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실험 금지에 정면 도전한 프랑스
  • 朴在權 기자 ()
  • 승인 1995.06.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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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핵실험 재개 선언으로 새 국면…중국 '편승'하면 NPT체제 타격
세계인의 시선이 남태평양에 있는 한 섬으로 쏠리고 있다. 보통 지도에는 표시조차 안돼 있을 정도로 작은 남위 22도 상의 프랑스령 무루로아 환초(環礁). 산호초가 고리 모양을 이루고 있는 이 섬에서는 오는 9월부터 내년 5월까지 여덟 차례 핵실험이 실시될 예정이다.

지난 6월13일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핵실험을 재개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핵실험은 프랑스 핵 공격력의 안전성·확실성·신뢰성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로써 미·러·영·불 4개국이 합의해 92년부터 지켜온 핵실험 중지 원칙은 무너지게 되었다.

프랑스가 핵실험 재개를 선언하자 세계 각국은 즉시 유감을 표명했다. 가장 강력하게 반발한 것은 핵실험장 주위에 있는 호주와 뉴질랜드, 남태평양의 여러 섬나라이다. 이들은 여덟 차례나 되는 프랑스의 핵실험으로 인한 방사능 유출과 환경 파괴를 크게 염려하고 있다. 프랑스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강변하지만, 이들은 그같은 주장을 쉽게 납득하지 않는다. 뉴질랜드의 제임스 볼저 총리는 의회 연설에서 “유럽의 식민 강대국이 오만무례한 행동을 보이고 있다. 핵실험을 하려거든 자기 나라에서 하라”고 프랑스를 격렬히 비판했다.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은 다른 이유 때문에 프랑스의 핵실험 재개를 비난하고 있다. 프랑스의 핵실험이 자칫 중국을 자극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다른 핵보유 국가들이 핵실험 중지를 선언하고 있을 때에도 핵실험을 계속해 왔다. 그런데 국제적인 비난 여론을 분산시킬 동반자가 나타났으므로, 전보다 부담 없이 핵실험을 하지 않겠는가 걱정하는 것이다. 고노 요헤이 (河野洋平) 일본 외무장관이 에르베 드 샤레트 프랑스 외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프랑스 정부의 결정은 대다수 비핵국가들의 신의를 철저히 저버리는 행위”라고 강력히 항의한 것도 그런 배경에서다.

반면 미국·영국 등 핵보유국들은 비교적 느긋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들 역시 프랑스의 핵실험 재개에 유감을 표명하기는 했지만, 내심으로 프랑스가 내년 말까지 타결하기로 돼있는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 (CTBT)에 서명하겠다고 밝힌 점을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다.

이처럼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이 높은데도 프랑스가 핵실험을 재개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유럽의 맹주 자리를 노리는 프랑스의 야망이다. 프랑스는 1995∼2000년에 지출할 국방예산안을 마련해 놓고 있는데, 이것은 프랑스군을 유럽 최정예군으로 만든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같은 ‘프랑스 영광 재건’의 꿈은 신드골주의자 시라크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한결 수월하게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핵실험 뒤에 숨은 프랑스의 ‘유럽 패권’ 야망

핵실험을 재개할 군사적 필요성은 지난 6월6일 프랑스의 군사전문위원회가 시라크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보고서는 다음 네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핵실험을 통한 실증적인 데이터가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모의 핵실험 장치 완성 △핵무기 소형화와 은닉성 제고 △핵무기의 안전성과 완벽한 작동 △차세대 무기인 라파엘 핵전폭기 개발과 지대지 핵 미사일 최신화 등이 그것이다.

내년 말까지 핵 보유 국가들이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을 체결하도록 되어 있는 것도 프랑스의 핵실험을 부추긴 요인이다. 이 조약이 타결되고 나면 핵 보유 국가들은 핵실험 재개에 상당한 제약을 받게 된다.

이제 남은 문제는 러시아·영국·미국이 프랑스를 따라 핵실험을 재개하느냐 하는 것이다. 러시아는 외무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다른 핵보유 국가들이 핵실험을 재개하는 것을 방관만 하지 않겠다”고 말해 핵실험을 재개할 가능성을 비쳤다. 반면 영국은 핵실험을 재개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밝혔고, 미국은 아직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다. 미국은 이미 모의 핵실험 장치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핵실험을 해야 할 필요성은 거의 없지만, 국방부가 비밀리에 소규모 핵실험을 재개할 계획을 짜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일 중국과 프랑스의 뒤를 이어 러시아·영국·미국이 핵실험 재개에 동참한다면, 핵무기 동결과 감축, 나아가 핵무기 없는 세상을 기대하고 핵확산방지조약(NPT)의 무기한 연장에 합의한 1백70여 핵 비보유 국가들은 대단한 배신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핵보유 강대국들의 도덕적 정당성은 그만큼 훼손될 것이고, 덩달아 NPT 체제도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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