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는 러시아, 지구 곳곳서 영향력 강화
  • 李仁錫 (대한무역공사 프랑크푸르트무역관 관장) ()
  • 승인 1996.06.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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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중국과 관계 강화하며 지구 곳곳에서 영향력 강화 모색
미국·중국·러시아 등 세계 강국들이 한반도 주변에서 펼치고 있는 외교 게임은 냉전 해체 이후 전세계에서 펼쳐지는 지배권 다툼과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다. 이인석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프랑크푸르트무역관 관장이 세계 강국들의 치열한 패권 다툼 내막과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기사를 보내왔다. <편집자>

지난 2월24일 미국 마이애미에 있는 한 원호단체 소속 세스나기 2대가 영공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쿠바의 미그기로부터 총격을 받고 추락했다. 그전까지 쿠바를 제재하는 데 반대해 온 클린턴 대통령도 그때만은 의회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겠다면서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미국은 즉각 유엔 안보리에 쿠바 제재안을 상정하려 했으나, 러시아와 중국이 가로막는 바람에 좌절되었다. 안보리가 유감을 표하는 것으로써 이 사건은 국제 무대에서 일단락되고 말았다. 60년대판 미·소 대결을 상징적으로 확인해 주는 이번의 소(小) 쿠바 위기는 지구 곳곳에서 냉전이 부활할 조짐을 알리는 사건 중의 하나일 뿐이다.

체첸 침공을 반대하여 국방 차관에서 물러난 러시아의 밀로노프는 최근의 국제 정치 기류를 이렇게 요약했다. ‘냉전은 아직 계속되고 있다. 문제는 세계를 상대로 하여 군사적 지배력을 행사하려는 미국이다.’ 러시아가 이대로 가서는 미국의 안보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는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담은 말이다.

옐친이 극우 진영으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는 이유 중의 하나가 미국과 서구에 고정된 외교 행태 때문이다. 미국과만 손잡으면 모든 문제가 수월하게 풀리리라고 생각했던 그는 이제 외교의 지휘봉을 군부로 넘겨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변화의 첫 신호가 프리마코프를 기용한 것이다. 서구파의 대표 격인 코지레프 대신 외무장관으로 들어선 그는 과거 정보기관의 수장이었고 반서방 노선을 견지해온 인물이다. 서유럽보다는 중동과 아시아를 중시하는 ‘글로벌 플레이어’라는 점에서 미국은 힘겨운 적수를 만난 셈이다.

돌 공화당 대통령 후보는 지난해 자신의 외교 정책을 밝히는 자리에서 ‘걸프전쟁은 석유와 천연가스를 확보하려는 미국의 고심을 대변해 주는 상징이다. 이제 그 경계선이 코카서스·시베리아·카자흐스탄을 포함한 북방 지역으로 옮겨지고 있다. 외교·군사 모두가 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에너지가 21세기 냉전에 도화선이 되리라는 예측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50년 가까운 냉전에서 패자가 되어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러시아가 다시 지정학적 안보에 경각심을 되찾은 것은 바로 에너지 자원에 대해 미국의 위협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 한 예가 옛 소련에서 독립해 나온 아제르바이잔 근해의 유전 3개를 두고 벌어지는 미·러의 대립이다. 바쿠 유전을 개발하려고 94년 서방 콘소시엄을 통해 체결한 백년 계약에는 80%가 서방 몫이고 그 중 44%를 미국의 메이저들이 차지하도록 되어 있다. 이 계약이 체결된 바로 직후 러시아의 체첸 침공이 시작되었다. 목적은 아제르바이잔·카자흐스탄·투르크메니스탄을 거쳐 서방 시장으로 연결되는 송유관을 통제할 수 있는 세력 기반을 굳히려는 것이다.

러시아 군부 “서방 기업 활동 무력으로 저지해야”

에너지 수출은 러시아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거기다가 20년대에도 이런 식으로 서방 기업들이 자원을 채굴해 간 경험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석유를 개발하기 위해 진출한 서방 기업들을 두고 에너지 침략이라고까지 말하는 것도 과거의 상흔이 살아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프리마코프가 석유에 불을 지르는 식의 서툰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6월 대통령 선거에서 공산당이 승리할 경우 군부 압력을 이겨낼지는 의문이다. 이미 지난 가을 러시아 군사연구소는 ‘국제 석유협정은 파기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무력으로 서방 기업들의 활동을 중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바쿠 침공을 촉구한 적이 있다.

모스크바와 워싱턴 사이에 재발하고 있는 냉전 시대의 갈등은 근동에서부터 대만·중국을 포함한 극동에 이르는 무기 시장에서도 내연되고 있다.

국제 정치 무대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포커 게임에 비유되기도 한다. 주역인 몇몇 무사와 이들을 따르는 조역들이 무대가 바뀔 때마다 편짜기가 달라지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80년대 말까지는 미국이 중국을 내세워 소련을 제압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냉전극은 미국측의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소련에 대해 수십 년간 쌓아 온 적대심에다 군사 위협까지 느낀 중국에 등받이가 되어 줌으로써 미국은 소련의 아시아 지배력을 견제할 수 있었다. 그 중국 카드가 또다시 등장했다. 이번에 그것을 쥔 쪽은 러시아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동유럽 지역으로 확대하겠다는 미국에 대한 노기를, 대만 정책과 인권 문제로 격앙된 중국의 반미 감정에 접목시키려는 전략에서 나온 카드다.

옐친은 지난 4월24일 3일간 중국을 방문했다. 강택민(江澤民)은 나토의 동유럽 확대 반대를, 옐친은 ‘하나의 중국’을 지지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또 북경과 모스크바 사이에 핫라인을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강택민은 작년에 맺은 클린턴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모스크바를 택한 것이다. 마지막 공동 성명에서는 21세기 전략적 동반자임을 다짐하기도 했다. 이렇게 반미 감정이 중·러 두 나라끼리 손을 굳게 잡도록 해주었다.

옐친과 강택민은 모두 개혁 정치의 기수라고 자처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등소평의 개혁 정치는 민주주의의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고르바초프의 민주주의 실험은 경제 안정을 찾지 못했다. 두 나라의 개혁 정치가 군부와 공산당의 거센 압력 속에서 새로운 민족 세력들로부터 도전 받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러시아 공산당은 나토의 동유럽 확대에 정면 대결하기 위해 아시아에서 동반자를 찾으라고 옐친을 몰아치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에서도 미국의 아시아 지배력을 저지하려면 러시아와 손잡아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 물론 실용적인 중국인들이 러시아와 이념 동맹을 맺는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더욱이 경제적으로 미국에 의존해 있기 때문에 ‘러시아 룰렛’에다 막대한 돈을 거는 모험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아시아의 대미 방파제로서, 또 에너지 공급원으로서 러시아를 필요로 한다.

“냉전 뒤 미국 짝사랑 계속 외면당했다”

지난번 방문에서 옐친이 들고 간 보따리는 중국의 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우선 중국을 오랫동안 괴롭혀 온 중앙아시아 쪽의 국경 문제가 해결되게 되었다. 옐친과 동행한 카자흐스탄·키르키스탄·타지키스탄 대통령들과 국경 협정을 체결하였기 때문이다. 4+1 형식의 국경 협정은 중국측이 보면 마치 네 나라를 상대로 한 합동 결혼식과 같은 경사였다.

특히 미국을 겨냥한 두 사람의 결속을 다져준 것은 러시아의 무기이다. 잠수함과 신예 SU 전투기 26대를 이미 공급한 러시아는 추가로 24대를 판매하기로 했다. 대만에 군사 기술을 제공하는 미국에 보라는 듯이 중국은 92년부터 러시아 무기를 들여오기 시작했다.

무기 거래란 바로 군비 정책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국 군사력은 이미 극동의 안보 기반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한 수준에 올라 있다. 게다가 중국측에 가세한 러시아의 무기 공급 열기는 더욱 달아오를 전망이다.

최근 미국 국방부는 러시아가 대륙간 유도탄 SS 18을 중국에 판매했다고 주장하여 국제적인 관심을 모았다. SS 18은 옛 소련이 보유했던 최강의 파괴력을 지닌 병기다. 서방에서 일명 ‘Satan’이라고도 불리는 이 유도탄은, 사정 거리 1만1천㎞, 무게 76t, 파괴력은 TNT 50만~75만t으로서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 42~58개와 맞먹는 것이다. 옛 소련이 보유했던 3백8개를 우크라이나와 나누어 인수한 러시아가 그 중 일부를 중국에 공급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군축 문제에서 러·중 사이에 깔려 있는 갈등의 불은 끄지 못했다. 옐친은 극동 지역 병력을 감축하자는 중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중국과의 분쟁은 물론이고 장차 일본·미국과 벌어질지 모르는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그동안 러시아는 사실상 국제 정치 게임에서 후보 선수로 전락한 형국이 되어왔다. G7 정상회의는 개혁 정치를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회의 때마다 옐친을 초청했지만, 그는 옵서버 자격이라 본회의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비를 맞으면서 문 밖에서 기다리는 모습만 보여주었다.

러시아의 한 언론인은 이렇게 초라해진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미국과의 전략적 동맹은 실패로 끝났다. 미국의 호의를 얻어 내려고 얘를 썼지만 결국 조역 노릇만 했을 뿐이다. 미국은 자기보다 약한 나라만 상대해 온 경험을 그대로 러시아에 적용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약소국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가 없다.” 마치 미국에 대해 결별을 선언하는 것처럼 들리는 이 말은 곧 러시아가 품고 있는 소외감을 극명하게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서는 어떤가? 한마디로 말해 러시아는 다른 플레이어들의 견제를 받아 설 자리를 잃은 형세이다. 북한 핵동결 협상 때는 국제원자력협정을 근거로 협상 참여권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경수로 지원도 90년 체결된 북·러 핵협정을 내세워 일정한 지분을 요구했으나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번 중국 방문에서도 한반도 4자 회담 그룹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으나 외면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연출된 국제 정치 게임들을 재구성해 보면 거기에는 몇 가지 원리가 일관되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혼자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지만, 둘이면 어떤 것도 해낼 수 있다는 것이 그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지금 장외에서 서성거리는 러시아가 언제 누구의 손에 이끌려 다시 한반도 무대에 등장할지 모른다.

살아 남기 위해 할복극을 벌이는 북한에 대해 당장 러시아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무기와 에너지를 대주는 것뿐이다. 빵과 돈이 절박한 북한의 처지에서 보면 러시아를 갈등의 주역으로 끌어들이기에는 적기가 아니라고 여길지 모른다.

두번째는, 현실 정치가 信義 정치를 제압한다는 사실이다. 종국에 이르면 주역들은 名을 버리고 實을 택한다. 미국의 대만 포기, 중국과 소련의 한국 수교가 대표적인 예다. 실과 명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취하기 어려운 한국으로서는 주변 네 나라를 상대로 동맹 관계와 동반 관계를 동시에 유지할 수 있도록 ‘兩眼’의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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