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민 출신 인도 대통령의 인간 승리 드라마
  • 崔寧宰 기자 ()
  • 승인 1997.08.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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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민 출신 인도 대통령 나라야난의 쉼없는 도전의 삶/‘지식에 대한 갈증’이 성공 이끌어
7월25일 취임한 인도의 새 대통령 코체릴 라만 나라야난(77)은 국가 원수가 될 때까지 파란만장한 길을 걸었다. 냉혹한 신분 제도인 카스트가 아직도 존재하는 인도에서 최초로 나온 천민 출신 대통령이다. 그는 어떻게 밑바닥에서 정상까지 올라갔을까? 그를 잘 아는 이들은 지식에 대한 갈증, 미래를 향한 끊임 없는 도전, 인습에 과감히 저항하는 용기가 지금의 나라야난을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나라야난은 20년 인도 남부 케랄라의 가난한 천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라만 베이드얀은 의사였다. 나라야난은 마을에 있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우즈하부의 영국 중학교를 거친 뒤 쿠라빌란가드에 있는 영국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이 고등학교는 그의 집에서 8㎞나 떨어져 있었다. 이 길을 나라야난은 걸어서 통학했다. 그 때 나라야난이 속한 달리트 계급에게는 교육이 허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아버지가 아들 학비를 대는 것은 대단한 고통이었다. 등록금을 제때 내지 못한 탓에 그의 이름은 여러 차례 학적부에서 지워지곤 했다. 그러나 그는 교실 밖 복도에 숨어서 강의를 들으면서 결코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라야난은 고등학교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고 트라반코어 주정부로부터 장학금을 받았다. 그는 이 장학금으로 C.M.S. 단과 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장학금은 학비만을 위한 것이었다. 숙식은 자력으로 해결해야 했다. 나라야난은 도저히 숙식 비용을 충당할 수 없어서 학업을 그만두려 했다. 그러자 지역 변호사인 파니커씨가 그를 자신의 집에 묵을 수 있게끔 배려해 주었다. 덕분에 나라야난은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고, 단과 대학 졸업 시험을 최우수 성적으로 통과했다. 그는 이번에도 주정부 장학금으로 티루바난타푸람의 종합 대학에 진학했다.

옷 없어 영국 유학길 배 놓쳐

학업을 마친 뒤 그는 새로운 세계와 직업을 찾기 위해 델리로 갔다. 델리에서 나라야난은 주간지 <커머스 앤드 인더스트리> 기자로 일했다. 그는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쉴새없이 더 나은 직업을 찾았다. 그는 인도의 유력한 장학 재단인 ‘타타재단’의 도움으로 영국 ‘런던 스쿨 오브 이코노믹스’에 입학 수속을 마쳤다.

런던으로 가기 위해 나라야난이 뭄바이에 도착한 것은 기선이 떠나기 하루 전날이었다. 그런데 나라야난은 런던에 입고 갈 옷과 준비물이 없었다. 타타재단 책임자는 나라야난을 데리고 뭄바이를 뒤져 옷과 준비물을 구해 주었다. 그러나 이 바람에 나라야난은 런던으로 떠나는 기선을 놓치고 말았다. 다음 학기는 1년 뒤에나 시작되기 때문에 그는 말 그대로 뭄바이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이 기간에 그는 <더 타임스 오브 인디아> 기자로 일하면서 마하트마 간디를 인터뷰하는 행운을 잡았다.

45년 여름 마침내 나라야난은 바라던 영국 유학길을 떠났다. 그의 나이 25세 때였다. 유학 기간에 나라야난은 학업뿐만 아니라 조국 인도 문제를 토론하는 인도 유학생 모임에 적극 참가했다. 또 인도 뭄바이에서 발행되는 주간 신문 <사회복지>의 런던 통신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3년 간의 영국 유학은 그의 인생에서 일대 전환기였다. 그는 런던 스쿨 오브 이코노믹스에서 세계적인 정치학자 헤럴드 라스키를 만날 수 있었다. 나라야난은 이 학교를 졸업할 때 이학사 학위를 최고 성적으로 받았다. 라스키 교수는 나라야난이 런던을 떠나던 48년 이제 막 영국 식민 통치를 벗어난 신생 인도 공화국의 초대 총리 네루에게 추천서를 써 주었다.

나라야난은 라스키 교수의 추천서를 가지고 네루 총리를 만났다. 네루 총리는 그에게 외무부에서 일하라고 제의했다. 나라야난의 새로운 인생이 꽃피는 계기였다.
그의 첫 부임지는 미얀마의 랑군이었다. 그는 여기서 미래의 아내가 될 미얀마 처녀 틴틴을 만났다. 틴틴은 인도의 델리 대학 출신이었다. 당시 인도 정부는 외교관이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틴틴과 결혼하려면 외교관 직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네루 총리의 특별 중재와 허가 덕분에 50년 델리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나라야난은 이후 베트남·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 근무한 뒤 태국·터키·중국 대사를 역임했다. 특히 중국 부임은 15년간 단교 뒤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의 임무는 중국과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현재 인도와 중국 사이의 정치·경제·무역 관계는 거의 나라야난이 중국 대사로 있던 시절에 뚫은 것이다.

78년 12월 나라야난은 중국 대사 직을 마치고 인도로 돌아왔다. 그가 인도로 돌아오자 모라릴 데자이 총리는 그를 자와하를랄 네루 대학 부총장으로 임명했다.

80년, 인디라 간디 여사가 다시 총리가 되었다. 간디 여사는 나라야난에게 미국대사를 맡겼다. 당시 인도와 미국은 레이건 정권이 들어선 뒤 팽팽한 긴장 관계에 놓여 있었다. 나라야난은 인디라 간디 총리의 미국 방문을 주선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간디 여사는 82년에 미국을 방문했다. 이 방문은 양국 관계를 개선하는 전환점이었다.

미국대사 임기가 끝난 뒤 인도로 돌아온 나라야난은 언론인 경험을 살려 인도의 각종 신문에 정력적으로 기사를 기고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간디 여사는 보통 선거를 실시한다고 선포했다. 나라야난은 정치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국민회의당 후보로 오타팔람 지역에 출마했다. 이 지역은 국민회의당으로서는 어려운 선거구였다. 또 이곳은 나라야난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그는 압도적인 표차로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는 이곳에서 91년 총선까지 연거푸 세 번이나 당선했다. 나라야난은 라지브 간디 내각에서 여러 장관을 역임했다. 특히 그는 세계 무역 협상에서 저력을 발휘했다.

모든 정당들 고르게 지지

나라야난은 오랜 공직 경험을 갖고 있으면서도 누구보다도 겸손한 정치인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런 평판 덕분인지 그는 거의 모든 정당으로부터 고른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했다.

내각책임제인 인도에서 대통령 권한은 제한적이다.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를 해산할 수 있는 권한과 국군 통수권 정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난 5월 총선 이후 인도 정국은 어느 당도 다수당으로 떠오르지 못한 채 여러 정당이 난립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임기 5년이 보장된 대통령의 위상이 어느 시기보다도 커질 수밖에 없다. 인도의 다양한 정치 파벌들은 과거에 어떤 일도 잘 처리했던 나라야난이 대통령 직도 훌륭히 해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다.

나라야난은 대통령에 당선한 직후 기자들로부터 첫 천민 출신 대통령으로서 소감이 어떠냐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단지 대통령일 뿐이다.” 그의 대답이었다. 나라야난이 대통령이 된 것은 인도가 정치·사회 평등을 향하여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인도 독립운동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는 생전에 천민 출신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나라야난은 이 꿈을 실현시킨 최초의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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