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 빌려 준 돈 어떻게 받았나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5.08.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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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러, 방산물자로 묘수 풀이…남은 10억달러 놓고 또 고민
지난 7월10일 오후 과천 정부종합청사에서는 `대(對) 러시아 경협차관 상환협정 서명식이 열렸다. 양국을 대표해 참석한 사람은 홍재형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관과 다비도프 러시아 부총리 겸 대외경제장관. 비록 이번 상환 협정은 우리나라가 러시아에 제공한 경협 차관 가운데 일부에 국한한 것이기는 하지만, 앞으로 매년 러시아와 벌일 경협 차관 협상에 좋은 선례를 남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두 사람이 협정서에 서명함으로써, 그동안 우리를 괴롭혀 왔던 `‘6공 악령’이 사라지게 됐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6공 정부는 90년 9월 옛 소련과 국교를 맺고 다음해 초 30억달러 경협 차관을 약속했었다. 이 때문에 러시아에 제공한 경협 차관이 6공 정부가 추진한 북방 외교의 값비싼 대가가 아니냐 하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그동안 전모를 거의 드러내지 않고 1년 여에 걸쳐 진행된 한·러 양국의 협상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국민 정서가 끊임없이 협상의 주역들을 짓눌러 왔음을 알 수 있다.

정부 부처 간에 러시아에 대한 경협 차관 상환 문제를 본격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초. 그 결과 표면화한 것이 협상의 수석 대표 자리를 둘러싼 잡음이었다. 누구도 그 감투를 자진해서 쓰려고 하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협상이 타결될 전망도 어두웠지만, 여론의 질타를 받지 않고 협상을 마무리짓기는 더욱 어려워 보였기 때문이다. 엄청난 대외 부채를 안고 있는 러시아가 우리나라 외의 다른 채권국과 진행중이던 협상 추이도 고려해야 하는 만큼 이 문제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이 그어놓은 마지노선 ‘5할’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내린 결론은 경협 차관을 현금으로 받아내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지난해 상반기에 관련 부처 고위 관계자(1급) 연석회의가 10여 차례 열린 것은 차관 상환 문제가 얼마나 골칫거리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이 회의에서는 현금이 아니라면 과연 어떤 물건으로 받아와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집중 토론했다.

이 회의에서 짜낸 묘안은 방위산업 물자를 받는 것이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무기 수요국인 우리나라가 비록 채무 상환이란 명분으로라도 러시아제 무기를 사줄 경우 다른 나라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러시아가 판단하리라는 이유에서였다. 러시아 방산업체들은 주요 무기 수출 지역이던 중동 지역을 미제 무기가 석권하기 시작하면서 곤란을 겪고 있었다.

회의가 거듭되면서 또 다른 미묘한 문제가 검토됐다. `‘러시아에서 무기를 들여올 경우 미국과의 군사 협력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미국은 다른 나라로부터 무기를 도입하려는 우리 정부의 시도를 줄곧 견제해 왔다. 최종 결론은 러시아에서 들여올 방산물자가 전체 상환 금액의 절반을 넘어서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한 관계자는 “5라는 숫자는 상징성이 큰 숫자였다”고 말했다. 전체 금액에서 방산물자로 들여오는 부분이 5할 미만이 되도록, 회의 참석자들은 또다시 묘안을 짜내야 했다.

헬리콥터를 8대 들여오기로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방산물자, 즉 무기로 분류되지 않는 산림청·해양경찰청, 각 지방자치단체의 소방 및 구난용 헬리콥터를 들여올 경우 방산물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의 50% 미만이 된다는 숫자 게임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당초 러시아 쿠메르타우사가 제작한 이 헬기 7대(1대는 한국이 현금을 주고 사는 것이다)의 가격은 전체 상환 금액 4억5천만달러의 약 5% 정도로 예상됐다. 그렇게 되면 상환되는 현물은 원자재 50%와, 방산물자 45%, 헬리콥터 5%이다. 들여오는 무기가 전체 금액의 절반을 넘지 않는다는 논리를 펼 수 있게 됐다(10일 서명한 상환 협정에서는 이 세 가지 현물의 비율이 47.4%: 46.7%: 5.9%였다).

러시아 정부는 원자재는 조금도 줄 수가 없다고 버텼다. 한국에 원자재를 주었다는 것이 확인되면 파리클럽을 비롯한 주요 채권단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숙의 끝에 양국은 묘안을 짜내고 이에 합의했다. 원자재를 주되 이를 러시아 정부가 공식으로는 부인하자는 기발한 발상이었다. 당초 러시아 정부는 원자재로 준다는 사실이 러시아 언론에 보도되지 않도록 통제할 테니까, 한국 언론에도 알려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우리 대표들은 한국 언론의 속성을 들어 그 요구에 난색을 표했다. 설령 한국에 원자재가 도착하더라도 러시아 정부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도록 하자는 절충안이 등장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협상 대표단이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양국의 또 다른 쟁점은 현물 상환분에 대한 이자 문제였다. 원자재·방산물자·헬리콥터를 98년까지 인수하기로 했는데, 그때까지 현물에 대한 이자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 정부의 입장이었다. 반면 러시아 대표들은 물건에 대한 이자는 줄 수 없다고 버텼다. 이 문제는 결국 지난해 9월 협상 대표단의 2차 러시아 방문 당시에도 타결되지 못했다가, 올해 3월 러시아대표단의 방한 때 극적으로 타결됐다. 러시아 정부가 상징적인 금액의 이자를 주되 방산물자로 한다는 것이었다.

경협 차관 상환 협상의 마지막 고비였던 이자 문제가 풀리자 한국측 협상 대표단은 1년여를 끌어온 경협 차관 상환 협상의 끝이 보인다고 판단할 수 있게 됐다. 협상 결과를 보고 받은 홍재형 부총리는 협상 대표단에게 러시아 대표들 앞에서 `‘웃지말라’고 표정 관리를 당부하기도 했다.

러시아로부터 최초로 현물 상환이 이뤄진 것은 올해 3월 말. 러시아가 제공하기로 한 산불 진화용 헬리콥터 3대가 반입된 것이다. 그 과정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당초 러시아는 양국 간에 협정이 정식 조인된 상태가 아닌 만큼 헬기를 먼저 인도해줄 수 없다고 했다. 여기에 맞선 한국측의 논리가 절묘했다. “6월이 넘으면 장마가 시작된다. 그때가 되면 산불을 끄는 헬리콥터가 필요 없어 1년 간이나 격납고에 넣어두어야 한다.”

러시아는 헬기 4대를 협정 서명에 앞서 넘겨주기로 했으면서도 마지막 수를 부렸다. 당초 받기로 한 4대 가운데 러시아의 요청으로 우리 정부가 현금을 주고 사기로 한 1대만 달랑 보내온 것이다. 일단 현금부터 달라는 러시아의 태도에 부아가 오른 우리 정부도 오기를 부렸다. 나머지 3대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이미 도착한 1대를 통관시키지 않겠다고 맞선 것이다. 3대는 정확히 3주 후에 도착했다.

이번에 러시아가 상환하기로 한 경협 차관은 지금까지 러시아에 제공한 14억7천만 달러 가운데 93년까지 갚기로 한 금액과 그 후의 연체 이자 4억5천7백만달러이다. 올해 이후의 만기 도래분에 대해서는 매년 상환 협상을 벌여야 한다. 이번 협상 서명식에서 94년까지의 만기 도래분에 대해서는 올 하반기에 모스크바에서 다시 협상을 벌이기로 합의했다.

방산물자라는 묘수를 통해 돌파구를 찾은 후 한·러 양국에는 10억달러가 넘는 미상환 부분에 대한 상환 방법을 둘러싸고 묘안이 백출하고 있다. 우리 정부가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러시아가 제시하는 묘안 가운데 하나는 북한에 대한 러시아의 채권과 상계하는 방법도 들어 있다.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가 북한에 대해 사실상 경협 차관을 지원하는 셈이 된다.

“추가 차관 제공 힘들 것”

당초 이 아이디어는 지난해 6월 한·러 협상 초기에 제시됐다. 당시 러시아 쇼핀 부총리는 한국측 협상 수석 대표들에게 옛 소련이 공산주의 국가에 빌려주고 받지 못한 채권 목록을 보여주었다. 이 목록에는 북한이 포함돼 있었고, 그 금액도 엄청났다. 그는 ‘`나중에 남북 통일이 되면 결국 다 같은 빚이 아니냐’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측 협상 대표단은 그의 이 발언을 우스갯소리로 받아넘긴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 정부가 새롭게 제시하고 있는 방안은, 한국 기업들이 러시아의 국영기업들을 인수하는 대가로 경협 차관을 돌려받는 방안이다. 이 방안은, 특히 한국 기업들이 러시아 국영기업을 인수하는 데 관심을 나타내고 있고, 러시아도 적극적인 의사를 갖고 있어 실현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또 첨단 과학 기술을 사들여오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는데, 과학 기술의 값을 어떻게 매길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에 고심하고 있다. 한·러 경협 차원에서 진행중인 모스크바 시내 한국무역센터 건립과도 연계될 가능성이 있다. 무역센터의 땅값으로 차관을 상환하게 하는 방안이다.

이제 한·러 경협 차관과 관련해 마지막으로 남은 의문은, 과연 91년 말 옛 소련이 해체되면서 중단된 차관 제공이 재개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당초 6공 정부가 30억달러를 약속했기 때문에 러시아가 재개를 요청할 경우 우리 정부는 곤란한 처지에 빠질 수도 있다. 그동안 협상을 이끌어온 실무자들은 러시아의 공식 요청이 있기 전까지는 입장을 밝힐 수 없다고 하면서도, 재개하기는 힘들 것으로 조심스레 내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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