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엔화 '길고 험한 길'
  • 도쿄·蔡明錫 편집위원 ()
  • 승인 1998.06.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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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율 주기, 엔저 22년→엔고 24년…최근의 엔저 “수십년 지속될 듯”
‘미스터 엔’으로 널리 알려진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대장성 재무관은 일본의 국제통화문제연구소가 최근 개최한 한 심포지엄에서 ‘엔화 강세의 흐름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사카키바라 재무관이 일본의 외환 정책을 주무르는 최고 책임자라는 점에서 그의 엔고 시대 종식 발언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일본의 엔은 49년 미국 점령군에 의해 달러당 3백60엔에 책정되어 71년 달러와 금과의 태환을 정지한 ‘닉슨 쇼크’가 일어날 때까지 20여 년간 달러당 3백60엔 체제, 즉 엔저 시대가 지속되었다.

일본은 이 엔저를 이용하여 자동차·전기 등과 같은 수출 지향 기계·제조 공업을 중핵으로 하는 산업 구조를 구축했다. 대신 농업·유통업·금융업과 같은 생산성이 낮은 산업을 보호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같이 왜곡된 산업 구조가 지금 일본 경제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후 엔은 변동환율제도와 플라자 합의를 거치면서 일관되게 엔고 경향을 보이다가 95년 4월에는 달러당 79엔75전 선까지 치솟았다. 24년 간에 4배 이상으로 엔 가치가 상승한 것이다.

일본 정부의 엔 방어 노력 ‘물거품’

이렇게 보면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후 22년 간 안정된 엔저 시대를 구가한 뒤 24년 간은 수직적인 엔고 시대를 경험한 셈이다. 그렇다면 최근의 엔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일본의 한 경제 전문가는 앞서와 같은 주기 분석을 통해 일본이 다시 장기적인 ‘엔저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분석한다. 앞으로 수십 년간 엔이 다시 약세를 면치 못하리라는 것이다. 사카키바라 재무관이 엔고 시대 종식을 선언한 것도 최근의 엔저 기조가 단기간에 종식될 성질이 아니라고 지적한 것이다.

사실 최근의 엔은 국제 금융 시장 관계자들이 매력을 느낄 만한 재료가 거의 없다. 대외적으로는 인도·파키스탄의 잇단 핵실험으로 핵 확산 위험성이 커져 ‘유사시에 강한 달러’가 다시 선호되고 있다. 게다가 한국·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지역의 경제가 회복되려면 적어도 5∼10년은 걸린다는 예측이 국제 경제 전문가 사이에 우세하다.

일본의 8대 은행이 이 지역에 융자한 금액은 현재 약 12조7천억엔에 이른다. 만약 이같은 막대한 융자액이 아시아 경제 위기로 말미암아 부실 채권으로 변할 경우 일본의 금융 시스템은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최근의 엔저 기조는 대외적으로 보면 이같은 아시아 경제 사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엔저 현상이 아시아 지역 경제 회복을 지연시키고 이것이 다시 엔저 현상을 유발하는 악순환이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일본 경제의 실력을 나타내는 펀더멘탈스 (fundamentals), 즉 기초적 조건으로 보더라도 최근의 엔저 기조가 단기적인 현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최근 일본 총무청이 발표한 노동력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 4월의 실업률이 53년 이후 처음으로 4%대를 돌파해 4.1%를 기록했다. 같은 달 미국의 실업률이 4.3%였던 것을 감안하면 실업률에서 미·일 역전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이처럼 실업률이 급증하고 있는 것은 8년째 일본 경제를 짓누르고 있는 디플레이션 악순환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일본 경제는 물가가 하락하고 생산·소비·소득이 함께 줄어드는 악순환을 계속하면서, 16조엔 규모에 달하는 종합 경제 대책에도 불구하고 국면을 전환할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엔이 급격히 하락하자 하시모토 총리를 비롯한 일본 정부 당국자들은 ‘일본 경제에 대해서 지나치게 자신감을 잃고 있다’ ‘16조엔의 종합 경제 대책으로 경기 하락 압력에 브레이크가 걸릴 것이다’라면서 자신감을 보였다. 그러나 종합 경제 대책의 효과가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올 가을께부터이다. 이미 사용할 수 있는 카드를 다 써버린 일본 정부가 그때까지 외환 시장에서 엔을 방어할 유효한 수단이라고는 1천2백억달러에 달하는 외환 준비고를 털어넣는 ‘시장 개입’밖에 없다.

그러나 최근 ‘예상하지 못했던 수준’까지 엔이 하락하자 대장성과 일본은행은 시장 개입을 중지하고 말았다. 사카키바라 재무관 역시 시장의 대세에 거역하는 ‘무모한 시합은 하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엔의 국제 신인도가 급격히 실추해 엔저 기조가 계속되고 있는 데에는 일본의 금융 시스템 불안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 발표된 일본내 18대 은행의 3월 말 결산 결과에 따르면, 13개 은행이 경상 적자를 기록했다. 담보 가치가 턱없이 떨어진 부동산과 같은 회수 불가능 채권을 적극적으로 계상하여 약 10조5천억엔을 상각한 결과이다.
엔에 울고 웃는 한국 경제 체질 개선해야

그러나 그 과정에서 드러난 18대 은행의 리스크 관리 채권, 즉 회수 불가능 채권의 잔고는 예상보다 훨씬 많은 21조8천억엔으로 집계되었다. 은행 당국자들은 이렇게 회수 불가능 채권 규모가 늘어난 것은 3개월 이상 이자가 연체된 대출과 대출 조건을 완화한 대출 등을 장래의 위험에 대비해 추가로 포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시장의 반응은 매서웠다. 이렇게 막대한 부실 채권을 지닌 일본의 금융기관들이 정상화하려면 아직도 요원하다고 판단한 외국 자본은 서둘러 엔을 팔아치웠다.

미국의 신용 평가 회사 무디스는 도쿄·미쓰비시 등 다섯 은행의 신용 평가 등급을 즉각 깎아 내렸다. 예컨대 도쿄·미쓰비시 은행은 21등급 중 위에서 세 번째인 Aa2에서 다섯 번째인 A1로, 다이이치·간쿄 은행은 다섯 번째에서 일곱 번째인 A3으로 두 단계씩 강등되었으며, 일본 고쿄·스미토모·사쿠라 은행 등은 각각 한 단계씩 강등되었다. 신용 등급이 내려간다는 것은 그만큼 해외에서의 자금 조달 비용이 상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수익률이 악화하므로 일본 은행들의 경영 정상화는 상당 기간 지연될 가능성이 있다.

일본의 경제 전문가들은 지난 4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금융 빅뱅’도 엔저 현상을 정착시키는 요인으로 보고 있다. 일본 정부는 지난 4월1일 금융 빅뱅 신호탄으로 외환 거래 완전 자유화를 실시했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일본인들의 개인 저축 1천2백조엔 중 상당 부분이 외국으로 빠져나갈 것으로 내다본다.

예컨대 미·일 간의 금리 격차는 현재도 10배에 달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행은 경기 부양을 위해 사상 최저 수준인 연 0.5% 공정 할인율을 다시 인하할 것을 검토 중이다. 반면 경기 과열을 억제하기 위해 미국이 금리를 인상할 경우 미·일 간의 금리 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높은 이자를 찾아 일본의 자금이 미국으로 대량 이동할 것이고, 엔 시세는 더욱 하락할 가능성이 있다. 미·일 간에 금리 격차가 지속되는 한, 엔이 장기적으로 약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사카키바라 재무관은 엔고 시대 종식을 선언하면서도 ‘엔화의 과도한 하락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단서를 달았다. 그렇다면 일본 정부의 처방전은 무엇인가.

첫째는, 미국과 서방 선진 7개국(G7)의 협조를 얻어 적정한 수준으로 엔 시세를 돌려놓는 일이다. 엔저라는 것은 달러에 대한 엔의 약세를 의미하므로, 무엇보다도 미국의 협조가 절대적이다. 그러나 미국은 현재의 호경기에 줄 영향을 우려하여 협조 개입에는 적극적이 아니다. 대신 일본발 세계 공황이 옮겨 붙을 것을 염려해 일본의 경기 부양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튀어나온 것이 ‘미국은 달러당 1백40엔 내지 1백50엔까지 엔저를 용인한다’는 <유에스 앤드 월드 리포트>의 보도이다.

미국이 일본의 전후(戰後) 부흥을 위해 의도적으로 22년 간에 걸쳐 엔저를 용인해 왔던 것을 생각하면, 이같은 보도는 단순한 낭설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엔 시세는 일본의 경기가 회복될 때까지 약세를 면치 못하리라는 가정이 성립한다.

‘엔 국제화’를 통해 엔 시세 안정을 도모한다는 것도 일본 정부가 모색하는 한 방안이다. 엔을 달러와 유로에 다음가는 세계적인 통화로 육성하기 위해 우선 아시아 지역에 ‘엔 경제권’을 설치한다는 이 구상은 그러나 실현에 상당한 시간을 요하는 문제이다.

이렇게 보면 제2의 엔저 현상이 주기적인 현상이든 구조적인 현상이든 앞으로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한국 경제는 엔의 등락에 따라 웃고 우는 체질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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