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이산가족 상봉 사업 이미 착수”
  • 시사저널 편집국 (sisa@sisapress.com)
  • 승인 1998.03.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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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근 유엔 북한대표부 차석 대사 특별 대담/“면회소 설치 추진중”
북한 고위층의 대남 발언이 잇따르고 있는 때에, 이 근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차석 대사가 이창주 <시사저널> 편집위원과 뉴욕에서 만나 한국의 새 정부에 대한 북한의 입장을 상세히 밝혔다. 그는 이 인터뷰에서 평양이 이미 이산 가족 상봉을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유엔에 파견된 고위 외교관이자 4자 회담 북한측 대표인 이 근 차석대사는 미국 국무부의 공식 협상 파트너로서 북한의 대미 창구 노릇을 하고 있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뿐더러 다른 북한 외교관들처럼 폐쇄적이지 않고 세련된 매너를 보여, 북한 문제를 다루는 미국 관리들이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미·북한 관계의 핵심 인물이기도 하다. <편집자>

이창주: 한국의 정권 교체와 관련해 어떤 특별한 기대가 있는가?

이 근: 대미 관계를 담당하고 있는 나에게 한국의 정권 교체가 무슨 영향이나 기대를 주겠는가. 아마 우리보다는 미국측이 환영하는 것 같다. 외교 문제를 얘기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클린턴 행정부는 한국의 김영삼 정권에 대해 불편함과 불만족을 느끼고 있었으며, 나중에는 중요한 미·북한 관계 문제에 대해 의논조차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미·북한 간의 협상은 미국과 한국 관계와는 무관하게 진행되어 왔고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 확실한 사실을 김영삼 정권이 몰랐는지, 아니면 뻔히 알고도 그랬는지, 집권 기간에 미국만 붙들고 우리에게 압력과 제재를 가하라고 요구했다. 물론 미국은 북한과의 관계에서 한국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교적 관습일 뿐 실제 내용과 다르다는 것이 상식이다. 클린턴 행정부가 무엇 하나 한국 요구를 들어 준 것이 있는가. 미국은 철저히 자국 이해에 따라 외교 문제를 결정한다.

이창주: 남북 모두가 미국을 통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자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한반도 문제에서 미국의 위상과 역할만 높여 주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 아닌가. 남북 간의 직접 대화를 기피한 북한 책임도 크다고 본다.

이 근: 우리는 대미 관계와 남북한 관계를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이 두 가지를 하나로 생각하고 있다. 한국은 우리의 전통적 우방인 중국·러시아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우리의 대미·대일 관계 진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방해했고 민감하게 반응했다. 우리는 근본적인 태도 변화가 없는 한 김영삼 정권과는 민족 화합과 통일 문제를 논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누차 밝혀 왔다. 김영삼 정권은 크게 세 가지 반민족적 행위를 했다. 국상을 당한 북한에 총부리를 겨누고 민간인의 조문을 탄압한 것, 통일의 상대인 북한을 고립시키려고 책동한 것, 동족이 겪고 있는 식량 위기를 외면하고 국제 사회의 지원을 방해하는 파렴치한 행위를 한 것이다. 우리는 민족의 분단과 통일 역사에서 YS를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규정했다(이대사는 유창한 영어를 사용하면서 김영삼 전 대통령을 YS로, 김대중 대통령을 DJ로 표현했다).

이창주: 한국에 새 정부가 탄생했다. 이대사가 앞에서 제시한 남북 관계 악화의 세 가지 원인은 김대중 정권에도 유효한 것인가? 한국에 새 정권이 들어선 마당에 이러한 감정이 남북 관계 개선에 장애로 남아서는 안된다고 본다.

이 근: 내가 답변할 성질은 아니지만, 조문 파동 문제가 김대중 정권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도 김대중 정권에서 남북한 관계에 무슨 변화가 오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이 만들어 놓은 틀 속에서는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다. 현재의 적대적인 제도가 바뀌는 모습을 무엇 하나라도 보여주어야 한다. 북한은 이미 남북 간의 대화와 협상을 제의했으며, 이산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하고 상봉하는 사업을 위한 주소 안내, 해외 동포를 위한 면회소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 DJ가 통일 전문가라는 이야기를 우리도 들었다. 두고 보면 차차 알게 되겠지만, 정치적인 과장이라고 본다. 지금 우리 시대에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는가. 우리는 DJ가 70년대 초 한반도 통일 방안과 4개국 보장론 및 남북 교차 승인을 제안했던 사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와 더불어 우리가 우려하는 점은 DJ가 남북 문제로 그의 정치적 위치가 위협받을 때마다 신념과 지조 없이 재빠르게 한국의 보수 세력들과 타협하고 말과 행동을 바꾼 점이다. 그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앞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기대한다.

이창주: 최근 한국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뿐 아니라 북한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 대북 경협을 희망한 기업의 약 70%가 사업 보류 또는 포기 의사를 밝혔고, 경수로 사업 부담도 현안으로 등장했다.

이 근: 우리는 그동안 요란하게 선전되어 온 한국의 경제 성장이 실은 거품에 찬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재벌 기업들이 그렇게 부실한 줄은 몰랐다. 북한 처지에서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한국과의 경협은 말만 무성했지 아직까지 크게 이루어진 것은 없고 실제 투자도 거의 없었다. 크게 기대하지도 않는다. 경수로 건설 사업은 한국 경제 사정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이것은 미국과 협상해 이루어진 것이며, 미국 대통령이 직접 서명하여 문서로 보증하고 국제 사회가 증인이 된 사업이다. 한국 경제가 곤두박질치자 미국은 즉각 경수로 사업에 차질이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통보해 왔다.

이창주: 지난 2월18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북한 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가 만장일치로 채택한 이른바 ‘연북 화해’ 조건은 국가보안법 철폐와 안기부 폐지를 핵심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한국 처지에서 보면 수용하기 어려운 조건이 아닌가. 또, 한국의 새 정부는 남북한이 체결한 기본 합의서를 이행하는 것을 대북 정책의 기본 방향으로 삼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
"미·북한 연락사무소 준비, 사실상 끝났다”

이 근: 한국의 보안법 철폐와 안기부 폐지는 갈라진 우리 민족이 화합하고 통일을 앞당기는 데에 절대로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1차적 피해자는 김대중 대통령 자신이 아닌가. 그동안 한국 정부는, 통일하자고 해놓고 평양을 방문하거나 우리측 사람을 만나는 이들을 무조건 다 잡아 가두었다. 이런 제도를 두고 어떻게 남북 교류가 이루어지고 통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당장 하지 못한다면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나타내야 할 것이다. 남북 기본합의서가 이행되지 않은 것은 북한 잘못이 아니라 한국이 일방으로 파기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북 기본합의서 체결을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지금도 유효하다고 본다. 한국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며 다시 이 문제를 협의해 오면 아마 우리 장군님(김정일)도 적극 환영할 것이다.

이창주: 4자 회담에서 한국은 평화 체제 구축, 북한은 대미 관계 개선이라는 상반된 목표를 보였다. 이런 상태에서 과연 어떤 성과를 거둘 수 있겠는가?

이 근: 이교수가 알고 있겠지만 나는 거의 매일 미국측과 접촉하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4자 회담에 참가하기로 결정한 것은 미국 요구에 의해서였으며, 미국을 상대로 회담을 준비해 왔다. 북한은 아직까지 미국으로부터 확실한 국제적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 불평등한 조건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는 과정에서 풀어야 할 문제가 여러 가지 있다. 이러한 내용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4자 회담이 필요하다고 하여 오랜 고심 끝에 결정한 것이다. 남북 문제는 당사자끼리 논의해야 하며, 4자 회담은 국제 회담 성격에 맞추어 진행해야 한다. 국내 정치에 악용해서는 안된다. 한국이 북한 입장을 무시하고 한·미 관계의 전통성만 주장한다면 4자 회담은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현재로서는 4자 회담을 계속 진행할 생각이며, 이와 관련한 논의도 하고 있다.

이창주: 미·북한 간에 연락사무소 개설이 늦어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근: 중요한 준비는 사실상 끝났다. 다만 몇 가지 민감한 문제들, 예컨대 외교 문서 전달 경로와 방법, 연락사무소 기능과 업무의 한계 등에 대한 협의가 최종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아직까지 특별한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곧 최종 결정이 이루어져 양국 연락사무소가 설치될 것이다.

이창주: 한국에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남과 북, 그리고 해외 동포 사회에서 이산 가족 상봉 문제가 뜨거운 이슈로 등장했다. 정말 북한은 이산 가족 상봉을 적극 추진할 계획인가?

이 근: 평양은 이미 이 사업에 착수했고, 면회소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 일본인들의 가족 상봉 요구도 실현시켰는데 같은 민족의 혈육의 정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한국은 이러한 북한의 뜻을 이해하고 기회로 삼아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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