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테러 지원국 명단에 북한 잔류시켜
  • 卞昌燮 기자 ()
  • 승인 1996.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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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 지원국 명단에 북한 잔류시켜…북측과의 협상 무기로 활용 속셈
미국은 올해도 북한을 테러 지정국 명단에 남겨두었다. 미국이 내세운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북한이 70년 일본 민항기를 납치한 공산계 적군파 요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정부가 테러국 명단을 발표한 4월30일 로이터 통신은 미국 국무부의 반테러 담당관 피터 윌콕스의 말을 인용해 ‘북한이 70년대와 80년대 국제 테러를 자행한 중대한 기록을 갖고 있다. 북한이 테러국에서 제외되려면 테러를 포기하겠다는 의지를 말과 행동으로 보여야 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국방부·의회, 국무부의 온건 노선 잠재워

근래 미·북한 관계가 전례 없이 화해 무드를 타고 있는데도 미국 정부가 북한을 예전처럼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빼지 않기로 한 것은, 어느 정도 예상은 되었지만 ‘이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실제로 국내 한 중앙 일간지는 얼마 전 북한이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빠질 가능성이 크다는 기사를 속단해서 워싱턴발로 내보내기도 했고, 미국의 유력지 <저널 오브 커머스>도 지난 2월에 비슷한 기사를 타전해 국내외로부터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따라서 막상 미국 국무부가 4월30일 발표한 테러 지원국 명단에 북한이 그대로 잔류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 배경을 놓고 무성한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서울의 한 정통한 외교 소식통은 이름 밝히지 않는 것을 전제로 “국무부가 이번에 북한을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빼자는 의견을 강하게 제기했지만 국방부와 의회가 끝까지 반대해 좌절됐다”라고 전했다.

실제로 국무부 관리들은 지난해 1월 평양-워싱턴간 직통 전화 개설 등 1차 제재 완화 조처 이후 추가로 대북 제재 완화 조처가 이뤄지지 않는 데 불만을 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때문에 일부 관리는 북한내 온건파의 입지를 넓혀주기 위해서라도 눈에 보이는 완화 조처가 필요하다고 끈질기게 설득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북한 정책에 관한 한 전통적으로 국무부에 비해 강경·보수 기류가 강한 국방부와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가 국무부의 온건 노선에 제동을 건 것으로 보인다.

외교 소식통들은 미국이 북한을 계속 테러 지원국 명단에 잔류시킨 데는 나름의 정치적 속셈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북한을 테러 지원국 명단에 남겨둠으로써 앞으로 북한과의 협상에서 이를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단 테러 지원국으로 분류되면 공법 480호(PLA 480)에 따라 모든 경제 지원이 금지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은행 등 미국이 참여하는 국제 금융기관으로부터 상업 차관을 빌려 쓸 수도 없다. 과거 미국 정부가 쌀 지원 등과 같은 화해 조처를 취하려고 할 때마다 이를 가로막는 최대 법적·제도적 장애물로 든 것이 바로 테러 지원국이라는 낙인이었다.

물론 북한이 완전한 의미의 경제 제재 조처에서 풀려나려면 냉전 시절의 유산인‘적성국 교역법(Trading with Enemy Act)’에 따른 적성국 분류 기준에서도 제외되어야 하지만, 그에 앞서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빠져야 한다는 것이 외교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미국은 제네바 핵협상이 성공적으로 타결된 얼마 후 북한산 마그네사이트의 미국 수출을 허용한 바 있다. 대단히 상징적인 경제 제재 완화였다. 그러나 북한이 미국으로부터 경제 제재에 대한 전면적인 해제 조처를 받기 위해서는 1차적으로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빠져야 한다. 바로 이런 현실적 이유 때문에 최근 북한 대외경제위원회 김정우 부위원장이 워싱턴을 방문해 국무부 고위 관리를 만나 이 문제를 집중 논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국은 현재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관련한 4자 회담을 포함해 미사일 회담 및 미군 유해 반환 회담 등 여러 가지 대북 협상 채널을 열어놓고 있다. 지금까지 북한은 벼랑끝 외교 전략을 구사해 미국과 45억달러에 이르는 경수로 협상을 타결하는 등 굵직굵직한 외교 성과를 얻었다. 말하자면 북한이 핵 카드를 무기로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다면 미국은 앞으로 ‘테러국 카드’를 외교 무기로 활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다.

미국 정부가 발표한 대로라면 북한은 87년 대한항공기 폭파 테러 이후 올해까지 별다른 테러 활동에 가담하지 않았다. 북한은 또한 지난 2월29일 일체의 테러 행위를 중단하겠다는 이례적인 공한을 미국 국무부에 보냈다. 관례적으로 테러 지원국에서 해제되려면, 해당국은 최근 6개월 동안 테러 활동에 가담한 전력이 없어야 하며, 추후 테러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보장이 있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원칙은 미국 정부가 해마다 테러 지원국 명단을 발표할 때 천명해온 것이다. 얼핏 보면 북한은 이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켰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빠질 법도 하다.

북한 태도 따라 언제든지 테러국서 제외 가능

그런데도 미국은 적군파 요원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북한을 테러 지원국 명단에 남겼다. 나아가 북한이 테러 행위에서 손을 뗐다는 사실을 완전히 입증하기 위해서는 테러 포기에 관한 도쿄 협약에 가입해야 하며, 여기에 덧붙여 이라크·리비아와 공동으로 테러 포기 확약서에 서명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외교 전문가들은 미국이 내놓은 이러한 추가 조건이 명목상의 조건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한 외교 전문가는, 북한이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빠지는 문제는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고도의 정치적 판단에 속하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그것을 판단하는 시기도 미·북한 관계가 진전하는 시점과 맞물릴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실제로 특정 국을 테러 지원국에서 제외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번거롭게 의회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도 간단히 대통령의 행정 명령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 미·북한 연락사무소가 개설되고 북한이 4자 회담과 관련해 추가로 성의 있는 조처를 취할 경우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언제든지 행정 명령으로 북한을 테러 지원국에서 제외시킬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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