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선 사업으로 '광' 내는 미국 갑부들
  • 워싱턴·변창섭 편집위원 ()
  • 승인 2000.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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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 벤처 갑부들, 재단 설립 '붐' ··· 순수성 둘러싼 비판도
올해 35세인 컴퓨터 소프트웨어 대리점 주인 릴리 캔터 씨. 마이크로소프트(MS) 사에 투자한 주식이 수천 배로 뛰어 백만장자가 된 수천 명 중 한 사람이다. 그녀는 얼마 전 남편과 함께 2백만 달러를 출연해 교육사업을 위한 자선 재단을 만들었다. “1980년대의 신분 상징이 BMW였다면, 금세기 신분 상징은 자기 이름을 딴 재단을 갖는 것이다.” 그녀가 최근 한 언론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말이다.

캔터 씨처럼 운이 좋아 횡재했든, 아니면 고생 끝에 자수성가했든 미국인의 자선 행위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인구 2억7천만명 가운데 백만장자가 무려 2백50만명, 억만장자도 2백67명에 이를 만큼 미국에는 부자가 득실댄다. 부자가 많은 만큼 자선사업가도 셀 수 없이 많다. 특히 20세기 초 자선 시대의 황금기를 활짝 연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 석유왕 존 록펠러, 자동차왕 헨리 포드가 내놓은 수백억대 자선금은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진가를 톡톡히 발휘하고 있다. 이들이 후세에 전한 값진 교훈은 ‘생전에 번 만큼 사회에 돌려준다’는 평범한 진리다.

극빈층이 자선 참여율 가장 높아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이 최근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프랑스인과 독일인은 10명 중 4명꼴로 자선단체에 돈을 기부했는데, 미국인은 10명 중 7명이나 돈을 냈다. 자선단체연합인 인디펜던트 스펙터에 따르면, 일반 미국인 한 사람이 지난해 기부한 평균액은 약 2백50 달러. 지난해 이들의 자선 총액은 1천9백억 달러로, 전년도보다 2백억 달러가 늘어났다. 흥미로운 사실은, 자선에 참여한 미국인은 고소득층이 아니라 저소득층과 중산층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인디펜던트 스펙터가 밝힌 1998년 자선 참여율에 따르면, 연봉 만 달러 이하 최빈층이 5%, 또 3만∼4만 달러대 중산층이 2.1%인데 반해 7만5천 달러 이상 고소득층은 고작 1.6%였다.

현재 미국에는 매년 50만 달러 이상 자선기금을 운용하는 단체가 무려 60만개에 이른다. 여기에 하이테크 붐을 타고 억만장자가 된 기업가들이 최근 너도나도 자선사업에 뛰어들어 화제가 되고 있다. 이를테면 인터넷 소매경매업인 eBay 사를 차려 단숨에 42억 달러를 번 창업자 피에르 오미디아르는 이미 1억 달러를 출연한 데 이어 앞으로 20년 안에 자신의 재산을 1%만 남기고 모두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공언했다. 아메리카 온라인(AOL) 스티브 케이스 회장은 지난 5년 동안 무려 2억 달러 이상을 자선기금으로 내놓았다. 한때 인터넷 웹브라우저의 대표주자였던 넷스케이프 사 최고경영자를 지낸 짐 바크스데일은 부인과 함께 아예 자선사업가로 나섰다. 지난해 이 회사가 아메리카 온라인에 팔린 뒤 약 7억 달러를 거머쥔 그는 올해 초 1억 달러를 출연해 문맹 퇴치를 위한 자선단체를 설립했다. 그의 꿈은 주민 70만명 가운데 3분의 1이 문맹인 고향 미시시피 주의 문맹률을 0%로 만드는 것이다.
실리콘 밸리 출신으로 세계 개인 컴퓨터(PC) 시장을 석권한 마이크로소프트 사 회장 빌 게이츠도 빼놓을 수 없다. 개인 재산이 6백50억 달러로 세계 최고 갑부인 그는 지난해 무려 1백70억 달러를 출연해 ‘빌 앤드 멜린다 게이츠 재단’을 세웠다. 현재 자산 가치가 2백20억 달러로 불어난 이 재단은 세계적인 질병 치유와 북미 지역의 인터넷 교육사업을 위해 해마다 10억 달러 정도를 내놓고 있다. 7월27일에는 노숙자들을 위해 4천만 달러를 기부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훗날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줄 생각은 없다고 공언한 바 있다. 그밖에 델 컴퓨터 사의 마이클 델 회장, 시스코 시스템스의 존 체임버스 회장, 야후의 공동창업자인 데이빗 필로와 제리 양이 구체적인 액수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주로 교육 부문과 인터넷 사업용에 상당액을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미국내 10대 자선가의 면면을 보면, 1위는 빌 게이츠이고 그 다음은 월스트리트 금융가의 ‘큰 손’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에 20억 달러를 출연한 금융인 조지 소로스다. 또 세계적 케이블 전문 뉴스방송인 CNN의 창업자이자 타임 워너 사 부회장인 테드 터너가 13억8천만 달러, 아메리칸 센추리 뮤추얼펀드 창업자인 제임스 스토워가 3억6천만 달러, 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창업자인 폴 알렌과 화학업계의 선발 주자인 헌츠먼 사의 존 헌츠먼 회장 그리고 인터내셔널 데이터 그룹 회장인 패트릭 맥거번 회장이 각각 3억5천만 달러씩 출연했다. 그밖에 잉그럼 사 마서 잉그럼 회장이 3억 달러, 의약업체인 미니메드 사 알프레드 만 회장이 2억7천만 달러, 영화 스튜디오 MGM의 전 소유주인 커크 커코리언 씨가 2억7천만 달러를 각각 자선 기부금으로 내놓았다.

이들 중 개인 재산이 30억 달러를 웃도는 것으로 알려진 테드 터너는 1997년 9월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에게 질병 퇴치와 난민 구호용으로 10억 달러를 희사하겠다고 발표해 세간의 화제를 끌었다. 당시 미국이 15억 달러 분담금을 체납하는 바람에 재정난을 겪고 있던 유엔으로서는 그 소식이 더할 나위 없는 낭보였다. 터너는 당시 돈을 내면서 미국에는 돈을 엄청나게 벌면서도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기업인들이 자선사업을 위해 출연하라고 촉구했다. 그는 특히 ‘착한 일에 돈을 쓰면, 돈은 더 굴러들어 오더라’는 교훈을 자선 행위를 통해 체득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터너의 이런 호소가 얼마나 효과를 발휘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근래 실리콘 밸리 기업가들이 부쩍 자선 대열에 뛰어든 것을 보면 나름의 설득력을 가졌던 것 같다.

한 가지 특기할 점은 자선사업 방식이 시대와 세대를 반영하듯 과거와 많이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과거에는 일단 자선기금을 내놓으면 돈의 최종 용도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말하자면 단순히 수표나 써주는 무조건적 자선 행태에서 벗어나 출연한 돈이 어떤 용도에 어떻게 쓰이는지를 꼼꼼히 챙기려 한다는 점이다. 한 예로 2천만 달러를 출연해 벤처 기업 창업을 돕고 있는 존 도어 씨에 따르면, 너무 많은 자선기금이 원래 의도된 수혜자에게 돌아가지 않고 엉뚱한 곳에 허비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자선기금도 기업 경영 방식대로 효율적이고 수익성 있게 운용되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벤처 창업자들을 엄격히 심사해 꼭 필요한 사람만을 골라 돕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가 지원한 벤처 기업 가운데 대표적인 성공 사례는 아마존이다.

자선기금 운용도 꼼꼼히 ‘체크’

요즘 세태를 반영한 자선사업가는 또 있다. 자기는 돈이 없지만 기부자들을 설득해 돈을 모은 뒤 자선사업에 뛰어든 경우다. 기원 전 3세기 인도 황제의 이름을 따 ‘아쇼카’라는 자선단체를 만든 빌 드레이튼이 좋은 예다. 최근호 <타임>에 따르면, 그는 주로 소액 자선기부가들을 만나 저개발국 빈곤 퇴치를 위해 설립된 아쇼카 재단을 후원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기를 10여년. 1991년 마침내 아쇼카 재단은 2백20만 달러를 모금하는 데 성공했다. 이 돈으로 그는 인도·태국·멕시코는 물론 아프리카 곳곳의 빈곤국을 돌며 천여 개에 이르는 빈곤퇴치 계획을 도왔다.

이처럼 자선기업가도 많고 이들이 출연하는 기금도 넘치지만, 비판하는 눈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최근 붐을 이루고 있는 실리콘 밸리 출신 기업가들의 자선 행위가 과연 순수한 자선 목적인지에 대한 논란도 있다. 이를테면 1백70억 달러를 기부해 화제를 뿌린 빌 게이츠 회장에 대해서 비판가들은 마이크로소프트 사에 대한 반독점 소송으로 이미지가 구겨질 대로 구겨진 그가 이를 회복하기 위해 자선재단을 세웠다고 본다. 또 얼마 전 댈러스의 공립 학교에 컴퓨터 1천1백대를 기증한 로런스 엘리슨 오러클 회장의 경우, 기증한 컴퓨터가 엘리슨 회장이 소유한 NIC 사가 제작한 것이라는 점에서 과연 그의 자선 동기를 순수하게 볼 수 있느냐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반쪽 빵이라도 없는 것보다 낫다’는 격언대로, 자선 행위 자체에 대한 시비보다는 자선의 ‘결과’에 더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여론이 아직은 우세한 것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프리카 대륙에서 숱한 사람들이 말라리아 백신을 맞을 수 있는 것은 빌 게이츠가 돈을 낸 덕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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