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 도발' 긴장 넘실대는 서해
  • 李政勳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7.07.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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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 등 서해 5도 일대서 남북 해군 잦은 충돌… “분쟁 발발 가능성 가장 높은 지역”
지난 7월4일 인천항. 전날 밤 작전을 마치고 입항한 부천함(함장 서삼식 중령)에서는 웃음꽃이 피었다. 지난 5월12일 최초로 32t급 목선을 타고 우리 영해로 탈출해 온 북한판 ‘보트 피플’ 김원형(57)·안선국(47) 씨 일가족 14명이 부천함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들은 북방한계선을 넘어 백령도 서남방 10.5㎞까지 내려오는 데 성공했으나, 심한 풍랑으로 배에 구멍이 뚫려 침몰하기 직전이었다.

서삼식 함장은 두 가족에게 명예 승조원증을 수여했다. 두 가족은 생명을 구해주어 감사하다는 편지를 전달했다. 이러한 공식 행사와는 별도로 한쪽에서는 두 가족의 아이들이 수병들과 어울렸다. 아이들은 두 달 전 잠깐 본 수병들을 기억하는 듯 ‘삼촌, 삼촌’ 하면서 매달렸다. 수병들은 모자를 씌워주고 과자를 주며 이들과 어울렸다.

강화도 북쪽에서 백령도 서북방에 이르는 서해의 북방한계선 일대는 북한의 의도적인 도발로 인해 교전이 벌어질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이다. 지난 6월5일 일어난 남북 해군간 함포 교전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사건은 1주일간 계속된 신경전 끝에 터져나왔다. 지난 5월30일 북한 어선단이 연평도 서북방 북방한계선 북쪽에서 조업에 들어갔다. 북방한계선 부근에서 북한 어선단이 조업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경우여서, 해군은 경계를 강화했다. 다음날부터 이 선단은 북한 경비정과 함께 0.9㎞씩 남하하다 6월4일 북방한계선을 넘었다.

그 날 서해를 방어하는 2함대 사령부는 중대한 결심을 했다. 경고하는 의미에서 고속정 편대로 하여금 북한 선단 주변을 전속력으로 항진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고속정은 최고 속도가 40노트(시속 74㎞ 정도)여서 전력 기동할 경우 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물보라가 일어난다. 이때 크고 강한 너울이 발생하는데, 이로 인해 멀리 떨어진 배들도 마구 흔들린다. 고속정의 기동으로 강력한 너울이 일어났으나 북한 어선단은 반응이 없었다.

2함대 사령관은 “나는 적극적이다”라고 표현하리만큼 담이 큰 사람이다. 다음날 2함대 사령관은 고속정 편대에게 사이렌을 울리며 북한 선단 주변을 고속 항진하라고 지시했다. 북한 선단에는 우리 고속정(1백50t급)보다 큰 4백t급 경비정이 포함돼 있었다. 사이렌 소리에 놀란 북한 경비정은 우리 고속정의 함미 쪽을 향해 함포 3발을 발사했다. 그 즉시 고속정도 북한 경비정의 뒤쪽으로 2발을 발포했다. 사태가 급박하다고 판단했는지 북쪽에서 경비정 1척이 더 달려와 북한 어선단을 이끌고 도주했다.

지난해 5월23일에는 북한 함정 12척이 표적정을 이끌고 훈련하다가 북방한계선을 9.3㎞ 가량 넘어왔다. 당시 이 수역에는 김영섭 소령을 편대장으로 한 고속정 3척이 있었다. 그 후방에는 초계함과 호위함 등 대형 함정들이 북한 함정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월선한 후에도 북한 함정의 기동이 계속되자 김소령은 고속정 3척을 이끌고 남하하는 북한 함정들을 향해 고속 돌진했다. 북한 함정을 우현으로 6척, 좌현으로 6척씩 갈라 정중앙을 뚫는 고속 기동이었다.

북한 함정은 대개 수동으로 함포를 조작한다. 한국 고속정이 달려들자 매우 놀란 듯 북한 수병들은 갑판으로 달려나와 함포를 조작했다. 그러나 늦었다고 판단한 듯 함포를 하늘 방향으로 돌렸다. 포대를 위로 올렸다는 것은 교전할 의사가 없다는 의미이다. 이때 고속정에 탄 우리 수병이 자동 카메라로 인공기를 단 북한 함정을 촬영했다(52쪽 큰 사진). 고속정의 방해 기동으로 대오가 흐트러지자 북한 함정들은 선수를 돌려 급히 퇴각했다.
조류 빠르고 해안 복잡해 자칫하면 월선

바다는 육지와 달리 지도상의 좌표만으로 분계선을 구분한다. 서해는 7노트(시속 13㎞)의 빠른 조류가 흐르고 해안선이 복잡해 자칫하면 금방 월선한다. 더구나 북한은 유엔군사령부가 설정한 북방한계선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상자 기사 참조). 여기에 식량난으로 인한 주민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또 미·북한간 미사일 회담과 4자 예비 회담을 앞두고 미국을 압박하기 위해 북한은 의도적으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이기택 교수(연세대·정치학)는 냉전 이후의 한반도 군사 분쟁은 서해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지적한다. 이교수는 서해에서의 도발은 국지전이 될 수밖에 없고, 미국 지상군이 없는 곳이어서 미국이 자동 개입할 명분이 적으므로 북한으로서는 부담이 작은 도발 지역이라고 지적했다. 국지전 또는 저강도 분쟁이 서해에서 일어날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북한은 73년에도 이 수역에서 도발해 대미 외교용으로 끌고 나간 적이 있다. 서해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당시의 정치 상황 때문에 전모가 공개되지 않았다.

서해 사건은 73년 10월23일 스틱스 함대함 미사일을 장착한 북한의 오사급 및 코마급 소형 쾌속정이 북방한계선을 월선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같은 해 12월1일 북한은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서해 5도 수역은 북한이 관할하므로 서해 5도에 출입하는 한국 선박은 북한의 사전 임검을 받으라”고 주장해 위기감을 증폭시켰다. 이어 북한 전투기들로 하여금 백령도 상공을 가로지르게 하는 등 긴장도를 높였다. 북한의 노림수는 74년 3월 허 담이 ‘대미 평화협상안’을 최초로 제기함으로써 윤곽이 잡혔다. 북한은 서해 5도 수역 저강도 분쟁을 미끼로 미국과의 직접 접촉을 시도한 것이었다. 그후 북한은 이 전략을 그대로 유지해 지금까지 미국에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공세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은 지하 벙커에 들어가 전군을 지휘함으로써 준전시 상태임을 묵시적으로 선언했다. 75년 2월26일 또다시 북한 어선 10척이 북방한계선을 넘자 그 수역에서 작전하던 서울함(당시 함장 유광현 대령)이 돌진해 그중 1척을 들이받아 침몰시켜 버렸다. 이 사건 이후 북한의 공세는 꺾이기 시작했다. 이후 서해 5도 수역은 명실상부한 한국 해군 관할에 놓이게 되었다. 군사전략가들은 ‘서해 사건은 북한이 저강도 분쟁을 유도할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지적한다. 최고 지도자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자세로 나가야만 북한이 도발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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