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쿠데타 · 계엄령 소문은 낭설”
  • 南文熙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8.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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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말 방북한 스티브 린튼 유진벨 재단 이사장/”북한, 한국 새 정부에 대해 판단 보류”
북한 관련 정보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북한 정세와 관련한 긴박한 정보가 흘러나올 때 언론은 어려운 판단을 내려야 한다. ‘특종’을 놓칠 것인가, 위험 부담을 안고서라도 이를 보도할 것인가. 오보를 특종이라고 보도하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사후 확인과 정정 보도를 외면하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 3월 초~중순 북한 정세를 둘러싸고 국내외 언론이 경쟁적으로 보도했던 ‘쿠데타설’ ‘계엄령설’ 등도 마찬가지 사례이다. 이런 엄청난 보도 이후 일언 반구 해명 없이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우연히 같은 시기에 북한을 방문했던 스티브 린튼 유진벨 재단 이사장은 최근 <시사저널>과 가진 인터뷰에서 그런 설들이 터무니없는 오해에서 말미암았다고 밝혔다.

방문 시기와 목적은?

3월17일부터 28일까지였다. 유진벨 재단이 추진하고 있는 북한 결핵 퇴치 사업을 위해 방문했다. 북한에 보낸 약과 물품이 잘 도착했는지 확인한 뒤 분배 문제에 대해 협의하고, 결핵병원과 요양소 실태를 조사했다.

주로 어떤 곳을 방문했는가?

평양 · 평성 · 사리원 · 선천을 둘러봤다.

방북 직전 쿠데타설 또는 계엄령설에 대해 들은 적이 있나?

워싱턴에서 처음 듣고 걱정했는데, 베이징의 북한 대사관에서 평상시와 똑같이 비자를 발급받았다. 북한 관리들도 별로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계엄령 소문에 대한 북한측 인사들의 반응은?

매우 놀라워했다. 그러면서 장군님(김정일)이 총사령관인데, 장군님이 내리지 않은 계엄령을 누가 내릴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북한 사회는 정부와 군과 민간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계엄령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 거의 같은 시기에 미군 유해발굴단이 들어와 작업하고 있다는 얘기를 해주면서 ‘적군’인 미군이 평상시처럼 들어와 활동하고 있는데 무슨 계엄령 이냐고 반문했다.

이런 소문이 난 데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일부 서방 언론들의 보도 내용에 그 해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서방 언론들은 평양에 주재하는 세계식량계획(WFP) 관계자들의 입을 빌려, 북한 외교부 관리가 평상시와 달리 ‘군복’ 을 입고 브리핑에 임했다는 것을 정황 조건으로 제시했는데, 이 과정에 착오가 있었다고 본다.

좀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

지난 3월12일부터 22일까지 북한에서는 정례적인 군사 훈련이 있었다. 이 군사 훈련에는 군뿐 아니라 일반 공무원과 직장인도 참여했다. 이 시기에 이들은 한국의 예비군복 같은 유니폼을 착용하는데, 세계식량계획 관계자들이 이를 군복으로 착각하고 베이징에 긴급 전화를 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던 것 같다.

평양에 주재하는 세계식량계획 관계자들이 군복과 예비군복을 구분하지 못한다니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지 않다. 평양에 거주하는 국제 기구 외국인 주재자들은 수시로 교체된다. 따라서 북한 사정을 제대로 모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규모 군사 훈련이 실시돼 갑자기 시내에 군인이 늘어나고, 일반 공무원까지 군복 비슷한 옷을 입고 나타나자 계엄 상황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또 외국인들은 평양에서 지방으로 갈 때 허가를 받게 되어 있는데, 이번에는 군사 훈련 기간이어서 군사령관으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했다. 이것도 비상 사태라고 착각하게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번 방문 기간에 특이한 상황은 없었나?

그 전에도 군인이나 사회안전부 요원이 주요 길목을 지키고 있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이번 경우에는 몇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평양에서 지방으로 내려갈 때 군부대장으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했고, 지방 소도시에서도 방공 훈련을 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군사 훈련에는 군인뿐 아니라 민간인도 많이 참여했는데, 응원대처럼 길목에서 노래 부르고 나팔을 불기도 했다.

활동에 제약을 받지는 않았나?

그런 것은 거의 없었다. 평양에서 지방으로 내려 갈 때 허가가 이틀 만에 나오기는 했으나, 여행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고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이번 군사 훈련의 성격과 목적은 무엇이었나?

북한 군 관계자들은 매년 해온 정례 훈련이라고 했다. 이번 훈련은 방공 훈련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이는 최근 주한미군의 전투기 편대가 증강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미국이 어떤 장난을 칠지 모르니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민 단속을 위한 내부 교육 목적도 있었던 것 같다.

3월 초의 쿠데타설, 또 군인과 사회안전부 요원 간의 총격설, 권력투쟁설 등에 대해서는?

북한측 관계자들은 쿠데타설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느냐는 표정이었다. 총격전 얘기도 사실 무근인 것 같다. 권력 투쟁 흔적도 발견하기 어려웠다.

최근 남북 차관급 회담이 열렸지만, 한국 정부에 대해 북한이 매우 신중한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 같다.

한국 정부에 대한 판단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즉 새 정부가 과연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할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결론을 못냈다는 것이다. 김영삼 정부 초기에 동맹보다 민족이 앞선다는 등 듣기 좋은 말에 너무 빨리 긍정적으로 반응했던 데 대한 반성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번에는 두고보겠다는 것이다. 또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경직된 관계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오다가 갑자기 새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오자 당황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북한이 언제쯤 결론을 내리리라고 보는가?

가늠하기는 어려우나 올해 농사 작황이 판단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특히 올해는 ‘고난의 행군’이 아니라 ‘고난의 강행군’인데, 이는 자력으로 크게 노력하겠다는 뜻이다. 그 결과에 따라 외부 세계에 대한 북한 쪽의 요구가 달라질 것이고, 남북 대화에 대한 입장도 결정될 것이다.

한국이 어떻게 대응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보는가?

기대한 만큼 반응이 안 온다고 실망하지 말고, 이쪽이 도울 것은 도우면서 꾸준히 기다릴 필요가 있다고 본다.
결핵 퇴치 사업은 잘 진행되고 있는가?

좋은 소식도 있고 슬픈 소식도 있다. 좋은 소식은 북한 당국이 결핵 퇴치 사업에서 유진벨 재단을 공식 협력 단체로 지정했다는 것이다. 또 체계적으로 지원하면 근본적 해결이 가능하다는 전망도 얻었다. 현재 국제적으로 공인된 최첨단 치료 방법에 도츠(DOTSC) 방식이 있는데, 이는 네 가지 치료제를 여섯 달 동안 꾸준히 복용하게 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85% 치료될 수 있으며, 그동안 약 5백명에게 투약한 결과 매우 효과적이었다. 슬픈 소식은 치료제나 기자재가 부족해 일부 환자만 치료하다 보니까, 우리가 마치 환자들의 생사를 결정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북한의 결핵 현황은 어느 정도이며, 한국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공식 통계로는 환자 수가 현재 만 명 정도다. 물론 검사 기구가 부족하기 때문에 앞으로 제대로 검사하면 환자 수가 더 늘어날 수 있다. 도츠 식으로 6개월간 치료하는 데 환자 1인당 한국 돈으로 8만원이면 된다. 다시 말해 8억원이면 만명을 완치시킬 수 있다. 서방 국가에는 결핵 환자가 거의 없어 약품 지원이 어렵고, 유엔에도 예산이 안 잡혀 있기 때문에 실제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은 한국민과 재외 교포이다. 우리와 함께 해도 좋고 따로 해도 좋으나, 어려움을 당한 동포를 도울 귀중한 기회를 외면하지 말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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