하겠다고 밝힌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테러를 서슴지 않는 북아일랜드인들의 무장 조직 아일랜드공화군(IRA)이 먼저 무장을 해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그같은 제의는 IRA 정치 조직인 신페인당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지금 상태에서 선거를 치르면 영국계인 신교도들이 승리를 거둘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 무장 해제까지 당하면 독립 국가를 건설하려는 꿈은 영영 멀어지고, 신교도들의 주도권을 합법이라고 인정해 주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코르시카 주민 대다수는 독립 반대


현재 신페인당은 북아일랜드 카톨릭 신자의 3분의 1로부터 지지를 얻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3분의 2는 사회민주노동당(SDLP)을 지지한다. 그런데 이 당은 IRA의 폭력 노선에 반대하고 평화적인 문제 해결을 주장함으로써 IRA와는 앙숙 관계이다. IRA의 강력한 적은 개신교 쪽에도 있다. IRA에 대항하는 무장 조직으로 얼스터자원민병대(UVF)·얼스터자유전사(UFF)가 있는데, 이들이 자행하는 테러가 전체 테러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양측의 충돌로 인해 지금까지 3천5백명 정도가 사망했고, 3만명 이상이 다쳤다.

IRA는 94년 9월 일방 휴전을 선언해 신·구교도간 분쟁이 해결될지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했다. 그러나 올해 2월 다시 테러를 시작함으로써 사태는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코르시카인들의 독립 투쟁도 사정은 비슷하다. 나폴레옹의 고향이자 유배지인 코르시카 섬은 지중해에 있는 인구 25만명의 아늑한 휴양지이다. 이곳 사람들은 인종적으로도 프랑스인과 구별되고, 고유 언어도 갖고 있다. 이들은 18세기 초반에 잠시 자치를 경험했지만, 18세기 중반에 프랑스에 편입되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들의 분노가 폭발하기 시작한 것은 76년 코르시카민족해방전선이 결성되면서부터이다. 이 조직은 코르시카인들의 민족주의 단체 3개 중 가장 규모가 크다. 테러도 불사하는 이들의 과격성은 높은 경제난과 실업률, 프랑스 정부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못받는 현실 때문에 생겨났다. 이들이 벌이는 테러는 코르시카 섬에 국한되지 않고 프랑스 본토까지 확산되었다. 섬 전체가 폭력 조직의 온상으로 변하자, 프랑스 정부는 92년부터 코르시카민족해방전선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양측은 코르시카의 장래에 대해 상당한 정도의 합의에 도달했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코르시카내 소수파 민족주의 집단들이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현재 코르시카인들의 테러도 대부분 이들이 저지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에 대한 일반 주민들의 반응은 어떤가. 지난 5월 실시된 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현재 코르시카인들은 49% 정도가 민족주의 단체들의 활동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코르시카의 완전한 독립을 원하는 주민은 10%밖에 안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바스크 지역에 대한 스페인의 대응도 신중하기 그지없다. 바스크 지역은 피레네 산맥과 대서양이 만나는 아름다운 휴양지이다. 이곳 사람들은 바스크어를 사용하고, 프랑스인이나 스페인인들과 구별된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은 59년 ‘바스크 조국과 자유’(ETA)가 조직된 뒤부터다. 우익 독재자였던 프랑코 총통 시절 고유어 사용이 금지되고 엄청난 탄압이 가해지자 본격적으로 테러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75년부터 조금씩 사정이 바뀌었다. 프랑코 총통이 사망했고, 3년 뒤에는 민주 헌법이 채택되었다. 바스크 지방은 자치주가 되었고, 바스크어 사용도 자유롭게 되었다. 이에 ETA는 바스크독립당(HB)을 창당해 제도권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페인 정부의 유화 정책이 ETA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잔인한 테러에 사람들은 등을 돌렸고, 90년대 들어서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합동 작전으로 전력마저 상당히 약해졌다.

현재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스페인에서 ETA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응답자는 80%나 되고, 90% 이상의 응답자가 바스크 지역의 독립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 지역의 사정을 종합해 보면, 현재 이들의 독립 투쟁은 고비를 맞고 있다. 소속 국가의 유연한 대응이 민족주의 세력에 내분을 초래했다. 그리고 주민들의 반응도 신통치 않다. 사람들은 대부분 계속되는 테러에 진저리를 치고, 완전 독립을 실현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도 10% 정도이다. 게다가 영국·프랑스·스페인을 상대로 싸우기 때문에 국제 사회로부터 지원도 기대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들이 취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인가. 하나는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소속 국가와 협상해 자치를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2의 팔레스타인을 꿈꾸며 투쟁을 계속하는 것이다. 냉전이 끝났음에도 지구촌 곳곳에서 테러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은 바로 소수 민족들이 후자의 길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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