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에 '브래들리 주의보'
  • 워싱턴·卞昌燮 편집위원 ()
  • 승인 1999.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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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년의 농구 스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떠올라···부통령 고어에 '역전승' 노려
호감을 주는 서민적 풍모, 한때 ‘정치가 썩었다’며 대통령도 부럽지 않다는 연방 상원의원 직을 헌신짝처럼 내버린 사람, 대학 시절 NBA 농구 스타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렵다는 옥스퍼드 대학 로즈 장학금을 받고 유학한 수재. 올해 56세인 전 뉴저지 주 연방 상원의원이자, 강력한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빌 브래들리의 간단한 신상 이력서다. 그가 지금 내년 11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워싱턴 정가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지난 9월 초 공식으로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 뒤 브래들리는 특유의 친화력과 분명한 선거 공약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그가 출마 의사를 밝힐 때만 해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주요 언론들도, 일부 여론조사에서 그가 고어 부통령을 누른 것으로 나타나자 뒤늦게 취재 경쟁에 나섰다. <타임>은 10월4일자 표지에 잔잔한 미소를 띤 브래들리를 싣고 ‘고어를 누를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제목까지 달았다. 때문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따놓은 당상’이라며 승승장구하던 앨 고어 부통령은, 공화당의 조지 부시 2세 텍사스 주지사보다 오히려 같은 당 소속인 브래들리 후보를 의식하지 않으면 안될 딱한 처지에 놓였다. 자칫하다가는 내년 2월 첫 예비 선거가 실시되는 뉴햄프셔 주에서 브래들리에게 패해 대통령 후보 자리를 내주어야 할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한 것이다.

브래들리 후보가 각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고어 후보로는 도저히 부시를 누를 수 없다는 민주당 내 비관론 때문이다. 최근 <타임>과 CNN이 내놓은 ‘내일 당장 선거가 실시될 경우 누구를 찍을 것이냐’는 설문에 유권자의 53%가 부시에게 표를 던질 것이라고 답했다. 반면 고어는 41%에 그쳤다. 특히 최근 CNN과 WMUR 방송이 내년 2월 첫 예비 선거가 실시되는 뉴햄프셔 주 주민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부시 지지율이 56%로 고어(35%)를 훨씬 앞지른 것으로 밝혀지면서 ‘고어 대안론’이 민주당 내에서도 조심스레 떠오르기 시작했다.브래들리 인기는 클리턴 성추문 덕

브래들리 후보가 지난 9월 고향인 미주리 주 클리스털 시에서 밝힌 대통령 출마의 변은, 한마디로 미국민에게 잃어버린 ‘미국인의 꿈’을 되찾아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미국 어린이 5명 가운데 1명이 빈곤으로 고통받고 있고, 무려 4천5백만 명이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미국의 꿈은 운 좋은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실현 가능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특히 그는 클린턴 대통령의 성추문을 겨냥한 듯 “우리는 새로운 지도력이 필요하다. 내가 출마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공직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데 있다”라고 선언했다. 이 말에 이목을 끌 만한 매력적인 요소는 없었지만, 장밋빛 선거 공약으로 유권자들을 혼란시키고 있는 고어 부통령의 말보다는 명쾌하고 현실적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그렇다면 정계를 은퇴했던 브래들리 전 상원의원이 대통령 후보로 정계에 컴백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그가 맨 처음 대통령 직에 도전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지난해 9월이다. 조심스레 정계 복귀를 노리던 그가 이름난 선거 참모 2명을 고용한 것이 언론에 포착된 것이다. 측근들에 따르면, 그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한 데는 개인적인 동인이 크게 작용했다. 우선 가장 중요한 요인은 유방암에 걸려 고생하던 부인 어니스틴 여사의 완전 회복이다. 여기에 18년간 상원의원 생활을 하면서 쌓은 외교 지식과, 의원 직을 그만둔 뒤로 각종 강연회에 나가 스포츠의 미덕인 용기와 지도력을 강조하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얻은 두터운 신망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로 하여금 출마 결심을 굳히게 한 요인은 지난해 발생한 클린턴 대통령의 성추문 사건과 앨 고어 부통령의 무기력한 국정 수행이다. 성추문은 클린턴 자신은 물론 고어 부통령의 인기 하락을 부추겼고, 내년 대통령 선거 때까지 이 악재가 끈질기게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실제로 <워싱턴 포스트>와 ABC 방송이 얼마전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조사 대상 1천5백26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53%가 클린턴 대통령에 대해 ‘아주 싫증난다’고 응답했다. 또 고어가 올해 초부터 의식적으로 클린턴과 거리를 두는 언행을 보여왔지만, 유권자들은 클린턴 대통령과 고어 부통령을 ‘한짝’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브래들리의 현재 인기는 ‘클린턴 기피증’에 걸린 유권자들이 고어를 멀리한 데 따른 반사 이익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브래들리의 신상 명세서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인기를 모으는 비결이 반드시 반사 이익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농구팬이라면 누구나 다 기억하는 왕년의 농구 스타였다. 프린스턴 대학 시절 전국 최고의 대학 농구 선수로 이름을 떨쳤던 그는, 졸업 뒤 한때 로즈 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 대학에 유학하기도 했다. 귀국해서 그는 프로 농구팀인 뉴욕 닉스에 당시 최고 계약금인 50만 달러를 받고 스카우트되었다. 64년에는 미국 올림픽 농구 대표 선수로 참가해 미국팀이 금메달을 따는 데 수훈 갑을 세웠다. 또 보기 드물게 최고선수상을 두 번 받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 어찌 보면 그가 78년 뉴저지 주에서 연방 상원의원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인기 덕분이었는지 모른다.민주당 내 반대 등 넘어야 할 산 첩첩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 가운데 하나가 프로 농구이다. 왕년의 스타인 브래들리는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우선 각종 선거 자금 모금 행사에 그와 함께 코트를 누볐던 제리 웨스트·존 헤블리체크·윌리스 리드·줄리어스 어빙 등 왕년의 스타 선수들이 총출동해 자원봉사자로 뛰고 있다. 그의 후원자 가운데는 최근 모금 행사에서 2천 달러를 기부한 마이클 조던도 끼어 있다. 그 덕에 브래들리는 지난 7~9월 석달 동안 6백70만 달러를 모금해, 6백50만 달러를 모금한 고어 진영을 앞질러 세상을 놀라게 했다.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가 선거 자금인 점을 고려할 때, 이같은 우세는 고어측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도 남았을 법하다. 물론 전체 선거 자금 모금액은 고어측이 1천8백만 달러로 브래들리측보다 6백만 달러가 더 많다.

그렇다면 결국 민주당 대선 후보로 브래들리가 선택될까. 현단계에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직 시기 상조이다. 브래들리 후보가 넘어야 할 산이 많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고어에 비해 일부 여론조사에서 앞서고 있지만, 아직 전국적인 지명도(고어 69%, 브래들리 24%)에서는 크게 뒤지고 있다. 거기에다 클린턴 대통령을 비롯한 대다수 민주당 지도부와 일반 당원들이 고어를 밀고 있다. 특히 96년 정계를 은퇴하며 그가 내뱉은 ‘정치판이 썩었다’는 말이 실은 민주당을 향한 직격탄이었음이 뒤늦게 밝혀져 민주당 지도부의 미움을 사고 있다. 게다가 브래들리의 주된 지지층은 민주당원 가운데서도 클린턴에 대한 혐오감이 분명한 유권자들과 어느 정파에도 속하지 않은 유권자들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근 <보스턴 글로브>가 실시한 선호도 조사에 따르면, 무소속 유권자 가운데 51%가 브래들리를 지지한 반면 고어는 31% 지지를 얻는 데 그쳤다. 게다가 브래들리가 주공략층으로 삼고 있는 흑인 유권자도 아직은 브래들리(15%)보다 고어(85%) 편이다. 지금부터 블래들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선거 공약을 유권자들이 어떻게 심판해 주느냐 하는 점이다. 지금까지 그는 빈부와 인종, 나
아가 민권 문제에 관해 고어 후보 못지 않게 민주당 가치들을 대변해 왔다는 평을 듣고 있다. 특히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무엇보다 흑백 갈등을 해소하는 데 역점을 두겠다고 밝혀 관심을 끌기도 했다. 그 때문에 <뉴욕 타임스>의 사회 문제 칼럼니스트인 봅 허버트는 “그가 마틴 루터 킹은 아니지만, 대통령 후보로서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인종 문제에 대해 견해를 밝힌 것은 드문 일이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또 현재 미국인들의 최대 관심사인 의료보장 개혁 문제와 관련해 그는,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4천5백만 명 모두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파격적인 제안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기도 했다. 과연 브래들리 후보가 현직 부통령이라는 프리미엄을 한껏 누리고 있는 고어 후보를 누를 수 있을지 좀더 두고볼 일이지만, 현재의 상황은 일단 그의 대선 가도에 청신호가 켜졌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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