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자 회담, 의제와 목표 또렷이 하라
  • 전성훈 (민족통일연구원 연구위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6.07.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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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국들의 권한과 책임 ‘불분명’…사안 따라 동북아와 한반도 문제로 이원화해야
 
북한은 94년 4월28일 정전 체제를 평화 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미·북한 직접 협상을 요구한 이래 정전협정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일련의 조처를 집요하게 취해 왔다. 지난 2월28일 북한은 94년에 내놓은 제의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미·북한간 잠정 협정을 체결하고 공동 군사기구를 설치하여 군사정전위원회 기능을 대신하자고 제안했다.

한국은 최근까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문제는 남북한 당사자가 협상을 통해 해결해야 할 사안이라는 원칙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북한이 한국 정부와 직접 대화하기를 거부하면서 정전 체제 무력화를 기도하는 상황이 계속되자 한·미 양국 정부는 북한에 대해 4자 회담을 제의하게 되었다.

4자 회담 제의에 대한 북한과 중국의 반응은 미온적이다. 북한은 4자 회담을 통해 미국과 직접 협상해 달성하려던 목표를 이룰 수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자 ‘검토중이다’ 혹은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며 유보적인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중국도 한반도 문제는 당사자인 남북한 간의 입장 차이가 먼저 해소되어야 한다는 미온적인 태도를 표명하고 있다.

일본은 4자 회담에 대해 매우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반면에 러시아는 자국이 배제된 것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으면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4자 회담이 아니라 관련 당사자가 모두 참여하는 국제 회의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과 중국의 태도가 미온적이기 때문에 4자 회담이 머지 않아 성사될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아 보인다.

4자 회담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회담을 제의한 내용상의 문제점들이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

첫째, 4자 회담 제의에는 그 목표와 의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대목이 없다. 다자가 모이는 회담에서 목표와 의제가 명확히 합의되지 않은 경우 협상이 장기화하거나 표류할 수 있고 아울러 한국의 국익에 위배되는 협상 결과가 나올 수 있음이 우려된다.

둘째, 제의 내용 중 주요 용어의 개념 정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해석상의 이견으로 마찰이 발생할 소지가 있다. 예를 들어 ‘항구적인 평화협정’ ‘광범위한 긴장 완화 조치’ ‘항구적인 평화 체제’ 라는 말의 구체적인 의미와 요건이 분명하지 않다. 또한 공동발표문(제4항)은 한반도의 평화와 관련하여 미·북한 간에 별도 협상은 고려할 수 없다고 규정하였으나 ‘한반도의 평화와 관련된 의제’라는 말을 광범위하게 해석할 경우, 미사일협상과 연락사무소 개설 협상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미·북한 접촉이 해당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셋째, 4자 회담 성격 규정, 즉 회담 참가국들의 의미와 권한에 대해 분명한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4자 회담은 항구적인 평화 체제 구축 과정을 개시하고 광범위한 긴장 완화 조처를 토의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반면에 한반도의 평화 체제 구축은 남북한이 주도한다고 명시함으로써 의제 및 협상 절차 결정과 협상 진행 과정에서 혼선을 빚을 가능성이 있다.

 
남북한 문제는 당사자 해결 원칙 ‘최우선’


이같은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을 경우, 국내 여론은 4자 회담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갖게 될 것이다. 즉 4자 회담에서 한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못하거나, 남북 간에 관계 개선 없이 미·북한 관계가 급속히 진전되거나, 한반도 문제에 대한 미·중의 개입을 제도화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제기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한국과 대화를 거부하고 있는 상황에서 4자 회담은 남북 관계 개선에 좋은 기회로 활용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4자 회담이 두 가지 원칙과 전략에 따라 운용되어야 한다.
첫째, 4자 회담은 보조적 성격의 대북 유인책이다. 즉 4자 회담의 역할은 북한이 남북한 직접 대화를 기피하는 현 상황에서, 남북한이 주도하게 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과정을 시작하는 데 있다. 둘째, 남북한 문제의 당사자 해결 원칙은 견지되어야 한다. 당사자 해결 원칙은 4자 회담에서 최우선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4자 회담은 동북아 차원과 한반도 차원으로 구분하여 진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전자에서는 동북아 차원의 공통 관심 사항을 주의제로 다루고, 한반도 문제에 대한 언급은 최소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후자에서는 남북 협상과 미·북한 협상으로 협상 채널을 구분하여 협상 의제와 협상 결과에 대한 이행 책임을 이원화해야 한다.

더 구체적인 4자 회담 운용 전략은 다음과 같이 세울 수 있다.

첫째, 남북한과 미·중 및 기타 동북아 관련국들에게 공통으로 해당하는 관심 사항을 광범위하게 다룸으로써 4자 회담을 동북아 다자 안보 협력의 기초로 활용한다. 현재 동북아에는 역내의 모든 관련국이 참여하는 대화와 협력의 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4자 회담이 역내 평화 체제 구축을 위한 기본 틀로 활용될 수 있다. 적절한 시점에 일본·러시아·몽골을 참여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75년에 유럽 35개국이 모여 체결한 헬싱키협약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유럽의 항구적인 평화와 긴장 완화를 위해 합의된 이 협약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 1부분은, 참가국 간의 관계 개선에 기초가 되는 11개 원칙을 담고 있다. 무력 불사용, 국경선 불가침, 분쟁의 평화적 해결, 내정 불간섭, 인권 존중 등이 포함된다. 또한 군사적 신뢰 구축 조처도 합의되었다. 제 2 부분은 경제·과학·기술 및 환경 분야 상호 협력에 관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 3부분은 인권·문화 및 교육 분야에서의 협력 문제를 다루고 있다.

4자 회담의 주요 목적도 4자 간에 헬싱키협약과 유사한 포괄적인 선언을 채택하게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 동북아 차원의 헬싱키협약이 4자 회담의 주요 결과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선언은 참가국 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기본 원칙을 천명함으로써 북한의 체제 유지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미·북한, 북·일 관계 정상화에는 못미치는 조처이기 때문에 한국으로서도 수용 가능한 조처일 것이다.

남북의 몫, 미·북한의 몫 따로 있다

둘째, 남북한 문제와 관련해서 4자 간에 합의되어야 할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는 기본 합의서의 정치적·법적 정당성을 공식 인정 받는 것이다. 즉, 4자 회담은 기본 합의서가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 체제를 구축하는 기본 틀이며, 이 합의서를 완전히 이행하는 것이 평화 체제 구축 완성을 의미한다는 데 합의해야 한다.

한반도 차원에서 4자 회담은 남북 협상과 미·북한 협상으로 이원화해 추진되어야 한다. 4자 회담을 제의한 주요 동기가 남북 관계 진전과 미·북한 관계의 부조화를 해결하는 데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두 협상 간의 관계 설정을 명확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당면한 관련 의제를 미·북한 직접 협상이 가능한 의제와 남북 대화로 해결해야 할 의제로 세분하고, 협상 결과 이행에 대한 책임 소재를 미국과 한국으로 이원화해야 한다. 핵문제에서처럼 미국이 미·북한 직접 협상 결과를 이행하는 데 따른 부담을 한국에 전가하거나 한반도 관련 문제에서 남북한 당사자 해결 원칙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미·북한 간에 논의 가능한 의제는 북한의 미사일 수출, 유해 송환, 경제 제재 완화 및 협력, 정치·사회·문화 분야에서의 양국간 관계 개선 문제이다. 그러나 북한의 미사일 개발 및 배치 문제는 남북한이 군사공동위원회에서 다루어야 할 사안이며 미·북한 간 군사 접촉도 바람직하지 않다.

남북 간에 논의되어야 할 사항들은 양측이 기본합의서 제12조에서 합의한 군사적 신뢰 구축 및 군축 조처, 북한의 미사일 보유 문제, 북한이 잠정 협정을 제의하면서 제기한 사항들, 군사 교리 세미나 및 군인사 교류, 남북한 영공 개방, 북한 핵의 과거 의혹 해소 문제 등이다. 특히 주한미군 문제는 미·북한 간의 협상 대상이 아니라 남북한 군비 통제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이다.

경수로 협상에서와 같이 한국이 비용만 댄다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합의 사항 이행에 따른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북한은 미사일 수출을 중단하는 대가를 요구할 것이나 이는 미국· 이스라엘·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국가들이 부담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4자 회담은 남북간 직접 대화를 촉진하기 위한 보조적 성격의 한시적 장치이다. 앞으로 남북 관계가 활성화하면 4자 회담의 중요성은 그만큼 감소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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