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타이 노숙자’ 부대 도쿄 중심부 점령
  • 도쿄·蔡明錫 편집위원 ()
  • 승인 1998.09.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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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직장 잃은 회사원 급증…완전 실업자 3백만 육박
“직장 상사가 저승 사자로 보인다”

어느날 갑자기 넥타이 노숙자로 변신하거나 자살을 결행할 용기는 없지만 ‘직장 상사가 저승 사자’로 보인다는 자살 예비군도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아사히 신분(朝日新聞>)>이 소개한 사례를 들어 보자.

도쿄 증권시장 1부 상장 기업에 근무하던 40대 관리직 남성은 평소 ‘회사가 내 집’이라고 생각하는 맹렬 사원이었다. 그러다가 거품 경제가 붕괴해 회사 경영 상황이 악화하자 그는 그 원인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회사에서는 ‘리스트라’가 화제가 되고, 상사는 매일 불호령을 내렸다. 그는 자연히 자기가 죽으면 상사에게 크게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상사가 어느새 저승 사자로 보이게 되었다. 결국 그는 정신 병원 신세를 졌다.

실업자가 갑자기 늘다 보니 실업 수당 기금도 펑크 직전이다. 일본은 실업자 대책으로 47년 실업보험법(75년에 고용보험법으로 개칭)을 제정해 실업 수당을 지급해 왔다.

실업 수당은 퇴직 전 봉급의 60~80%를 90~3백일 간 지급한다. 그러나 완전 실업률이 4%를 뛰어넘자 실업 수당 수급자가 백만명을 돌파하게 되었다. 이는 76년 이후 22년 만의 일이다. 이에 따라 실업 수당 기금도 올해 7천억 엔 적자가 예상된다고 한다. 지난해 지급액 3천억 엔의 두 배가 넘는 금액이다.

다이와 종합연구소의 예측에 따르면, 일본의 실업률은 내년이면 5.3%로 껑충 뛰어오른다. 대량 실업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도 실업 수당 기금이 고갈될 운명에 처해 있다.
일본에서도 실업자 대책이 커다란 사회 문제로 등장했다. 완전 실업자가 3백만명에 육박하고 있는 것이다.

32℃를 오르내리는 8월의 무더운 대낮. 도쿄 중심부의 신주쿠 주오(中央) 공원 벤치 이곳저곳에서 신사복 차림의 중년 사내들이 쉬고 있었다. 마침 시간이 점심 때여서 근처 직장인들이 무더위를 식히고 있나 싶었다. 그런데 신사복 차림의 몇몇 사람은 한결같이 커다란 종이 꾸러미를 안고 있었다. 그들 옆으로 살그머니 다가가 보니 악취가 코를 찔렀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카락은 직장인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들이 바로 요즘 일본 언론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넥타이 노숙자’ 내지는 ‘신사복 홈리스’들이었다. 일본의 언론 보도에 따르면 넥타이 노숙자는 신주쿠 근처에서만 2백여 명을 돌파했고, 날마다 수가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이전 신주쿠 도청 앞 지하도에서 마분지 상자로 움막을 짓고 살던 이른바 ‘홈리스’들과는 약간 다르다. 올해 초 움막집에서 일어난 화재 사건으로 6명이 사망한 뒤 지금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1천5백명에 달하는 신주쿠 근방 홈리스들은 품팔이 노동자·부랑자 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연초부터 신주쿠 주오 공원 근처에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한 넥타이 노숙자들은 한때 버젓한 회사에 근무했던 전직 직장인들이다. 시사 주간지 <아에라> 보도에 따르면, 신주쿠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한 노숙자(56)는 정수기 판매 회사의 영업 사원이었다. 상사에게 말대꾸한 것이 화근이 되어 해고된 뒤 여러 직장을 전전했으나, 정착하지 못하고 노숙자 길로 접어들었다.

노숙자들을 물심 양면으로 돕고 있는 ‘노숙자 인권 자료 센터’가 5월 초순에 신주쿠 역과 우에노 공원 등 열네 곳에서 노숙자 약 1백50명을 면접 조사한 결과, 노숙 생활을 하기 전의 주요한 직업은 단순 건설 노동자가 28%로 가장 많았다. 사무원·전문 기술자·공무원·사업자도 약 20%에 이르렀다. 또 다른 조사에 의하면, 신주쿠 근처 노숙자들도 사무원이 약 8%, 판매 종사자가 약 2.5%, 사업자와 경영자 그리고 관리직 출신자가 5%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홈리스와 노숙자는 게으르고 자립심이 없는 품팔이 노동꾼이라는 상식을 뒤엎는 조사 결과들이다.

신주쿠 구청은 이런 노숙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아침마다 컵 라면을 무료로 지원해 왔다(주변 주민의 반대로 8월부터는 건빵을 지급하고 있다). 일본의 시민·종교 단체들도 노숙자가 많이 모이는 곳에서 무료 급식을 실시하고 있다.

신주쿠 주오 공원에서도 평일에 밥과 국을 제공하고 있는데, 하루 평균 4백명이 모여든다고 한다. 여기서도 신사복 차림에 커다란 종이 꾸러미를 들고 있는 사람이 많이 눈에 띈다. 종이 꾸러미에는 갈아입을 의복과 비누·치약과 같은 일용품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중·장년층 자살 급증…78년 이후 최악

일본 언론들에 따르면, 공원이나 길거리를 배회하는 사람 중 신사복을 버젓이 차려 입었어도 커다란 가방을 들고 있는 사람, 머리카락이 와이셔츠를 덮을 만큼 자란 사람, 눈길이 왔다갔다 하는 사람(정신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에)이라면 어김없이 노숙자로 보면 된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왜 이같은 넥타이 차림 노숙자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가. 일본 총무청이 최근 발표한 노동력 조사에 따르면, 6월의 완전 실업률이 4.3%를 보였다. 이같은 실업률은 조사를 시작한 53년 이후 최악의 숫자인데, 4%대를 돌파한 5월에 비해 다시 0.2% 포인트가 늘어난 숫자이다. 이런 추세로 가다가는 미국의 완전 실업률(6월 4.5%)을 앞서는 것도 시간 문제이다.

특히 기업 도산이나 정리 해고 등에 의한 비자발적 실업자가 90만명에 달한다는 점이 사태의 심각성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런 고실업률 시대에는 40~50대 직장인과 여성이 가장 큰 피해를 본다.

기자는 일본의 실업 사태를 알아보기 위해 8월 초순 도쿄 근교 중소 도시 가와고에의 공공직업안정소를 찾아갔다. 가와고에는 인구 약 35만인 전원 도시이다. 주변에 혼다 자동차 같은 대규모 공장도 여러 개 있으나, 주로 중소기업이 밀집한 곳이다. 공공직업안정소에 들어가니 70여 명이 좁은 방을 꽉 채우고 있었다. 특히 신사복 차림 중년 세대가 많았다.

여기에서 만난 이토라는 50대 후반 남성은 30년 동안 다니던 의류 회사에서 2년 전 정리 해고되었다. 그는 자격증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당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올해 보일러·위험물 취급증을 따서 일을 찾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달째 직업안정소에 매달리고 있지만 45세 이상을 원하는 곳이 적어 아직 성과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같은 고실업률 시대에는 자격증을 따더라도 경험이 없으면 재취직이 어려운 것 같다. 50대에 새로운 직종으로 전환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뼈에 사무치게 느끼고 있다”라고 토로했다. 가와고에 시 직업안정소가 고용보험금(실업 수당)을 지급하고 있는 사람은 약 6천명. 1년 전보다 25%가 늘어났다.

지방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일본 정부는 7월 초 홋카이도의 3개 도시, 아오모리 현의 1개 도시, 후쿠오카 현의 1개 도시 등 5개 지역을 긴급 고용 안정 지역으로 지정했다. 그만큼 이 지역들의 고용 상태가 위험하기 때문이다. 긴급 고용 안정 지역으로 지정된 지역내 기업에는 사원에게 지급될 휴업 보상비 일부가 고용조성금에서 지원되며, 중·장년을 고용할 경우 사업주에게 특정 휴직자 고용 개발 조성금을 지급하는 특혜가 주어진다.

중·장년 세대를 표적으로 하는 이른바 리스트라(정리 해고)가 유행하다 보니 그들의 자살률도 급격히 늘고 있다. 일본 경찰청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자살자는 약 2만4천명. 일본의 자살자 수는 ‘나베소코 불황기’였던 50년대 후반과 ‘엔고 불황기’였던 80년대 중반에 급격히 늘어난 적이 있다. 요즘의 극심한 불황으로 자살자가 다시 그때 수준으로 육박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경제나 생활 문제로 자살하는 사람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으며, 40대 이상 중·장년층 자살자도 2천6백명을 돌파했다. 이것은 경찰청이 자살자 통계를 내기 시작한 78년 이후 최악의 숫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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