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금융기관 · 부동산, 헐값에 팔린다
  • 도쿄·蔡明錫 편집위원 ()
  • 승인 1998.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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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자본, 금융·부동산 시장 점령… 불량 채권까지 ‘사재기’
일본의 거품 경제가 절정을 구가하던 80년대 후반 일본 기업들은 미국의 부동산과 기업을 마구잡이로 사들였다. 미국의 심장이라던 록펠러 센터 빌딩, 미국의 영혼이라던 컬럼비아 영화사…. 당시 미국 언론들은 이같은 가미가제식 매수 공세를 ‘제2의 진주만 공격’에 비유하면서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지금, 사정은 역전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외국 자본들이 대대적인 역습을 시작한 것이다.

지난 4월18일 도쿄의 국제 포럼이라는 이벤트 회사에서 2천여 명이 참석한 매머드 입사식이 열렸다. 불황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일본 기업들은 엄두도 못낼 거창한 입사식이었다. 이 매머드 입사식을 주관한 회사는 다름아닌 미국 최대 증권회사 메릴린치였다. 메릴린치는 지난해 말 도산한 야마이치 증권 사원 2천여 명을 스카우트해 6월께 가칭 메릴린치-일본 증권을 설립할 예정이다. 이 회사는 7월부터 야마이치 증권 지점 33개를 이용해 개인 고객을 상대로 영업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매머드 입사식에 참석한 2천여 명은 도산한 야마이치 증권 전직 사원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인원이다. 그들의 나이는 20대에서 5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미국계 회사일망정 다시 직장을 얻었다는 안도감에서 입사식에 참석한 그들의 표정은 더없이 밝아 보였다.

미국 투자 은행, 맨션 1천2백 호 사들여

그러나 그들의 안도감이 입사식 후에도 지속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메릴린치-일본 증권 경영진이 종신 고용과 연공 서열에 익숙한 전직 야마이치 증권 사원들에게 끊임없이 ‘탈(脫) 야마이치 정신’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마이치 증권 시대의 봉급 체계가 보장되는 것도 앞으로 2년이 고작이다. 그 다음부터는 철저한 능력급 제도인 연봉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메릴린치 증권은 야마이치 증권 계열의 야마이치 투자신탁 위탁 회사를 일본의 산와 은행과 공동 출자로 인수해 운영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메릴린치는 다이와·산와 은행 같은 시중 은행을 매수하는 것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메릴린치와 일본 현지 법인인 메릴린치 증권이 지난해 10월 도쿄 증권거래소의 주식 거래 매매량에서 일본의 노무라·다이와·닛코 증권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선 것을 생각한다면, 일본의 증권·금융 시장에서 메릴린치가 차지하는 비중은 앞으로 더욱 높아질 추세이다.

그런 점에서 메릴린치야말로 제2의 점령군, 즉 일본을 집중 공략하고 있는 미국 금융 집단의 선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난 2월 도호 생명과 합작으로 생명보험회사를 설립한다고 발표한 미국의 GE 캐피탈, 지난해 도산한 닛산 생명 매수를 검토하는 미국의 AIG(아메리칸 인터내셔널 그룹) 등도 그 후속 부대로 일본 상륙을 준비하고 있다. 또 스위스 은행이 일본장기신용은행과 자본 참여·업무 제휴를 해 합작 증권회사를 설립할 예정이며, 프랑스의 소시에테 제너럴 증권이 야마이치 투자고문회사를 매수하는 등 유럽 자본의 ‘일본 사재기’도 활발하다.

거품 경제 시절에 비해 절반 이하 가격으로 폭락한 일본의 부동산도 점령군의 둘도 없는 사재기 표적이다. 미국의 투자 은행 모건 스탠리는 지난 3월말 일본의 부동산 회사 다이쿄로부터 도쿄의 5층짜리 맨션을 사들였다. 이로써 모건 스탠리가 다이쿄로부터 사들인 부동산은 7개 도시의 맨션 약 1천2백 호에 이르게 되었다. 1천2백 호를 사들이는 데 들어간 금액은 약 1백20억엔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장부 가격의 약 30%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다이쿄가 이처럼 헐값에 보유 맨션을 처분한 것은 부동산 경기가 침체해 1조1천4백억엔에 달하는 금리 부담을 감당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미국의 골드먼 삭스 증권, 세큐어드 캐피탈과 같은 투자 회사들은 일본의 금융기관·부동산 회사들이 보유하고 있는 불량 채권을 적극적으로 매입하고 있다. 최근 1년간 외국 자본이 사들인 불량 채권은 1조엔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올해 안에 40여 외국계 회사가 이 시장에 뛰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하반기 이후 도쿄 도심부의 임대 사무실 가격은 보합세이다. 이는 외국계 회사들의 활발한 일본 진출에서 말미암는 기현상이다. 예컨대 골드먼 삭스 증권회사는 도쿄의 한복판 아카사카 아크 모리 빌딩에 1만㎡에 달하는 사무실을 차리고 있는데, 업무가 확대되어 곧 사무실 면적을 3배로 늘릴 것이라고 한다.

외국 자본들이 이처럼 일본의 부동산과 불량 채권을 사들이고 있는 것은, 91년 이래 연속 하락하고 있는 일본의 부동산 가격이 밑바닥을 치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매입하고 있는 부동산은 거품 경제 시절에 비하면 턱없이 하락한 값이다. 예컨대 금융기관 담보 가격의 10분의 1 이하로 폭락한 부동산이 그들이 노리는 ‘쇼핑 리스트’이다. 그렇다면 일본 땅에서 외국 자본들은 과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게 될 것인가. 그들도 일본 기업들이 80년대 후반에 펼친 제2의 진주만 공격처럼 실패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외국 자본, 부동산 투자로 시세·환 차익 노려

미국에 대한 일본 기업들의 부동산 투자는 88년 사상 최고인 1백65억달러를 기록했었다. 미쓰비시 부동산이 록펠러 센터 빌딩을 매수한 가격은 1천2백억엔. 일본의 토지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던 때였으므로 미쓰비시 부동산은 시가보다 30% 정도가 높은 이른바 ‘저팬 프라이스(Japan Price)’에 록펠러 센터 빌딩을 떠안은 격이 되었다.

그후 블랙 먼데이의 주가 폭락이 일어나면서 미국의 경기 후퇴와 함께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자 투자 수익률이 악화해, 미쓰비시 부동산은 큰 손실을 감수하고 록펠러 센터 빌딩을 재매각했다. 미쓰비시 부동산이 그 여파로 기록한 적자는 96년 3월까지 약 1천2백억엔. 일본의 토지 가격이 오르니까 미국도 오를 것이라고 오판한 대가가 바로 엄청난 적자였다.

그러나 지금 일본의 부동산과 불량 채권을 사재기하고 있는 외국 자본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우선 일본의 부동산 가격이 7년째 내리막길을 걷고 있어 현재 가격이 거의 밑바닥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거기에 엔화 가치가 하락해 일본의 부동산 투자는 장기적으로 볼 때 시세 차익과 환 차익을 누리는 꿩 먹고 알 먹는 투자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외국 자본들이 일본의 부동산을 마구잡이로 사들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의 모건 스탠리는 부동산을 매입하기 전에 입지 조건, 구조, 관리 체제, 입주자의 임대료 지불 상황과 수돗물의 수질, 지역 산업 구조의 특징, 실업률 등을 꼼꼼히 조사하여 몇년 뒤의 매각 예상 가격을 면밀히 계산한다.

말을 바꾸면 일본의 부동산 회사들처럼 단순한 시세 차익을 위해 부동산을 사재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그들은 부동산을 활용할 경우의 수익률까지 고려하는 철저한 수익 환원법으로 일본의 부동산 가치를 판정하는 것이다.

외국 자본의 선봉 격인 메릴린치도 성공의 연속은 아니었다. 72년 일본에 처음 진출한 메릴린치는 거품 경제가 붕괴된 93년 요코하마·고베·교토 지점을 폐쇄하고 개인 영업 부문에서 철수를 단행한 적이 있다. 이번에 야마이치 증권 사원들을 대거 채용한 것은 개인 영업 부문을 다시 부활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메릴린치의 데이비드 코만스키 회장은 일본의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새로 설립될 메릴린치-일본 증권이 어디까지나 일본 기업이라고 강조하면서도, 경쟁 상대로 일본의 노무라 증권과 다이와 증권을 꼽았다. 그의 이런 발언에는, 언젠가는 그들을 제치고 일본 증권업계의 정상을 석권하겠다는 야심이 배어 있다.

일본판 빅뱅이 시작됨과 함께 외국 자본의 일본 사재기는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보면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직후처럼 일본의 금융·부동산 시장이 외국 자본에 재점령될 날이 멀지 않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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