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미르딘의 선택, 공산당이냐 재벌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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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8.09.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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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권력 다툼 본격화… 일단 공산당 의견 대 폭 수용할 듯
석유·가스 산업계의 대부 빅토르 체르노미르딘이 정부 종합 청사인 벨르이돔(하얀 집)으로 화려하고 당당하게 복귀했다. 측근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체르노미르딘은 총리 직을 수락하는 조건으로 보리스 옐친 대통령에게 완전한 조각권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옐친은 체르노미르딘을 총리로 지명한 뒤 다음 대선에서 그를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했다.

이 말의 진위 여부를 떠나 일방적으로 총리 직에서 물러나야 했던 5개월 전에 견주어 보면 그의 위상이 얼마나 바뀌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체르노미르딘은 당시 미국을 방문해 마치 차기 대통령이라도 된 듯한 발언을 했으며, 이와 같은 지나친 정치적 행보 때문에 총리 직에서 해임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옐친은 외환 위기와 이로 인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해결사로 그를 재등용했다. 5개월밖에 안된 일이지만 외환 위기가 가져온 커다란 변화이다. 그러나 체르노미르딘의 복귀가 외환 위기 해결이라는 측면에서 갖는 의미는 그다지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등장한 다음날 루블화 가치가 10.1% 하락하는 등 그의 취임을 바라보는 외환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후에도 루블 폭락 장세가 지속되자 외환 당국은 공식 외환 거래 장소인 모스크바 은행간거래소(MICEX)의 외환 거래를 1주일 동안이나 중단했다. 따라서 외환 위기와 체르노미르딘 임명 문제를 본질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제 측면보다 정치 측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 외환 위기가 가져온 최대의 정치 효과는, 그로 인해 권력 다툼이 본격화했고, 정국이 2000년 대선 국면으로 조기 진입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권력 다툼 본격화는 옐친의 정치적 권위가 급격히 쇠퇴했음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옐친의 절대적 권위 때문에 차기 대선 후보들은 드러내 놓고 경쟁을 벌이지 못했다. 의회를 지배하고 있는 야당인 공산당의 반대도 정국 안정을 크게 위협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외환 위기를 겪으면서 옐친의 권위는 결정적인 고비를 맞았다.

현재 권력 다툼의 중심부에는 체르노미르딘과 공산당의 겐나디 주가노프가 자리하고 있으며, 막후에는 사라지는 옐친과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올리가르키’(신흥 재벌)들이 있다. 그외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들과 각 정치 세력은 아직 권력 다툼을 본격화하지 않고 있으나, 대선 고지를 향해 은밀하게 합종 연횡을 모색하고 있다.

현재의 정국과 세력 재편 과정은 99년 총선과 2000년 대선이라는 중요한 정치 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현재의 러시아 정치 상황은 옛 소련 붕괴에 이어 지난 92년 러시아가 신생 독립 국가로 출발한 이후 하나의 분수령이 되고 있다.

공산당과의 연정 여부가 정국 좌우

현재의 혼란한 정국은 연정 구성 시도로 첫 번째 국면을 맞고 있다. 연정 출범 여부와 출범 이후의 운영 과정이 정국 전개 과정을 좌우할 것이다. 정국의 전면에 선 체르노미르딘과 공산당은 일단 공통의 이해 관계를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

체르노미르딘은 총리로 지명되기 전부터 연합 정부 결성을 촉구했으며, 총리 지명 이후에는 이를 총리임명동의안을 조기에 통과시키기 위한 협상 카드로 사용하고 있다. 의회내 정치 기반이 취약하기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은 그의 처지를 반영한 것이다.

체르노미르딘 총리의 정치적 기반인 우리집러시아당(NDR: Our Home Russia)이 보유한 의석 수는 공산당 의석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65석이다. 자유민주당을 포함한 다른 군소 정당 4개도 30∼50석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그의 정치 기반은 미미하다고 볼 수 있다. 공산당을 포함한 야당들도 이번 기회를 기존 경제 정책을 수정하고 자신들의 정부내 지분을 확대하는 기회로 활용하고자 한다. 이런 점이 연정 구성의 공통 분모이며 낙관론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연정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다른 정치적 목적을 갖고 있어, 연정 구성 자체나 그 이후의 정국 운영을 낙관할 수만은 없다. 다수당이자 야당인 공산당이 정국을 어떻게 진단하고 어떤 대응 전략을 세우는가에 따라 정국의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즉, 공산당이 현재의 정국을 결정적인 정국 반전의 계기로 활용할 것인가, 아니면 반전의 기반만을 마련한 채 주도권을 확보할 기회를 다시 엿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연정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으나, 전자의 경우 정국 불안이 지속될 것이다.

공산당이 전략을 결정하는 데에는 옐친의 건강 상태와 국민의 불만 정도가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될 것이다. 국민의 불만이 아직 폭발할 단계가 아니며 옐친에게 결정적인 건강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아 연정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옐친 사임설은 국민들의 반옐친 정서가 현재 매우 심각하고, 최근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옐친이 일단 뒷전으로 물러선 것으로 관측되면서 더욱 설득력을 지니게 되었다. 러시아내 각 정치 세력간 조정자로서 옐친이 유지했던 정치적 권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부 서방 언론이 옐친 사임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는 했으나, 옐친 사임설이 주로 러시아 언론으로부터 흘러나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러시아 언론은 권력 투쟁 국면에서 종종 자사의 대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올리가르키의 입장을 대변하는 창구로 사용되어 왔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올리가르키들은 2000년 다음 대선에서 옐친이 다시 당선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물론 옐친의 정치적 성향과 현재의 상황을 고려할 때 건강에 결정적인 문제가 없는 한 조기에 사임할 가능성은 적은 것으로 보인다. 아직 임기가 1년 이상 남아 있고, 승부수에 능한 옐친이 스스로 물러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옐친의 건강 문제와 관련해 9월 2∼3일 개최된 미·러 정상회담에 참석한 미국 관리는 심각한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가에서는 건강 문제로 인해 옐친의 집무 시간이 아주 짧아졌다는 사실이 공공연한 비밀이다. 따라서 옐친의 건강 문제는 언제나 위험 요인으로 잠복해 있다.

겨울을 앞두고 예상되는 국민들의 생활난과 이로 인한 사회 불안 가능성이 언제나 열려 있다는 점도 위험 요인이다. 10월에는 임금 체불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예정되어 있다. 외환 위기 이후 식료품 수입이 격감하고, 흉작으로 인해 몇달 안에 식품 공급에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도 높다. 이로 인해 정치적 긴장이 고조될 경우 옐친을 사임시키려는 움직임이 결정적인 힘을 얻게 될 가능성이 높다.

총리 임명 뒤 신흥 재벌과 결탁 가능성

공산당은 92년 러시아가 급진 개혁에 착수한 이후 최고의 호기를 맞았다. 반면 개혁 과정에서 갖가지 혜택을 받으면서 세력을 확장해 온 재계의 올리가르키는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올리가르키는 위기의 순간에도 자기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막강한 힘을 행사하고 있다. 세르게이 키리옌코의 금융 위기 해법이 자기들의 경제적 이익을 침해한다고 판단한 일부 올리가르키는 출범한 지 5개월밖에 안된 키리옌코 내각을 무력화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만약 옐친이 건재한 상태에서 연합 정부가 수립되는 방향으로 정국이 전개될 경우, 중기적으로는 이 두 세력이 정책 방향을 놓고 대립하는 양상을 보일 것이다. 체르노미르딘 총리의 연합 정부는 출범 초기에는 공산당의 의견을 대폭 반영해 경제 정책을 추진할 것이나, 시간이 지나면 올리가르키의 이익과 상충하는 요인이 많아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체르노미르딘은 총리임명동의안이 가결되면 장차 대선 국면에서 경쟁해야 할 공산당보다는 올리가르키를 자신의 지원 세력으로 만드는 데 많은 관심을 둘 것이다.

따라서 정국 안정과 체르노미르딘의 정치적 장래는 이 두 세력의 입장을 어떻게 조정하면서 정치 기반을 확대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만약 체르노미르딘이 두 세력을 조정하는 데 실패한다면 자신의 지지 세력을 제대로 확산하지도 못한 채 옐친 체제와 함께, 혹은 옐친 체제에 의해 정치적 실패를 맞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윤찬혁(대우경제연구소 모스크바 주재 연구원)
모스크바 대학 미하일 셰브로크 교수 인터뷰/“체르노미르딘, 가스·석유 산업에만 관심”

모스크바 시내 중심가에 있는 모스크바 국립 대학은 옛 소련 시절부터 정치·경제 분야 엘리트를 배출해 온 러시아의 최고 명문 대학이다. 한국으로 치면 단과 대학인 경제사회학부 부장을 맡고 있는 미하일 셰브로크 교수(49)를 만나 러시아 경제 위기의 원인과 처방, 그리고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들어보았다.

지난 7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2백26억 달러 구제 금융을 받고도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문제는 옐친 대통령과 가이다르 전 총리, 그리고 체르노미르딘 전 총리로부터 발생했다. 러시아에서는 방위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 이상이다. 방위산업을 정부가 사들여 다른 나라에 파는 과정에서 연관 산업이 모두 붕괴하고, 관련 산업 종사자들이 대량 실직했다. 또 수출 자체가 막힌데다 하급 공무원들의 관료주의와 부패도 러시아 경제를 이 모양으로 만든 원인 중 하나이다.

옐친은 부정하고 있지만, 체르노미르딘이 총리를 맡게 되면 경제 개혁 작업이 후퇴하리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동의한다. 체르노미르딘은 가스와 석유 산업을 운영한 경력이 있어 앞으로도 이 분야에만 관심을 쏟을 뿐 다른 분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 사업자나 중소 기업가들에게 도움을 주는 정책이 나올 리 있겠는가.

세수 증대 등을 목표로 하는 개혁 법안이 러시아 하원에서 통과될 가능성은?

이른바 개혁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러시아 경제를 살리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 법안은 기업이 물건을 생산해서 내다 팔 때 너무 많은 세금을 징수하도록 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옐친도 망하고 경제도 망한다. 러시아에는 중국처럼 경제특구가 없기 때문에 생산 활동을 통해 경제를 살릴 방안이 없다. 정부도 생산 활동을 장려할 기반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 각료들도 소신을 가진 사람을 보기 힘들다. 뇌물이 횡행하고 늘 신변 위협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보신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러시아 경제 회생을 위해 당신이 생각하는 대안은 무엇인가?

첫째, 자유로운 경제특구를 만들어서 생산 활동을 장려하고,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줘야 한다. 둘째, 임금 체불이 심각한 광산은 최소한도로 필요한 만큼만 남겨 두고 자동차·건설·철도 등 기간 산업 분야에 투자해야 한다. 셋째, 세금은 적게 걷고, 기업인들이 벌어들인 돈을 안정적으로 재투자할 수 있도록 정부가 도와야 한다. 마피아나 정부 관료들이 기업으로부터 돈을 뜯어가지 못하도록 법으로 막아야 한다. 연금 생활자들에게도 세금을 걷고 있는데, 이를 폐지해 소비를 부추기고 이를 통해 생산 활동을 독려해야 한다. 넷째, 가스와 석유 산업을 국유화해야 한다. 가스·석유 등 거대 산업을 사유화한 뒤로 이를 소유하게 된 일부 부유층의 배만 불렸을 뿐 일반 시민들은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한다. 아랍 국가들도 이 분야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국가 기간 산업에 투자했다. 다섯번째, 토지를 사유화하기보다는 임대 위주로 운용해야 한다. 불가리아에서 토지를 사유화하면서 시장에 내다 팔았더니 부유층 일부만 토지를 소유해 버렸다. 그들은 땅을 활용하는 데 관심이 없기 때문에 수확량도 형편없다. 차라리 정부가 나서서 이를 일반인에게 임대하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열심히 일할 것이다

러시아에 구제 금융을 제공한 국제통화기금(IMF)의 경제 회생 처방은 약이 된다고 생각하나, 독이 된다고 생각하나?

국제통화기금의 처방은 생산 활동 자체를 마비시켜 러시아 경제를 망치고 있다. 아랍 국가나 중국은 정부가 주도하면서도 경제 전반이 발전을 이뤄냈다. 국제통화기금의 조처는 막강한 천연 자원을 가진 러시아 경제를 후퇴시키는 것이다.

모스크바 . 成耆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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