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대화 재개 채널, 미국이 원격 조종
  • 南文熙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7.1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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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재자’ 자처하고 주도권 행사할 듯
지난 9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4자 회담 1차 본회담장. 북한측 수석 대표인 김계관이 기조 연설에서 의미 심장한 발언을 했다. “우리가 4자 회담을 수락한 것은 이를 통해 미·북한 관계 개선과 남북 대화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다”라고 한 것이다. 한국 대표들 사이에 즉각 미묘한 파장이 일어났다. 한국 대표단의 고위 인사는 “대단히 이례적인 발언이다. 북한이 앞으로 남북 대화에 응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 것이다”라고 반응했다고 한다.

물론 남북 대화 부분이 그 기조 연설의 주내용은 아니다. 이미 예상했던 대로 그는 평화 체제 구축과 관련한 북한의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즉 주한미군 철수와 미·북한 평화협정 체결을 그 방법으로 제시함으로써, 정전협정 체제 준수 및 남북 당사자 원칙을 주장한 한국측 주장과 정면으로 맞섰던 것이다. 양측의 입장이 이처럼 팽팽했기 때문에 ‘역사적’인 4자 회담 본회담은 내년 3월16일 2차 회담을 열기로 합의한 외에 별 소득 없이 끝났다.

‘속마음’은 미·북한 관계 개선

그러나 김계관의 남북 대화 발언은 긴 여운을 남길 것 같다. 이는 그의 발언이 이번 회담을 막후에서 성사시킨 미국의 최근 입장과 합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현정권과 대화하지 않겠다는 그동안의 고집을 꺾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미국의 강력한 설득을 마지 못해 받아들인 데 불과하다. 한 외교 소식통은 “미국은 대통령 선거 전에 다음 회담의 일정을 잡지 않으면, 새 정권 등장 이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논리로 북한을 설득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미국이 이번 회담을 성사시킨 것은 새 정권 이후의 대화 채널 개편까지 염두에 둔 포석으로 봐야 한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떤 방식으로 대화 채널을 개편하고자 하는가. 미국의 ‘속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참고해야 할 사실이 한 가지 있다. 11월 중순께 미국의 한 고위 인사가 도쿄에서 일본의 북한 전문가 20여 명을 대상으로 비공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이 강연회에서 그는 4자 회담과 관련한 미국의 입장을 밝혔다. 강연 요지는 다음과 같다.

‘4자 회담 제안을 주도한 것은 한국측이었다. 한·미 정상회담 유치를 위해 급조된 것이었기 때문에 실무적인 수준에서 충분한 조율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북한이 설명회를 요구한 것도 이런 사정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사후에 중국에 통보하고 협조를 요청했으나, 북한이 대만 카드를 사용해 중국에 압력을 가함으로써 초기에는 중국의 협조도 어려웠다. 북한의 한 군 장성은 지난 7월 미국 고위 외교관에게 “4자 회담 대신 남북한과 미국의 3자 회담으로 했으면 한다. 이 메시지를 한국 정부에 전해 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 정부는 대북 정책을 소프트 랜딩으로 할 것인지 하드 랜딩으로 할 것인지 확실한 밑그림도 없이, 미·중·일의 북한 접근을 차단하면서 식량으로 북한을 압박하면 북을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었다. 지난 1년 반 이상을 4자 회담에 매달렸던 한국 정부의 대북 정책은 결과적으로 실패했고, 대북 관계에서 유리한 입지 역시 상실했다.’

그는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대안을 제시했다. ‘4자 회담은 김영삼 정권의 작품이기 때문에 다음 정권이 들어서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만약 한국의 새 정권이 지혜를 발휘한다면 4자 회담 대신 남북 대화를 다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게 해서 기존 미·북한 채널과 북·일 채널 그리고 남북 채널로 대화 체제를 개편하고, 핵협상에서처럼 한·미·일 공조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의 이같은 발언에서도 드러났듯이 미국은 4자 회담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하다. 다만 이번 회담에서 내년의 2차 회담 일정을 새로 잡은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를 폐기하기보다는 활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수정했을 뿐이다. 이와 관련해 한 서방 외교 소식통은, 새 정권 들어서 남북 대화가 시작되면 4자 회담은 안보 분야에 국한한 회담으로 위상이 축소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 역시 대화 채널 개편이 필요하다고 지적하면서, 앞으로 남북 대화가 시작되면 4자 회담 및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협상까지 포함해 다차원적인 접근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 김계관이 기조 연설에서 밝힌 남북 대화 부분은 사실은 미국측 복안이고, 북한 역시 이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표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눈여겨 살펴보면 미국이 이미 남북 대화를 위한 중재 작업에 착수했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카터 전 대통령의 재방북 추진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 5일 영국을 방문 중이던 카터 씨는 <니혼게이자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을 재방북해 남북 정상 회담을 중재할 용의가 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새 정권 ‘현실 외교’ 선택해 국익 챙겨야

그렇다면 남북 대화 중재에 대한 미국의 조건은 무엇인가. 여기에는 ‘한국의 새 정권이 지혜를 발휘한다면’(미국 외교관의 도쿄 발언) 또는 ‘새 정권이 미국과 협조해 북한 문제를 풀 의사가 있다면’(서방 소식통)이라는 분명한 조건과 단서가 있다. 즉 한국의 독자적인 남북 대화 채널이라기보다는, 미국의 중재 그리고 미국과의 협조를 전제한 남북 대화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 경우 남북 대화 재개는 현재 진행 중인 미·북한 관계를 측면에서 지원하는 성격을 띠게 될 가능성이 높다.

최근 한반도 정세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이같은 미국의 자신감 회복이다. 지난 7월 워싱턴에서 열린 한반도 전략회의에서 미국 단독의 북한 일변도 정책에 대한 한국·중국 등 주변국의 반발을 의식해, 일본을 앞세우고자 했던 분위기 (<시사저널> 제414호 참조)와는 사뭇 달라진 분위기인 것이다. 외교 소식통들은 워싱턴 회의 이후 미국이 주변국에 대해 정지 작업을 벌였던 것이 주효했다고 지적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10월26일 강택민 주석의 방미를 계기로 열렸던 미·중 정상 회담이다. 당시 회담에서는 한반도 문제 역시 주요 의제 중 하나였으나 그 내용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다. 최근 입수된 정보에 의하면, 당시 미국은 중국으로부터 △기존 미·북한 관계를 인정한다 △4자 회담에 중국도 참여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반대로 미국은 중국에 대해 중국과 북한, 중국과 한국 관계는 중국의 재량에 맡긴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즉 미국이 북한에 진출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인 중국의 양해가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최근 미·북한 관계나 4자 회담 등에 대해 중국의 발언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의 경제 파탄 역시 미국이 자신감을 회복한 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동안 대북 관계에서 한국의 유일한 카드는 경제력이었다. 그러나 경제 위기로 인해 더 이상 카드가 없어졌기 때문에, 앞으로 남북 정상 회담이 이루어진다 해도, 이것이 기존 미·북한 관계를 위협할 만한 수준이 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난 7월 회의의 결론처럼 일본을 앞세우는 대신 미·북한 관계를 전면에 내세워도 되는 상황이 도래한 셈이다. 전문가들은 최근 일본 외무성 고위 관계자가 북·일 수교 협상을 내년 초 이후로 미루겠다고 발표한 이면에는 바로 미국측의 이같은 전략 변화가 깊이 개입했다고 분석한다. 오부치 게이조 일본 외무장관이 올해 안에 북·일 수교 회담 본회담을 개최하겠다고 수 차례 주장한 점에 비춰 보면, 일본의 갑작스런 입장 변화가 일본 독자적인 결정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석연치 않다는 것이다.

새 정권은 이처럼 미국의 한반도 영향력이 한층 강화된 조건에서 남북 관계에 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즉 최근의 IMF 정국과 마찬가지로 남북 관계 역시 미국의 영향력과 통제로부터 벗어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새 정권은 따라서 김영삼 정부처럼 대책 없이 자존심만 앞세우다가 국익을 상실할 것인가, 아니면 국익을 우선하는 냉철한 현실주의를 추구할 것인가 선택해야 한다. 만약 후자의 처지에 선다면, 미국의 대북 접근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고, 국익 차원에서 합치하는 부분은 과감하게 협력하고 상치하는 부분은 합리적으로 설득하는 지혜로운 자세가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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