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민주 세력, 투쟁의 깃발 들다
  • 崔寧宰 기자 ()
  • 승인 1998.06.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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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민주 세력, 의원 선거 압승…참정권 확대 등 숙제 산적
“권력에 혈안이 된 아시아의 정치 지도자들은 아시아적 가치라는 말로 정치를 왜곡했다. 홍콩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분명한 사실은 아시아인이건 미국인이건 유럽인이건 자유를 원한다는 것이다.”

홍콩 민주당 리주밍(李柱銘·60) 당수는 5월25일 입법원 선거를 앞두고 권위주의에 기반을 둔 ‘아시아적 가치’를 부인하며 홍콩의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겠다고 외쳤다.

그러나 대다수 전문가들은 홍콩 반환 이후에 리주밍을 비롯한 민주화 세력의 장래가 비관적이라고 내다보고 있었다. ‘홍콩인들은 돈·섹스·경마 이외에는 관심이 없다.’ 이 말은 리주밍의 정치 미래가 어둡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같은 사실은 역대 선거 투표율에서 잘 드러났다. 홍콩이 처음 직선제 방식으로 입법원 의원을 뽑기 시작한 91년 입법원 의원 선거 투표율은 39%였고, 날씨가 쾌청했던 95년 선거 투표율은 겨우 35%였다.
입법 활동 한계…‘개혁’ 성공 미지수

그러나 5월26일 나온 투표 결과는 딴판이었다. 유권자들이 리주밍을 중심으로 한 ‘홍콩 진보를 위한 민주 연대(DAB)’소속 후보들에게 몰표를 던진 것이다. 반(反)중국파인 홍콩의 민주 세력들은, 입법원 의석 60석 가운데 주민들이 직접 뽑는 20석을 싹쓸이했다.

투표율도 53.29%로 역대 최고였다. 선거일인 5월24일 홍콩에는 열대성 폭풍과 함께 엄청난 비가 쏟아졌다. 도로가 끊기고 민가가 물에 잠기는 등 재산 피해와 희생자가 속출했다. 그런데도 홍콩 사람들은 우산을 받쳐들고 무릎까지 차오르는 물바다를 헤치며 투표장으로 향했다.

리주밍은 원래 홍콩 대학을 졸업한 뒤 3년 동안 중학교에서 영어·역사·성경을 가르쳤다. 이후 그는 런던에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고 66년 귀국한 뒤 개업했다. 정치는 82년부터 시작했다. 89년 천안문 사태 직후 홍콩 주민 10만명을 반중(反中) 시위에 동원하면서 베이징 당국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리주밍은 앞으로 선거 과정에서 내세운 공약을 중심으로 행정 당국과 투쟁할 작정이다. 가장 큰 숙제는 참정권을 확대하는 문제이다. 홍콩 반환 당시 중국과 영국이 합의한 내용을 보면, 현재 20명인 직선 의원을 99년에 24석으로 늘리고 2003년이나 2004년에 30석으로 늘리기로 되어 있다. 그리고 2007년이 되면 모든 의원을 직선으로 뽑는다는 것이 합의 사항이다. 그러나 둥젠화(童建華) 행정장관은 최근 미국 외교관들에게 이 일정을 15년 정도 연기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금과 실업 문제도 있다. 홍콩 행정청은 현재 실업률이 가파르게 오르고 있는데도 노동력을 외부에서 수입할 계획이다. 구조를 조정하고 신기술에 투자하기보다는 임금을 깎아서 경쟁력을 키우려는 자본가들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환경 문제도 중요 과제이다. 홍콩의 1인당 GDP는 유럽연합 평균보다 높다. 그러나 공중 위생 같은 환경 문제는 수준 이하이다.

그러나 리주밍의 투쟁이 얼마나 성과를 거둘지는 모른다. 우선 그를 중심으로 한 민주 세력들이 가지고 있는 의석 20개는 홍콩 입법원 전체 의석(60석)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간접 선거와 직능 대표로 선발하는 나머지 40석은 둥젠화 행정장관과 같은 친중국계가 장악하고 있다.

입법 활동에도 한계가 있다. 홍콩 입법원에서는 공공 세출에 관한 법안, 정치 구조, 행정 당국의 활동에 관한 법안은 다루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이대로라면 그가 행정장관의 정책을 뒤바꾸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리주밍은 홍콩 주민들이 직접 뽑은 대표적인 정치 지도자이다. 베이징 당국도 입으로 향인향치(香人香治:홍콩 사람이 홍콩을 다스린다)를 내세우기 때문에 그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의 두 어깨에 홍콩의 민주주의가 달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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