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 일 관계, 제자리 찾을까
  • 도쿄·蔡明錫 편집위원 ()
  • 승인 1998.03.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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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 김종필 · 박태준 '70년대 트리오' 출현, 기대 · 우려 교차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을 닷새 앞둔 지난 2월20일 오후 6시. 도쿄 데이코쿠 호텔 히카리노 마에서 때이른 ‘김대중 선생의 대통령 취임식을 축하하는 모임’이 열렸다. 김대중 대통령과 부인 이휘호 여사의 대형 사진이 걸린 연회장에는 25년 전의 납치 사건을 전후해 한민통과 김대중구출위원회에서 활약했던 정재준·김종충·조활준·김성호 씨가 모여 납치 사건·사형 판결 등을 떠올리며 감개 무량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본측에서는 사회민주당의 도이 다카코(土井たか子) 당수, 덴 히데오(田英夫) 홍보위원장이 참석했고, 사키가케의 다케무라 마사요시(武村正義) 전 대장성 장관, 자민당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총재의 모습도 보였다. 문화계 인사로는 소설가 오다 마코토(小田實) 씨 등이 눈에 띄었다. 이들은 모두 73년 8월에 일어난 김대중씨 납치 사건과 80년 9월 내란죄로 사형 판결이 내려진 이후 김대중씨 구출 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인사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아직도 김대중씨가 지금까지 살아 남아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이날 연회장에는 김대중씨의 대통령 취임을 가장 기뻐해야 할 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한 사람은 월간지 <세카이(世界)> 편집장이었던 야스에 료스케(安江良介) 씨이고, 또 한 사람은 자민당 AA(아시아· 아프리카)연구회를 이끌어 왔던 우쓰노미야 도쿠마(宇都宮德馬) 전 의원이다.

야스에 씨는 미노베 료기치(美濃部亮吉) 도쿄도(都) 지사의 비서를 거쳐 72년 <세카이> 편집장으로 취임한 직후 김대중씨를 만나 일본 정계에 인맥이 거의 없었던 김대중씨에게 당시의 사회당과 자민당 AA연구회 의원들을 소개해 주었다. 그는 또 ‘김대중씨 납치 사건 진상 규명위원회’와 ‘김대중씨 구출 일본 연락회’에서 중심 역할을 해온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김대중씨 당선 소식을 들은 지 20일도 채 안된 지난 1월6일 자택에서 타계했다.
<국민 법정의 고발 고백>이라는 책에 따르면, 자민당 AA연구회의 리더 우쓰노미야 의원은 김대중씨가 실종된 것을 알고 즉시 경찰청 출신인 고토다 관방성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일본 정부의 개입을 요청했다. 그의 적극적인 구조 요청이 없었더라면 납치 사건의 전개가 달라졌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일본 정계에서 김대중씨의 가장 든든한 지원자였던 우쓰노미야 의원도 이제 아흔을 넘은 고령이다. 거동이 불편해 정계를 은퇴한 그 역시 김대중 대통령 탄생 소식을 듣고 한없이 기뻐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인맥은 자민당의 비주류, 옛 사회당 계열, 그리고 이른바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이다. 오랜 야당 생활로 자민당의 주류인 보수 우파 정치인들과는 친분을 쌓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2월25일 서울에서 열린 취임식에 참석한 일본 정치인들의 면면을 보면 김대중 정권의 일본 인맥이 크게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취임식에 참석한 일본 정치인은 모두 20여 명. 그중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전 총리, 사회민주당의 도이 당수, 덴 홍보위원장, 고노 전 자민당 총재 등 5명은 정식으로 초대받고 참석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도이·덴·고노 씨의 개인적인 친분, 다케시타 씨가 한·일 의원연맹 회장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네 사람이 초대를 받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자민당 보수 우파의 기둥인 나카소네 전 총리가 정식으로 초대장을 받고 참석한 것은 다소 의외일 수 있다.

실은 김대중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 뒤 처음 통화한 일본의 정치인이 바로 나카소네 씨였다. 대통령 선거 개표 작업이 거의 끝나가던 지난해 12월19일 오전 7시, 김당선자는 나카소네 씨와 통화하던 박태준 자민련 총재의 소개로 전화 인사를 나누었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총리의 통화는 그로부터 다섯 시간 뒤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일본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은 이러한 일화를 들어가며 김대중 정권의 대일 정책은 자민당 보수 우파 쪽에 두터운 인맥을 갖고 있는 자민련의 김종필 명예 총재와 박태준 총재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양국간 새로운 공통 분모 찾기 절실

따라서 김영삼 정권 때 최악의 상황에 빠진 한·일 관계는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곧 정상으로 되돌아 가리라는 예측이 우세하다. 우선 김대중 대통령 자신이 식민지 통치와 납치 사건을 경험하면서 일본인과 일본 정치의 속성을 속속들이 겪었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 명예 총재는 자민당 우파와 손잡고 김대중 납치 사건의 ‘정치적 해결’을 이끌어 낸 주인공이다. 박태준 총재는 포철 회장과 한·일 의원연맹 회장을 지내면서 일본의 정·재계에 폭넓은 인맥을 형성해 왔다. 그가 김영삼 정권의 박해를 피해 일본에서 유랑 생활을 했던 것도 바로 일본 정·재계에 폭넓은 인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나 일본을 잘 아는 ‘70년대 트리오’가 전면에 등장했다고 해서 환영 일색인 것만은 아니다. 장은종합연구소 후카가와 유키코(深川由起子) 주임연구원은 “양국 외교가 70년대 공화당 정권 때처럼 인맥과 파벌에 치우칠 가능성이 없지 않다”라고 지적하면서, ‘한·일 유착’이 재연될 소지도 있다고 말했다. 게이오 대학의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 교수는 공로명 전 외무부장관과의 대담 (<디스 이스 요미우리> 3월호)에서 김대중 정권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함께 지적했다. 긍정적인 면은 ‘70년대 트리오’가 한·일 관계의 과거와 한·일 협력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김영삼 정권 때처럼 극단으로 치닫지는 않으리라는 점이다. 부정적인 면은, 외교 현안이 양국의 외교 당국보다는 정치인 손에서 주물러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오코노기 교수는 70년대의 인맥 외교가 부활하면 두 나라 젊은 세대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영삼 정권의 실패도 반면교사(反面敎師)이다. 그는 하시모토 총리와의 개인적인 친분, 즉 정상 외교를 너무 과신한 나머지 어업협정이 파기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일본을 속속들이 안다고 자부하는 70년대 트리오도 똑같은 함정을 만날 수 있다. 정상회담만 믿다가는 김대중 납치 사건 진상 규명 문제, 종군 위안부 보상 문제와 같은 뇌관이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른다.

오코노기 교수에 따르면, 양쪽의 반일(反日)감정과 혐한(嫌韓) 감정이 점화된 것은 ‘반공’이라는 공통 분모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일 간에 새로운 공통 분모를 서둘러 찾지 못한다면, 일본을 잘 아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다고 해서 한·일 관계가 극적으로 전환되리라는 기대는 환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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