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자본주의 '수혈' 결단
  • 南文熙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7.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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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제 개발 계획’ 입수/원산·남포 등에 ‘보세 구역’ 건설… 경제 회생 최후 승부수
평양은 지금 폭풍 전야이다. 서울에서 바라보는 평양은 식량난과 기아의 이미지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 평양에 감돌고 있는 긴장감은 그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7월8일로 다가온 김일성 3주기 탈상. 이를 계기로 김정일 시대를 대표할 새로운 정책과 인물이 전면에 등장하는 것을 늦출 수 없다는 긴박감이 감돌고 있는 것이다. 정보 소식통들에 따르면, 지금 평양에는 새로운 정책 담당자들과 인사 개편 대상자들이 대기 상태에 돌입해 있다고 한다. 뚜껑이 열리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폭풍의 핵은 단연 신경제 정책이다. 쓰러져가는 북한 경제를 회생시킬 마지막 승부수가 어떤 방식으로 어떤 인물들에 맡겨질지가 관심의 표적이다. 이름하여 ‘신경제 개발 계획’의 일단이 최근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5월 중순께 평양을 무대로 활동하는 러시아의 한 언론이 본국 정부에 비밀 문건을 타전했다. 북한 정부의 내부 문서에 기초해 작성된 이 문건은 바로 북한 권부가 지난 몇개월 간의 논쟁을 거쳐 정리한 김정일 시대 ‘신경제 개발 계획’의 골자를 담은 것이다.

이 문건은 우여곡절 끝에 중국 정보기관에 포착되었다. 중국측은 이 문건에 대해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정보기관의 사실 확인 작업과 함께 중국 정부도 외교 경로를 통해 러시아 정부에 진위를 확인하는 등 미묘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 문건의 내용이 어떤 것이기에 중국과 러시아가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가.

기업의 법인화·소유와 경영 분리 모색

북경 체류 기간에 중국 정보기관으로부터 이 문건 내용을 입수해 최근 귀국한 외교 소식통에 의하면, 중국측은 북한 권부가 신경제 계획이라는 기치 아래 새롭게 조성하려는 ‘자유 무역 경제구’에 대해 중국 이외의 서방국가들과도 이미 깊숙이 투자 협의를 진행해 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 자유 무역 경제구는 원산과 신포 등 북한 동북 해안의 광범위한 지역에 건설될 예정인데, 북한측은 이 문건에서 이를 ‘동북 자유 무역 경제구’라고 명명했다. 이 지역의 중심 도시인 신포는 이미 경수로 도입과 함께 개방구로 전환될 것이 예견되었던 곳이고, 이 지역내 대표적 공업 도시인 원산 역시 북한 내부적으로는 개방구라고 불려 왔다. 이제 이들 지역을 연계한 광범위한 지역 개발 전략이 태동하려는 시점인 것이다.

문건 내용에 따르면, 북한은 바로 이 동북 자유 무역 경제구의 인프라 개발을 위해 중국뿐 아니라 일본 홍콩 폴란드 독일 등의 기업들과 약 20억달러 상당의 투자 협의를 은밀하게 추진해 왔다고 한다. 그동안 자신들과만 채널을 열어둔 것으로 알았던 중국으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북한이 이 지역 전체를 자유 무역 경제구로 할 것인지, 아니면 신포·함흥·원산 등 거점 도시를 점으로 연결하는 개발 방식을 택할 것인지는 현재 불분명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처럼 광범위한 지역을 자본주의 경영 기법 도입을 전제로 한 자유 무역 경제구로 새롭게 지정했고, 이미 외국 기업들과 투자 협의까지 깊숙이 진행하고 있다는 것은 현재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가 매우 크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북한 권부가 동북 자유 무역 경제구에서 시행하려는 지역 개발 전략은 한국의 마산·이리 수출자유지역과 비슷한 일종의 ‘수출가공형 보세구역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는 한 지역 전체를 경제 특구로 지정한 나진·선봉과도 차이가 있다. 보세 구역은 일단 이 구역 안에서 활동하는 국내외 수출 기업들에게는 여러 가지 면세 혜택이 주어지지만 이 구역을 벗어나면 혜택에 제한이 가해진다. 마산·이리에서 시작해 중국에서 꽃피운 보세구역형 수출 드라이브 전략이 북한에도 도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 언론이 입수한 비밀 문건 내용에는 북한이 이 자유 무역 경제구에서 시행할 새로운 경제 정책의 요체가 담겨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화폐 개혁이다. 지난 6월 초 일부 국내 언론은 북한이 6월1일부터 나진·선봉 지대에서 화폐 개혁을 단행해, 달러와 북한 원화의 교환 비율을 1 대 200으로 확정했다고 보도했다. 복잡한 화폐 체계를 달러와 북한 원화로 통일하고 교환 비율도 북한 국내 시장 환율인 1 대 200으로 현실화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개혁 조처가 이 지역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밖의 조처들 역시 6월 초 나진·선봉 지대에 적용된 개혁안과 비슷하다. 우선 보세가공 구역 안의 각 기업 및 공장은 독립채산제로 운영할 예정이다. 또 공장과 공장, 기업소와 기업소 관계도 그동안의 정부 통제에서 벗어나 자율성이 보장되었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북한 기업의 법인화 과정이 시작되었다고 해석한다. 중국이 경제 개혁 과정에서 채택한 경영청부제를 도입할 가능성도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경영청부제란 국가가 기업을 소유하되 경영은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는 제도로, 이것이 시행된다면 사회주의 북한에 자본주의의 꽃이 피어나는 획기적 조처가 될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적 경영 기법을 과감히 도입하는 것과 함께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지역 개발 전략에서도 북한이 이제 국제 관행에 눈뜨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지역의 인프라 조성 전략으로 외국 기업들에게 BOT 방식(Built Operate Transfer:외국 기업이 건설해서 일정 기간 운영하다가 양도하는 방식)을 적용하기 시작한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인프라 건설을 위해 앞에서 말한 5개국 기업들과 20억달러 투자 협의를 추진 중이라는 것이 바로 그 내용인데, 북한은 앞으로 2년 동안 인프라 시설을 닦는 데 이 돈을 사용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원산·남포 개발 위해 나진·선봉 개혁

원산 지역말고 이 문건에 언급된 또 다른 자유무역지구 후보지가 바로 남포 지역이다. 남포 역시 이번에 자유무역지구로 지정되면서 북한 서해안 개발의 중심 축으로 개발될 것으로 보인다.

원산·남포 추가 개방 문제가 떠오르게 된 것은 나진·선봉 지대의 부진과 관계가 있다. 북한은 지난해 말부터 내부적으로 나진·선봉 정책을 실패라고 규정하고 새로운 보완 방식을 추구해 왔고, 올 4월 말 그동안 나진·선봉을 담당해온 김정우로 하여금 그 일에서 손을 떼게 하면서부터 더욱 박차를 가해왔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이때부터 치열한 내부 논쟁이 벌어졌다. 이름하여 ‘보세구 논쟁’인데, 군부를 중심으로 한 신중론과 정무원을 중심으로 한 조기 실시론이 맞붙었다. 군부가 이 문제에 대해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원산과 남포 모두 군사 지역이라는 데 기인한다. 그러나 군부 역시 개방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고, 미국과의 외교 협상이 타결되고 식량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대외 발표 시기를 늦추자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실 아직까지 발표 시기를 둘러싼 두 세력의 논쟁은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부 언론이 유엔개발계획(UNDP) 자료를 인용해 보도한, 나진·선봉에 대한 11개 자본주의 경제 요소 도입 결정은 바로 이런 내부 논쟁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선봉군 원정리에 대한 자유 시장 개설과 화폐 개혁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나진·선봉 개혁 조처는 바로 원산·남포 개방에 앞선 시범 조처였던 것이다. 6월1일부터 나진·선봉 지대에 시행된 것으로 알려진 이 조처에 대해 일단 긍정적인 내부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원산·남포 지역을 보세 구역으로 확정할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다만 북한측이 이런 조처를 언제 대외에 발표할지는 여전히 알 수 없는데, 이는 탈상 이후의 북한 정치 일정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4월 중순 북한을 방문한 조총련 대표단은 평양에서, 탈상을 전후한 시기에 연형묵 전 총리와 김달현 전 부총리가 정무원 총리 및 부총리로 등장하는 등 대대적인 인사 개편이 있으리라는 정보를 입수한 바 있는데, 대표적 개방파인 두 사람이 전면에 등장하는 것과 원산·남포 추가 개방 발표가 맞물릴 가능성이 있다. 김정일 권력 승계 일정 상으로는 탈상 이후 본격화할 추대 대회 기간에 또는 그 이후에 ‘신경제 계획’을 발표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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