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통신/곪은 역사의식이 일본 경제 좀먹는다
  • 蔡明錫 편집위원 ()
  • 승인 1995.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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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유엔 창립 50주년 기념 특별 총회를 주관하고 있는 부트로스 갈리 유엔 사무총장은 둘도 없는 친일파 총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중학생 시절 일본제국이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격파하고 러일전쟁에서 대승했다는 역사를 배우고 일본에 한없는 동경을 품어왔다고 한다.

그의 조국 이집트 같은 제3세계 국가도 일본처럼 노력하면 서구 제국주의 세력을 배척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그는 도쿄를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일본의 PKO(평화유지활동) 참가,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독려해 왔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제국이 곧바로 조선에 대해 을사조약을 강요하고 한반도를 식민지 상태로 강점한 역사적 사실도 그가 배웠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조국 이집트가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에 시달릴 때 한반도 역시 일본 제국주의에 유린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러한 경우는 일본의 과거 역사를 잘 모르기 때문에 외국인들이 일본에 막연한 동경심을 갖는 예다.

일본이 패전의 잿더미 위에서 일어나 경제 대국으로 떠오름에 따라 얻게 된 프리미엄이 한둘이 아니다. 아파르트 헤이트(인종차별 정책)가 극심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일이다. 패전 직후 이곳에 진출한 일본의 상사원들은 처음에 인도인들과 똑같은 처우를 받았다. 얼굴이 누렇다는 이유에서다.

“관료들이 입력한 정책의 관성으로 움직이는 나라”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지위는 ‘인도인급’에서 ‘준 백인급’ ‘명예 백인급’으로 격상되었다. 일본의 경제력을 남아연방의 백인들이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70년대 말 하버드 대학의 에즈라 F. 보겔 교수는 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경제·재계·관계가 삼위일체로 조직화된 일본주식회사가 머지 않아 미국을 앞지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 책이 나온 후 일본인들의 기대치는 한없이 부풀어올랐다. 실제로 80년대의 일본 경제는 미국을 앞설 기세로 성장해 갔다. 이에 따라 일본 경제뿐 아니라 일본 자체에 대한 기대치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러나 장기화하고 있는 경기 침체, 한신대지진, 지하철 사린 사건 등으로 일본에 대한 기대치는 신칸센보다 더 빠르게 퇴색되어 가는 중이다. 한신대지진이 일어나기 두 달 전에 나온 저서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 일본이라는 시스템>을 보자. 저자 칼 반 월프렌은 일본에서 30년 산 경험을 토대로 6년 전에도 <일본, 권력구조의 수수께끼>라는 책을 집필한 언론인이다.

그는 이 책에서 일본을 ‘자동 항법장치로 비행하는 항공기’에 비유했다. 관료들이 입력한 정책을 토대로 관성으로 움직이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라는 얘기다. 따라서 관료들이 입력 내용을 변경하면 비행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이 그의 주장인데, 두 달 후 한신대지진 때 일본 정부의 우왕좌왕을 그는 이 책에서 정확히 예견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근 일본 국내의 금융 불안은 일본에 대한 기대치를 사정없이 깎아내리고 있다. 올들어 일본에서는 안전·협화·코스모·기쓰 신용금고가 도산한 테 이어 제일 큰 지방 은행인 효고은행까지 도산하는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

또 12개 시중 은행 중 열한 번째로 많은 예금액을 갖고 있는 다이와은행에서는 미국 채권 거래 실패로 1천1백억엔이나 손실을 낸 것으로 밝혀졌다.

그뿐 아니다. 거품경제 시절 부동산 거래에 마구잡이식 융자를 한 주택 전문 금융 회사들이 안고 있는 6조엔에 달하는 회수 불량 채권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도 큰 문제다. 또 12개 시중 은행이 안고 있는 불량 채권 40조엔 처리 문제도 큰 두통거리다.

이에 따라 일본 금융기관들에 대한 국제 신용도가 형편없이 낮아져 지금 국제 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자기 은행 명의로 빌릴 수 있는 은행이 네댓 군데에 불과하다고 한다. 또 일본 은행들이 국제 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때 추가로 붙게 되는 이자율, 즉 ‘저팬 프리미엄’(이 경우 프리미엄은 기대치가 아니라 위험도이다)이 0.5~1%로 확대되고 있다고 한다.

한일합병조약 강요, 한반도 분단에 대한 책임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는 ‘무책이 상책’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같은 역사 마찰이 되풀이될 때마다 세계가 일본을 경계하는 ‘정치적 저팬 프리미엄’의 수위가 올라가고 있음을 그들은 직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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