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폭파된 피눈물의 땅 체첸
  • 모스크바·정다원 통신원 ()
  • 승인 2004.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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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첸, 혼란과 절망 극에 달해…폭사한 대통령의 아들, 권력 승계 가능성
체첸은 피와 눈물을 먹고 사는가. 지난 5월9일 제2차 세계대전 전승 기념일,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는 온통 피와 눈물로 얼룩졌다. 폭탄 테러로 아흐마드 카디로프 체첸 대통령(52)이 피살되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한 것이다. 이번 테러로 평화의 빛이 희미하게나마 아른거리던 체첸은 다시금 수렁에 빠질 위기에 처했다.

테러 주체는 아직도 오리무중이지만, 체첸 독립을 주장하며 크렘린과 친한 카디로프 대통령 암살을 모의해온 체첸 반군(분리주의자)들의 소행일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테러 직후 드자브라일로프 체첸 부총리는 반군 지도자 마스하도프(전 대통령)와 체첸의 ‘전쟁 영웅’ 샤밀 바사예프를 테러 배후로 지목하고 “그들만이 이런 엄청난 테러를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영국 더 타임스는 ‘카디로프 대통령 피살은 지난 2월 러시아 첩보기관이 카타르로 망명한 젤림한 얀다르비예프 전 대통령을 암살한 데 대한 보복’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얀다르비예프는 1차 체첸 전쟁(1994~1996년)을 승리로 이끈 반군의 영웅이다.

카디로프 측근이 폭탄 테러 일으켰다?

폭탄 테러가 카디로프 측근의 소행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체첸 내무장관은 “원래 카디로프 대통령은 모스크바 방문 일정 때문에 기념식장에 참석할 계획이 없었다. 참석 결정이 난 것은 나중의 일이며, 이 사실은 극소수 측근만이 알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더구나 기념식장으로 사용된 디나모 경기장은 3개월 동안의 수리를 마치고 그 날 기념식을 위해 처음 문을 열었다.

러시아 두마(하원) 의원들도 카디로프 측근 또는 람잔(카디로프 대통령 아들)의 경호원과 연계된 누군가가 테러 배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알렉세이 오스트롭스키 의원은 테러가 모스크바로부터 건네진 체첸 경제 재건 자금의 사용처 논란과 관련된 것일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푸틴 행정부의 체첸 지원 예산은 체첸을 달래기 위한 ‘당근 정책’의 일환으로, 다른 지역 예산보다 훨씬 많이 책정되어 있다.

체첸의 비극은 1991년 소련 붕괴와 함께 시작되었다. 당시 소련군 장성이던 조하르 두다예프가 체첸의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독립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두 차례에 걸친 러시아군의 침공과 더불어, 반러 강경파와 친러 온건파로 쪼개진 정파간 다툼으로 유혈 사태가 그칠 날이 없었다.

피살된 카디로프 대통령의 인생 역정 역시 파란만장하다. 사고 당일까지 그는 반군 지도자 마스하도프의 암살 기도를 무려 열다섯 번이나 모면해 억세게 운이 좋은 행운아로 통해왔다. 시베리아·우즈베키스탄 등을 전전하다 1989년 조국 체첸으로 돌아온 그는 1차 체첸 전쟁에서 반 러시아 지하드(성전)의 선봉에 섰다. 하지만 2차 체첸 전쟁(1999년) 때에는 전쟁 발발과 동시에 바흐하비스트(과격 무장 투쟁파)와 결별하고 온건 노선으로 급선회했다. ‘무장 투쟁에 의한 체첸 분리·독립이 체첸 주민들의 최종 목표가 될 수 없다’는 슬로건 아래, 광범위한 자치권 확보를 대안으로 내세운 그는 크렘린과 손을 잡았고, 2000년부터 체첸 임시 정부 수반을 지내다가 지난해 10월 대선에서 승리해 대통령에 취임했다.

아흐마드 카디로프 대통령의 유고로 권력 공백 상태가 된 체첸은 현재 혼란이 가중되고, 권력을 노린 잠재 경쟁자들의 물밑 투쟁 또한 치열해지고 있다. 러시아 연방 정부도 체첸 대책을 세우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5월11일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를 예고 없이 방문해, 빠른 시일 내에 중앙 정부 관리들로 구성된 정부위원회를 체첸에 파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오는 9월9일로 예정된 대선 때까지 체첸 공화국의 대통령 직무는 세르게이 아브라모프 총리(32)가 대행한다. 아브라모프는 피살된 카디로프 대통령의 막내 아들 람잔 카디로프를 제1부총리로 임명했다. 그를 중용한 것에 크렘린의 의중이 담겨 있는 것은 물론이다.

람잔은 피살된 카디로프 대통령의 그림자로 통한다. 2000년 아버지와 함께 온건 노선으로 선회해 크렘린의 신뢰를 쌓아온 그는 대통령 경호실장 역할을 하면서 3천명으로 구성된 민병대를 조직해 반군을 소탕해 왔다. 폭탄 테러가 발생한 직후 푸틴 대통령은 람잔을 크렘린으로 불러 “귀하의 아버지는 체첸의 진정한 영웅이며, 체첸에 평화를 가져온 위대한 지도자였다”라며 위로했다.

람잔, 인기 없고 나이도 어려 앞길 험난

현재 러시아 언론들은 람잔이 아버지 카디로프의 뒤를 이어 오는 9월 대선에서 대통령 직을 승계할 것인가에 초미의 관심을 보이고 있다. ‘크렘린의 결정은 이미 정해졌다’라는 소문까지 나돈다.

하지만 람잔의 대통령 승계에는 난관이 많다. 우선 나이가 걸림돌이다. 체첸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 후보는 30세 이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람잔은 올해 27세이다. 크렘린이 꼭 그를 원한다면, 헌법부터 뜯어고쳐야 한다. 둘째, 체첸의 국민 감정이 좋지 않다. 그가 조직한 민병대가 테러 진압을 구실로 온갖 악행을 저질러 체첸 국민이 등을 돌린 것이다. 그의 경쟁자들 가운데에는 국민으로부터 신망을 받고 있는 인사들도 적지 않다. 특히 경찰 출신으로, 푸틴 대통령 보좌관인 아슬란벡 아슬라하노프의 대중적 인기는 대단하다.

테러 사태 이후 러시아 연방군과 체첸 반군 사이의 교전이 격화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체첸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한 러시아 예비 병력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러시아 보안군과 연방안전국(FSB) 산하 병력 등 7만여 명은 이미 체첸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 중이다.

체첸 분쟁을 해결하는 데 구심점 역할을 해오던 카디로프 대통령의 죽음은 체첸을 더욱 더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다. 독립은커녕 평화 정착마저 요원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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