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춘투, 봄날은 갔다?
  • 도쿄·蔡明錫 편집위원 ()
  • 승인 2000.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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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 연장이 ‘발등의 불’, 임금 인상은 뒷전… 노조비 원천 징수 제도까지 폐지될 위기
‘쥰토(春鬪)’ 즉 봄철 임금 인상 투쟁기를 맞이한 일본의 노동계가 내우 외환에 직면해 있다. 쥰토의 방향을 좌우하는 자동차·전기·조선 중기·철강 등 금속 4대 업종의 임금 인상 교섭에서 최근 경영자측은 지난해 수준을 밑도는 금액을 제시했다. 경기 전망이 매우 불투명하다는 이유에서이다.

경영자측은 지난해에도 경기 악화를 이유로 사상 최저 인상률인 2.21%를 제시했는데, 올해에도 최소 인상률을 제시함으로써 지난해 인상률을 또다시 밑돌게 될 것이 확실해졌다.

임금 인상률, 지난해 수준보다 낮아질 전망

쥰토는 1956년부터 시작된 일본 특유의 임금 결정 방식이다. 각 산업의 노동조합이 봄철에 일제히 임금 인상 희망액을 제시하고 경영자측이 이에 대한 회답을 제출해 노사 간에 합의를 도출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쥰토의 계절이 되면 일본에서는 격렬한 시위나 운수 관련 노동자들의 파업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나 마흔다섯 차례를 맞이한 올해의 쥰토 분위기는 크게 달라졌다. 전기연합의 스즈키 가쓰도시(鈴木勝利) 위원장은 ‘임금 인상에 집착하는 쥰토는 올해로 마지막’이라고 선언했다. 동일 업계에서도 기업에 따라 업적이 크게 차이가 나기 때문에 업종 별로 동일한 임금 인상률을 요구해온 종래 방식에 한계가 있다는 인식에서이다.

실제로 일본의 각 노동조합은 올해 쥰토에서 임금 인상보다 ‘고용 연장’ 요구에 더 큰 비중을 두고 경영자측과 교섭해 왔다. 연금법 개정에 따라 정년 후의 연금 수령 시기가 크게 늦추어지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노조측이 염려한 대로 일본 국회는 지난 3월21일 자민당·자유당·공명당의 찬성으로 연금제도개혁법을 통과시켰다. 개혁법의 골자는 월급에 따라 지급액이 변하는 후생 연금의 지급 수준을 5% 삭감하며, 연금 지급 개시 연령을 단계적으로 60세에서 65세로 끌어올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일본 기업의 정년은 60세이다. 말이 60세이지 불황의 여파로 60세 정년까지 근무할 수 있는 직장은 그리 흔치 않다. 이런 판국에 연금 지급 개시 연령이 60세에서 65세로 변경되면 정년을 채우고 퇴직한 근로자들은 정년후 5년간 생계가 막막해진다.

그래서 일본의 노동조합들은 올해 쥰토에서는 임금 인상보다 고용 연장 투쟁을 중시하는 전술을 택했다. 그 결과 전기업계 대기업 17개 회사는 내년부터 고용 연장 제도를 도입하기로 노사 간에 합의했다. 미쓰비시 중공업 등과 같은 조선 중기 기업도 2003년부터 고용 연장 제도를 도입하기로 합의했으며, 신닛데쓰나 쓰미토모 금속공업 등 철강업계는 고용 연장 제도를 도입하기 위해 노사가 교섭하기로 합의했다.

고용 연장 제도의 내용은 물론 기업에 따라 다르다. 후지전기와 같이 정년 자체를 60세에서 65세로 연장하는 특이한 경우지만, 60세가 되면 일단 정년 퇴직을 시킨 다음 다시 고용하는 제도를 도입하는 기업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재고용 제도가 도입된다고 해도 근로자가 정년 전 직장의 같은 직종에 다시 근무할 수 있을지, 계열 회사의 다른 직종에 배치될 것인지 하는 걱정이 따른다.

정년 연장에 따른 부작용도 있다. 신규 채용자가 줄어들게 된다는 문제점이다. 철강업계의 선두 주자인 신닛데쓰의 경우, 앞으로 5년간 정년 퇴직자가 매년 2천6백명씩 발생한다. 그 중 약 절반만 고용 연장을 희망한다 하더라도 1천3백명의 재고용 경비를 감안한다면 신규 채용은 엄두도 못내게 된다는 것이 신닛데쓰 관계자의 말이다.

일본 노동계가 직면한 긴급한 과제가 ‘고용 연장’이라면, 자민당이 추진하고 있는 ‘체크 오프(chek off:노동조합비 원천 징수) 제도 폐지’ 움직임은 발등에 떨어진 불씨이다.

자민당 개혁본부는 지난해 10월 기업·단체 헌금에 관한 개혁안을 마련하면서 ‘노동조합비에 대한 체크 오프 제도는 정치 자금의 흐름을 불투명하게 한다는 지적이 있어 개혁을 검토해야 한다’며 노동조합비를 원천 징수하고 있는 현재의 제도를 개혁하겠다는 의지를 처음 밝혔다. 최근에 열린 자민당 임원연락회에서는 ‘노동 귀족들이 정당을 지배하고 오부치 내각을 타도하려 하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일본 최대의 노동조합인 ‘렌고(連合)’는 지난해 가을에 열린 임시 국회에 연금제도개혁법안이 제출되자 야당에 압력을 넣어 법안 심의를 연기시켰다. 렌고의 의사대로 심의가 연기된 것은 물론 렌고를 최대 지지 기반으로 삼고 있는 민주당이 적극 움직여준 덕택이다.

자민당은 이같은 사태가 벌어지자 위기감을 느끼고 체크 오프 제도 폐지를 검토하기로 정식 결정한 것이다. 렌고를 압박하면 가을께 치러질 중의원 총선거에서 유리하다는 정략적인 계산에서이다. 체크 오프 제도는 노동기준법에 따라 본래는 현금으로 전액 지불되는 임금 중 복리후생비·사내 예금·노조비 등을 노사협정에 근거해 원천 징수하는 제도로 현재 90%가 넘는 노조가 이 제도를 이용해 노조비를 징수하고 있다.

“노조 탄압 중지하라”… 체크 오프 폐지에 반발

만약 자민당이 노동기준법을 개정해 체크 오프 제도를 폐지하게 되면 8백만 조합원을 옹호하고 있는 일본 최대 노동조합 렌고가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된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이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의 노동조합들은 조합원이 감소해 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낮아지고 있는 원인으로 전문가들은 노동조합이 없는 기업이 증가하고 있고 화이트칼라 노동자가 늘고 있다는 점을 든다. 이런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조합비를 조합원이 각자 현금으로 지급해야 한다면 조합비 납부율도 현저히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자민당의 움직임에 대해 렌고측은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이라고 크게 반발하면서 제도 폐지를 단호하게 반대한다는 입장을 재삼 천명했다. 렌고측은 또 만약 조합비 원천 징수 제도를 폐지한다면 월급에서 원천 징수하고 있는 세금·보험·복리후생비도 직접 징수해야 형평에 맞는다는 논리를 펼치며 민주당을 비롯한 각 야당에 반대 투쟁 동참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자민당의 움직임을 ‘선거를 앞둔 당리 당략’이라고 공격하면서 지지 기반인 렌고를 전면 지원할 태세이다. 연립 여당인 자유당과 공명당도 선거를 의식해 제도 폐지에는 신중한 입장이다. 체크 오프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자민당의 압력은 노동조합이 정치에 너무 깊숙히 개입한 업보라면 업보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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