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맛'에 ' 옛 맛' 읽어가는 연길 조선족
  • 연길·서정경 (자유 기고가) ()
  • 승인 1995.08.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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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수입 늘자 소비 흥청… 빈부차·범죄 문제 갈수록 심각
특히 인구 집중에 따라 주택이 부족해지자 주택 임대료가 상승하여 서민들의 생활에서 주거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아지고 있다. 현재 12평 남짓한 주택의 연 임대료는 공기업 근로자 연봉의 절반 가까이 되는 2천위안 정도이다.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고 보자는 심리가 팽배해 있는 듯한 연길에서는 상거래 질서와 상도덕이 사라지고 있다. 따라서 이곳에서 가짜 상품을 산다든지 여행사의 바가지 여행 상품에 속아 불쾌감을 가지고 돌아가는 관광객이 늘어나고 있다. 또 유흥·위락 시설이 성업하면서 그 일부는 퇴폐 영업도 서슴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득 격차와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서 폭력과 납치, 강도 살해 사건 등 사회 병리 현상도 늘어나고 있다. 이는 현지인은 물론 관광객이나 투자자의 심리를 위축시키는 중대한 사회 문제이다. 때로 한국 관광객을 납치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조선족 청년이 범죄에 가담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연길은 밤에 혼자 거닐기 무서운 도시가 되어 버렸다.

과거의 생산도시 기능 거의 상실

연길은 이미 건강한 생산 도시의 모습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중소기업진흥공단 북경사무소에서 주로 한국 기업과 중국 기업의 합작을 주선하는 업무를 하는 연길 출신의 한 직원은 “고향인 연길의 기업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으나 그럴 만한 기업이 없어져 안타깝다”고 털어놓는다. 모두들 어느 정도 자본이 생기면 유흥업에 투자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조업 등 생산적인 경제 활동이 축소되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오늘의 연길은 사회주의 국가에 있는 한 도시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요소들이 중첩된 도시로 비친다. 연길은 급격한 도시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구 밀도 급증, 주택난, 교통난, 환경 오염, 주민의 경제 계층 분화와 같은 여러 문제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이제 현지 주민들도 그러한 문제점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소비적인 도시 문화를 가장 큰 문제로 걱정하고 있다. 연변 텔레비전방송국 해외부 권병록 기자는 “관광 소비 도시로 자리잡아 소비 문화가 판치고 향락 산업이 번창하는 연길의 장래가 걱정된다”고 말했다.

소비 향락 도시로 치달아온 연길을 조선족의 교육·행정·문화 중심 도시로 회복시키려는 노력이 앞으로 확산될 것으로 기대된다. 여기에는 현지 주민들의 인식 변화와 노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겠지만, 연길 문제에 부분적으로 원인을 제공해온 한국 관광객과 한국 기업의 행태 또한 개선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백두산 관광 길의 길목으로 잘 알려진 중국 길림성 연길 시에서 택시 기사에게 연길이 어떤 도시냐고 물었다. 50대인 한족(漢族) 택시 기사는 한마디로 ‘사람 많고 차 많은 곳(人多車多)’이라고 대답했다. 중국 국무원이 85년 갑급 개방 도시로 비준할 때만 해도 조용한 변방 도시였던 연길은 가속도가 붙은 물체처럼 급속하게 도시화 과정을 겪어 왔다. 순박한 삶의 체취가 묻어나던 몇해 전까지의 풍경은 오간 데 없이, 급격한 자본주의적 도시화와 그에 편승한 야박한 배금주의에 물든 도시로 변해 가고 있는 것이다.

한·중 수교 이후 도시화 가속

여름철로 접어들면 연변에서 나오는 일간지에는 백두산 관광 여행 상품 광고가 하루도 빠짐없이 커다랗게 실린다. 해마다 6월 말부터 9월 초까지는 백두산의 눈이 거의 녹아 관광이 가능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백두산에 이르는 길은 몇 가지가 있지만 역시 연길 시를 거치는 행로가 가장 인기 있다. 우리나라와 중국이 수교한 92년 이후 경공업 도시이던 연길이 백두산 관광 도시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한국 관광객이 뿌리는 돈은 연길 시의 주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이와 함께 한·중 수교 이후 조선족의 한국 왕래가 잦아졌다. 연길의 한쪽에서는 한국에 다녀와 한몫 잡은 사람들의 성공담이, 또 한쪽에서는 서둘러 한국에 가려다 사기를 당해 고생한 실패담이 떠돈다. 성공담이란 결국 친지 방문·산업 연수 등 다양한 통로를 통해 한국에 가서 목돈을 마련해 돌아온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현지 조선족이 1년 동안 한국에서 일해 우리 돈 천만원을 모아가지고 온다면, 그 돈은 연길의 공기업에서 일하는 근로자 평균 연봉의 스무 배 가까이에 달한다. 이렇게 국경을 넘으며 바뀌는 돈의 가치는 돈에 대한 사람들의 가치관을 혼란시키고 그 혼란된 가치관은 과도한 소비 행태로 나타났다.

연길의 변화에 가속도를 붙여준 힘은 바로 이같은 두 가지 요인, 즉 백두산 관광객의 행태와 현지 조선족의 경제 여건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한·중 수교가 가져온 부산물이기도 하다.

연길 중심부의 단층 연립주택지 대부분은 이미 고층 건물로 재개발이 이루어져 도시 경관이 최근 1, 2년 사이에 몰라보게 바뀌었다. 그 건물들 사이로 난 도심의 거리는 한복 차림인 현지 조선족과 등산복 차림인 한국인 관광객이 묘한 대비를 이루며 늘상 붐비고 있다. 거리 양켠에는 현란한 간판을 내세운 음식점·술집·가라오케·다방·미용실·옷가게·사우나 따위가 줄지어 있다. 대다수 유흥업소에는 24시간 영업을 한다는 네온사인이 내걸려 있다.

주요 중심가의 하나인 ‘해방로’는 낮과 밤의 모습이 전혀 다르다. 낮에는 연길 최대의 백화점이며 도시의 랜드 마크인 연길제일백화점(百貨大樓)으로 이르는 교통로이지만, 밤에는 차량 교통이 통제되어 약 4백m의 거리가 야시장으로 바뀐다. 야시장에는 포켓볼·빙고 등 사행성 오락장들과 포장마차촌, 각종 의류 판매 노점들이 줄비하다. 여기서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한 50대 아주머니의 하루 매상은 4백~7백위안(4만~7만원)으로 이 지역 공기업 근로자의 한달 평균 월급을 훨씬 웃돈다.

연길은 인구 기준으로 볼 때 맥주 소비량과 가라오케·사우나·미용실·택시 수에서 중국 도시 가운데 수위를 차지한다. 연길이 보유한 이러한 기록은 이 도시의 성격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유흥업소를 비롯한 서비스 업종은 거의 대부분 조선족이 운영하고 있다. 백두산 관광이 2개월 남짓한 기간에 한정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날로 번창하는 이들 서비스업이 관광객들만을 고객으로 하는 것이 아님은 쉽게 알 수 있다. 한 예로, 1년 전 1백70여 석을 갖추고 개업한 대형 음식집 ‘이화원’의 경우, 관광철인 여름에는 손님의 70% 정도가 한국 관광객이지만, 그밖의 계절에는 현지인이 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한다. 현지인의 씀씀이가 그만큼 커진 것이다. 소득이 늘어서 소비를 많이 하는 경우도 있지만 개인적인 소비에 공금을 쓰는 경우도 많아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공기업 근로자들이 월급만으로 늘어난 소비 규모를 충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중국 전역에서 공금 횡령이 커다란 문제로 부각되자 최근 중국 정부는 공금 사용을 엄격히 통제하기 시작했다. 연길 시는 이와 같은 중국 소비 구조의 모순이 매우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는 곳이다.

연길은 붉은 기와와 벽돌로 된 단층 연립주택과 상자형 ‘층집(아파트)’, 재래 시장과 고급 백화점, 우마차와 벤츠 승용차가 나란히 공존하는 곳이다. 그만큼 소득 수준이 고르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연길에는 조선족과 한족이 거의 같은 비율로 살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한족보다 조선족의 소득 수준이 높다. 자본을 마련한 조선족들은 수익성이 좋은 서비스업에 주로 진출함으로써 빈익빈 부익부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 중국의 한 도시에서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모순이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빈부 격차가 커지면서 도시 내에서도 위화감이 조성되고 있다. 연길과 이웃한 용정 근교에서 농사를 짓다가 좀더 나은 수입을 올리려고 연길로 온 지 1년쯤 된 택시 기사 김순만씨(42)는 “월 6백위안을 받아 농사를 지을 때보다 소득은 늘었지만 연길에서 그 정도의 수입으로는 여가 시간에 할 것이 없다. 저녁 때는 텔레비전이나 볼 뿐이다”라고 푸념한다. 도시 생활이 소비 중심으로 바뀜에 따라 소득이 늘어도 활동의 폭은 좁아진 것이다. 그는 “연길 사람들이 대개 잘사는 것 같지만 생활이 구차한 사람도 많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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