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대통령선거, 1등 죽이기' 골몰
  • 마닐라·金鎭華 편집위원 ()
  • 승인 1998.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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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대선, 지지율 1위 에스트라다 ‘죽이기’ 가열
석달 전부터 필리핀 전역에는 흑·백·홍 삼색 국기가 나부끼고 있다. 백년 전 6월21일, 3백27년 동안의 스페인 식민 통치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이 날을 경축하는 깃발들은, 백년 만에 찾아온 가뭄에 불타는 민다나오 들판에서도 어김없이 펄럭이고 있다. 한반도와 맞먹는 크기인 민다나오 섬은 7개월째 계속된 가뭄으로 논 80만㏊가 타들어가고 있다.

경축과 재앙이 겹친 가운데 필리핀은 5월11일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 한때 80명이 난립했던 후보는 10명으로 압축되었고, 그 중 3명이 각축하고 있다.

집권 라카스(LAKAS)당의 조 데 베네시아 하원의장(61). 라모스 대통령의 후계자로 ‘지명’된 그는 카리스마가 없는 밋밋한 정치인이다. 부정부패로 치부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으나 막강한 조직과 재력, 정부의 뒷받침이 강점이다.

자유당(LP)의 알프레도 림(68) 마닐라 시장. 마닐라 경찰청장 출신인 홀아비 림은 청렴 강직한 ‘법과 질서’의 사나이로 통한다. 카톨릭 지도자 신 추기경과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지원받고 있으나, 3인이 모두 중국계라는 지적과 당 조직력이 약한 것이 흠이다.

람프(LAMMP)당의 에랍 에스트라다 부통령(56). 서민층으로부터 광범한 지지를 받으며 여론조사에서 1위를 고수하고 있으나, 학력·음주 습관·도덕성·지적 능력 등 여러 면에서 숱한 모함과 비난을 받고 있다. 그는 항상 졸린 듯 한쪽 눈을 반쯤 감고, 토론에 나서기를 꺼리는 영화 배우 출신이다.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지지율은 베네시아 12%, 림 16%, 에스트라다 32%로, 에스트라다가 두 후보를 크게 앞서고 있다.

에스트라다는 필리핀 정치의 이단아이다. 그의 출신 배경과 지지 기반, 그리고 높은 지지율이 필리핀 대선전을 긴장과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다. 가문과 학력을 중시하는 필리핀 정가에서 에스트라다가 이단아로 불리는 이유는, 대학을 중퇴한 영화 배우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서민층의 인기에 힘 입어 상원의원을 거쳐 부통령에 이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지지 기반은 도시 빈민·노동자·농민 등 인구의 80%에 달하는 서민 대중이다.

그는 과연 서민의 친구인가? 정적들은 그가 60년대 영화에서 약자를 돕는 도시의 로빈후드 역을 맡아 얻게 된 허상의 인기를 누리고 있을 뿐, 실제로는 서민과 거리가 멀다고 주장한다. 에스트라다에게는 호색가·알콜 중독자·노름꾼·마약 복용자·무식꾼 등 온갖 험담이 붙어 다닌다. 그럼에도 그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를 유지하고 있다. “똑똑하고 교양 있고 가문 좋은 정치인들이 극빈자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인가. 수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 처지는 달라진 것이 없다. 무식하고 모자라는 대통령이면 어떤가? 가난한 약자를 영화 속에서나마 돕고 동정하는 시늉이라도 해 주는 사람이 우리의 친구다”라고 한 택시 운전기사는 말했다.

에스트라다의 독주를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세력이 도처에 있다. 그 선봉장은 필리핀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카톨릭계. 86년 아키노 여사와 함께 ‘반 독재 시민 혁명’을 이끈 신 추기경은 에스트라다를 대통령으로 뽑아서는 안된다고 역설한다. 그는 최근 텔레비전 대담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제시했다. “첫째, 그는 대학 교육을 끝내지 않았다. 둘째, 도덕적으로 여자와 마약 관계 등 문제가 많다. 셋째, 경제 지식이 빈약해 국제 외교를 할 수 없다….” 신 추기경과 공명선거성직자위원회(PPCRV)는 전국 교구에 보낸 교서에서 ‘문제 인물’에게 투표하지 말 것을 강력히 권했다. 문제 인물은 물론 에스트라다 후보를 일컫는다.

라모스 대통령도 카톨릭 교계 못지 않게 에스트라다를 낙선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 부통령은 매우 병든 사람이다. 그는 우리가 추진해 온 경제 개혁을 이어갈 두뇌가 없는 사람이다”라고 깎아내렸다. 지난 2월 런던에서 열린 아시아·유럽 정상회의에 참석할 수 없게 된 라모스 대통령은, 부통령 에스트라다를 보내지 않고 상원의장을 대신 파견하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부통령은 영어를 잘 못할 뿐 아니라, 세계 정상들과 토론하며 국제 정세를 논할 실력과 품위를 갖지 못한 사람이다.”
부정 투·개표 준비중?

최근 대선 후보 8명이 참가한 합동 텔레비전 토론회는 정책 토론의 장이 아니라 ‘에스트라다 죽이기’ 경연장이었다. “유권자 여러분, 당신보다 아이큐가 낮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을 수 있겠습니까?” “도박을 즐기는 사람이 나라를 맡으면 국고가 바닥 나는 줄도 모르고 있을 것이 아닙니까.” “머리에 든 것이 없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필리핀은 극동의 어느 나라처럼 될 겁니다.” “에스트라다에게 세 살 먹은 애가 있다지요. 어머니는 누군가요?” 눌변인 에스트라다는 이 토론회에 불참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의 당선만은 막아야 한다는 ‘구국의 사명감’은 결국 라모스 정부로 하여금 무슨 수를 찾을 수밖에 없게 강요할 것이며, 유일한 수는 ‘닥닥 바와스(dagdag bawas)’라는 것이 중론이다. 타갈로그어로 ‘더하기 빼기’라는 뜻인 이 단어는, 한국의 자유당 시절에 선거 때마다 판을 쳤던 올빼미표·피아노표·대리투표·바꿔치기를 합친 것이다.

“군부가 나서 에스트라다 당선 막아라”

필리핀의 시골에서 정전은 흔한 일이다. 선거 때마다 정전 횟수가 잦은 것 역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번에도 ‘닥닥 바와스’와 정전이 긴밀한 동반 관계를 유지하리라는 것이 중론이다. 일부 지식층마저 “닥닥 바와스를 해서라도 에스트라다의 당선을 막아야 한다. 그가 당선되면 이 나라는 파산이다. 닥닥 바와스가 안되면 군부라도 나서야 한다”라고 공공연히 말한다.

에스트라다는 만일 부정 개표가 자행될 경우 서민 대중의 유혈 봉기를 각오하라고 정부에 강력히 경고했다. 원로 언론인 막스 솔리벤은 “현 정국은 없는 자와 가진 자의 대결 양상을 보이고 있다. 거기에는 카톨릭의 지나친 정치 개입에 그 책임의 일단이 있다. 카톨릭이 노골적으로 특정 후보를 지지 또는 반대함으로써 정국을 주도하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지금은 마르코스 장기 독재 때와는 다르다”라면서 신 추기경을 비판했다. 젊은 지식층의 지지를 받는 로코 후보 역시 “카톨릭 교계가 에스트라다를 무차별 공격함으로써 빈민층을 더욱 소외시키고 있다”라고 비판한다.

이번 대선의 특징은 분명한 이슈가 없다는 점이다. 86년에는 아키노의 민주화 투쟁, 92년에는 ‘누가 아시아의 걸인 필리핀의 경제를 살릴 것인가’가 뜨거운 이슈였다면, 98년은 인물론에 그치고 있다. 인물론을 촉발한 것은 물론 에스트라다라는 걸물이다. 그의 등장은 필리핀 정국을 딜레마에 빠뜨렸다. 라모스 정부는 민주주의의 기본인 수(數)의 판단에 승복할 것인가? 아니면 ‘악동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 닥닥 바와스에 도움을 청할 것인가? 카톨릭은 승리한 탕아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수많은 순진한 양떼를 위해 닥닥 바와스에 눈을 가릴 것인가? 서민 대중은 그들의 소박한 감정과 이익을 대변할 자를 ‘똑똑한 사람들’이 결정하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위해 봉기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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