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통신]DJ가 워싱턴에 온 뜻은
  • 金勝雄 특파원 ()
  • 승인 1995.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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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봄, 김대중씨가 워싱턴에 들러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연설했을 때다. 김씨와 함께 귀빈석에 앉아 있던 부인 이희호 여사는 김씨가 연설하는 동안 수시로 시계를 들여다보며 뭔가를 열심히 메모했다.

이를 궁금히 여긴 기자는 퇴장하는 척하고 그 앞을 지나며 부인의 메모를 ‘슬쩍’했다. 메모지 위에는 2, 4, 3… 같은 숫자가 적혀 있었다. 기자는 금새 상황을 파악했다. 부인은 연설 중간중간에 터지는 박수와 박수 사이의 시간을 열심히 재고 있었던 것이다.

아, 김씨가 이번 연설을 위해 예행연습을 철저히 했구나! 정해진 시간 안에 연설 분량을 다 소화하기 위해 김씨 부부는 저토록 신경을 썼구나. 그 날 김씨의 ‘최선’이 기자에게 뜨겁게 와닿았던 것을 기억한다.

중국·일본의 변화 전망

그로부터 1년이 지나 김씨가 다시 워싱턴을 찾았다. 그는 이번에도 영어 원고를 들고 연단에 섰다. 지난 5월2일, 미국 인권 단체인 ‘민주주의를 위한 전국기금’(NED) 이 주최한 제5차 총회에 연사로 초청 받아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3백여 하객 앞에 선 것이다. 일단은 민주주의를 위한 전국기금측의 총회 일정에 맞춘 일정이겠지만, 그의 워싱턴 방문 시기가 지난해와 똑같은 5월 초라는 점에서 이 때를 골라 작심하고 내디딘 미국 나들이가 아닐까 하고 지켜보게 됐다. 이번 연설은 지난해 연설의 뉴스 수준에는 훨씬 못 미쳤다.

그러나 박수 시간과 연설 속도까지 재던 그의 ‘최선’에 비추어 이번 연설에서도 뭔가 촌철살인의 대목이 있으려니 기대했으나 이렇다 할 ‘감’을 잡지는 못했다. 굳이 든다면, 최근 중국과 일본을 방문한 후 현지에서 느낀 사회 계층의 횡적 변화에 대해 오랜 정치생활을 통해 몸에 밴 김씨 특유의 ‘감’에 입각해 분석·전망한 것을 꼽을 수 있겠다.

그는 연소득 5천달러 이상인 중국 중산층의 숫자가 중국 전체 인구 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2억~3억에 이른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등소평 사후 중국 정부가 감당하기 제일 힘든 세력 집단으로 이 중산층을 적시했다. 또 일본의 경우 과거 반공 우익 세력들의 입에서조차 반미 목소리가 높아지는가 하면, 좌익 세력들로부터는 반민주적 정서가 서서히 불식돼가고 있음을 무라야마 총리와 대담한 내용을 인용해 설명했다.

이번 연설의 내용이나 방향은 한국 정부 쪽에서 보자면 지난해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터뜨린 ‘불의의 기습’과는 크게 대조를 이루었다. 그의 지난해 연설을 북한 핵과 김일성·카터까지 등장시킨 ‘한 건’에 비유한다면, 이번 연설은 아시아 지역의 사안과 변화에 주목할 줄 아는 정치인의 협기(俠氣)를 살짝 보여주는 것 같았다. 변화라면 변화다. 이번 방미를 통해 그가 뭔가 변화를 시도하고 있음을 기자는 분명히 느꼈다.

그는 연설 장소인 국회의사당 옆 하야트 리젠시 호텔에 보통 세단보다 두배나 긴 검은색 리무진을 타고 왔다. 워싱턴을 방문하는 국가 원수나 귀빈이 흔히 사용하는 디럭스 승용차다.

신양김 시대 도래 알리기 위해 외유?

김씨의 수행팀이 배포한 방미 일정표를 보면 서울과의 시차까지 정확히 계산돼 있고, 연설 시간이 01:45~02:45로 적혀 있는 등 2주간의 일정이 마치 청와대의 그것처럼 세밀하고 완벽해 놀라웠다. 연설 제목도 다양해, 전국기금에서 행한 ‘아시아 민주주의 가능성’을 비롯해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민족의 통일’‘남북·동북아 문제와 미국의 역할’‘아·태 시대의 한국’‘변화하는 동북아정세와 한반도의 장래’등 다채롭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런 연설이 행해지는 장소나 경우가 포틀랜드 주립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는 자리를 빼놓고는 왠지 절박하거나 필수불가결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니면 ‘신양김 시대’가 왔음을 널리 입증키 위한 의도적인 외유라고 볼 수도 있다.

김씨가 2주 간의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면 달포쯤 지나 김영삼 대통령이 워싱턴을 찾아 한·미 정상회담을 벌이게 된다. 한국전 참전 45주년 기념비 개막까지 곁들이는 그 행사를 위해 서울에서만 천여 명의 행사 참석객이 이곳에 온다. 국군 의장대도 1백80명이 온다.

불쑥 대서양 건너 프랑스의 결선 투표를 앞둔 자크 시라크 대통령 후보가 떠오른다. 그가 총리 시절, 미테랑 대통령과는 별도로 7개국 정상회담장에 나타나 다른 나라 대통령·총리와 자리를 함께하던 진풍경이다. 물론 우리의 이번 경우와는 무관하겠지만, 왜 그런 ‘불쑥’이 하필 지금 떠오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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