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길' 대북 사업 서두르면 낭패 본다
  • 신지호 (일본 21세기정책연구소 연구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8.1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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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측 ‘대안의 사업 체계’ 등 장벽 수두룩…치밀한 준비·전략 없이 덤비면 낭패 십상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2차 방북 이후 한국에서는 남북 교류 협력에 대한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기대를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같은 기대를 실현할 구체적 지략과 행동 계획을 갖추는 일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고 정경 분리 원칙에 입각한 김대중 정부의 북한 포용 정책은 설 자리를 잃고 만다.

먼저 북한과의 경제 교류에서 한국보다 선배인 일본의 경험을 살펴보자. 70년대 초반 북한은 일련의 개방 조처로 서방의 설비·플랜트 수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는데, 그 주된 대상은 일본이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북한은 수입 대금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아 채무 불이행(default)상태가 되고 말았다. 현재 북한의 대일 부채액은 매년 이자가 불어나 9백억 엔에 육박하고 있다. 당연한 결과지만 일본 기업들은 대북 비즈니스에 냉소적이다. 몇년 전부터 북한이 나진·선봉 외의 다른 지역도 똑같은 조건으로 열어 줄 테니 투자해 달라고 적극 나오고 있지만 일본 기업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일본 기업 대북 비즈니스 ‘실패의 연속’

다음으로 84년 합영법 제정 이후 그 주요 파트너였던 조총련 기업들의 경우를 보자. 애국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다는 기대로 한때 조총련 사회에는 합영 사업 붐이 일었다. 그러나 결과는 쓰라렸다. 필자가 3년 전에 입수한 조총련 합영사업추진위원회 내부 자료에 따르면, 백여 건의 합영·합작 사업 중 폐업률은 50%에 육박한다. 그러니 지금은 더욱 늘어나 있을 것이다. 성공한 예로 알려지고 있는 모란봉 합영회사(의류)와 파코 합영회사(피아노)의 경우는 조총련측 사쿠라 그룹이 인사·경영권을 둘러싸고 중단 없는 투쟁을 벌인 결과다. 그들이 겪은 우여 곡절은 아마 책 한 권을 써도 부족할 것이다.

그런데 그 모란봉 합영회사마저 10년 계약이 끝나서 재계약을 해야 했던 재작년부터 1년 이상 제대로 가동되지 않았다. 경영권을 자기들이 행사하겠다는 북한측의 ‘당치 않은’ 주장 때문이었다. 현재 북한 투자에 적극적인 조총련 기업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시장 경제의 문외한을 짝사랑한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 비싼 수업료를 내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남북 경제 교류 10년을 돌아보자. 한국 기업의 대북 사업 담당자들을 만나면 이구 동성으로 늘어놓는 푸념이 있다. “정말 힘들다. 우리도 돈 좀 제대로 벌어 봤으면 좋겠다.” 한마디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92년 초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은 김일성과 남포 경공업 합작 단지 조성, 석탄 등 지하 자원 개발 및 국내 반입, 제3국 건설 시장 및 제조업 분야 공동 진출 등 굵직한 프로젝트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제까지 실현된 것은 96년 4월 남포에 조선삼천리총회사와 민족산업총회사라는 합영 기업을 하나 설립한 것뿐이다. 이 회사는 유일한 남북 합영 기업으로 눈길을 모았다. 그런데 그 회사 대우측 관계자가 지난해에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다. 사업이 잘 풀리지 않아 답답한 나머지 합영 사업 선배인 사쿠라 그룹으로부터 조언을 얻기 위해서였다.

이상이 대북 비즈니스 약사(略史)이다. 왜 이처럼 대북 비즈니스는 번번이 실패하고 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북한은 기울어져 가는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외부 세계로부터 수혈을 받으려고 하나,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금·기술·설비일 뿐 자본주의 경영 방식이 결코 아니다.

공동 출자·공동 경영인 합영 사업의 경우, 외부의 파트너들은 시작과 더불어 북한의 독특한 기업 관리 방식인 ‘대안의 사업 체계’와 맞부딪치게 된다. 대안의 사업 체계에서 가장 큰 권한을 행사하는 사람은 지배인(회장·사장에 해당)이 아니라 당비서이다. 당비서가 지배인을 포함한 인사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합영 사업이라 해서 대안의 사업 체계가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업 시작과 더불어 자본주의적 경영 방식과 대안의 사업 체계와의 일대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는데, 대부분의 경우 홈그라운드 이점을 가진 대안의 사업 체계가 승리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하다.

뒷거래에 맛들인 북한, 억지 요구 일쑤

이같은 실패의 역사와 관련해 한 가지 더 지적할 것이 있다. 지난 10년간 한국 기업들은 대북 비즈니스를 원활하게 진척시키기 위해 ‘급행료’ ‘보험료’ 등 각종 명목으로 정상 거래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필요 이상의 돈을 지불했고, 북한 당국은 이같은 비공식적인 수입으로 짭짤한 재미를 보아 왔다. 비즈니스를 목적으로 방북하기 위해 베이징 등지에서 북한 관계자들을 만나면 반드시 듣는 소리가 있다. “누구는 얼마를 가지고 왔다. 당신은 어떤 선물을 가지고 올 것인가?”

국가적 차원에서 남북 경제 교류의 목표는 시장 경제를 전파해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유도하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 가을 이래 그간 한국측과 접촉이 많았던 북측 인사들이 처형 내지 숙청의 길을 걷고 있다. 얼마 전에는 나진·선봉 책임자였던 김정우 총살설마저 흘러 나왔다. 결국 한국은 북한에 건전한 시장 경제가 아닌 부패한 천민 자본주의를 이식해, 결과적으로 온건파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개혁·개방을 오히려 후퇴시켰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지난해 말 한국에 경제 위기가 발생했을 때, 그래도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남북 경제 교류의 거품이 모두 걷히리라는 관측이었다. 실제 올해 들어 교역량은 70% 정도가 줄었지만, 한국 기업들은 ‘시장’이 허용하는 정상적 관행으로 돌아오고 있다. 그런데 이같은 흐름을 뛰어넘는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바로 현대그룹의 대북 사업이다.

물론 필자는 현대그룹의 의욕을 높이 평가하며, 그들이 구상하는 사업들이 반드시 성공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현대에게 성공을 위한 비책은 있는가? 대북 사업에 관한 한, 4대 그룹 중에서 가장 뒤늦게 출발한 기업이 현대다. 반면 북한은 일본 기업, 조총련 기업, 대우를 비롯한 한국 기업 등을 물리친 ‘빛나는’ 전과를 가지고 있다.

이같은 우려는 이미 현실화하고 있다. 금강산 개발 독점권을 둘러싸고 현대그룹과 금강산국제그룹이 보여준 모습은 쓴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현대는 6년 간의 독점 개발을 위해 약 9억 달러를 ‘보험료’로 지급하겠다 하고, 금강산국제그룹은 김일성의 친필 사인이 들어 있는 합의문까지 공개하며 자신들이 적자(嫡子)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참고가 될 만한 사례를 하나 소개하겠다. 북한은 지난해 서해에서 대규모 매장 가능성이 높은 해저 유전이 발견되었다며 합작선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줄을 댔다. 그런데 당시 필자가 직접 눈으로 확인한 유전 개발 관련 독점적 위임장은 무려 3장이었다. 한마디로 북한 당국의 ‘독점’은 여럿이 같이 할 수 있다는 의미다.

우리는 현실적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한,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유도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한민족과 동북 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이룩하는 최선의 길이라는 점에는 이론이 있을 수 없다. 그를 위해 정경 분리 정책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유도하는 것은 주관적 의지와 희망만으로는 안된다. 상처투성이인 선배들의 경험과 교훈으로부터 북한의 실정을 철저히 파악한 후 매우 구체적이고 세밀한 대응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 설령 철저히 준비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무수한 우여 곡절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단기간 내의 달콤한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햇볕 정책의 진정한 위기는 일부 보수 세력의 반발이 아니라 이 대결에서 별 성과를 내지 못했을 때 찾아올 것이다. 지금 뜻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작업은 ‘하면 된다’는 섣부른 낙관이 몰고올 그같은 불행한 결과를 예방하기 위해 모든 지혜를 동원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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