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태평양 경제 전쟁’ 음모론 확산
  • 도쿄 蔡明錫 편집위원 ()
  • 승인 1998.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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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음모론 확산… ‘제2의 패전’ 우려도
미국의 공격 경고하는 ‘뉴 맥아더 시나리오’

무디스의 평가가 나온 이후 일본 정치가들은 미국에 대한 공세를 한층 강화하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루빈 미국 재무장관이 일본의 소비세를 3% 수준으로 환원하라고 주문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8일에 열린 연립 여당 책임자회의는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시끄러웠다. 이 자리에서 자민당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간사장은 “소비세 인상 문제로 일본의 정치가들이 얼마나 고생해 왔는지 그들은 모를 것이다. 외국의 재무장관이 참견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야마사키 정조회장도 “감세 요청은 내정 간섭에 해당한다. 심한 불쾌감을 느낀다”라고 반발했다.

“10조엔만 있으면 얼마든지 오라고 해. 니미츠든 맥아더든.” 이것은 얼마 전 자민당 실력자 가지야마 세이로쿠(梶山靜六) 전 관방장관이 한 강연회에서 한 말이다. 니미츠란 태평양전쟁 당시 미국 태평양함대 사령관이고, 맥아더는 미국 점령군 사령관을 가리킨다. 그의 이같은 발언은 요즘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펼치고 있는 이른바 ‘뉴 맥아더 시나리오’ 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뉴 맥아더 시나리오에는 대강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미국이 세계화라는 무기를 들고 태평양전쟁 때처럼 일본에 대한 재진군을 시작했다. 금융 자유화나 규제 완화 같은 것도 그들이 준비한 최신식 무기이다. 이번 전쟁의 사령탑은 펜타곤이 아니라 미국 재무부이다. 태평양 전선에 투입되는 주력 부대는 미국의 대형 금융기관과 신용평가 회사 들이다. 여기에 CNN · <월 스트리트 저널> 같은 미국의 매스컴들이 일본의 위기를 실제 이상으로 증폭시키는 지원 부대로 투입되고 있다.’

그들은 만약 이 전쟁에서 밀리면 일본이 ‘제2의 패전’ 을 맞게 될 것이며, 그 결과 미국의 재점령이 시작되어 경제 식민지나 경제 속국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래서 요즘 그들 사이에 팽배하고 있는 것이 미국을 비롯한 앵글로 색슨계 금융 자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이른바 ‘신양이론(新攘夷論)’ 이다.

미국의 경제 패권주의를 경계하는 것은 유럽도 마찬가지이다. 프랑스 <르몽드>가 발행하는 외교 전문지 <르몽드 디플로매틱>은 작년 8월 ‘제4차 세계대전’ 이라는 대특집을 게재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동서 냉전을 제3차 세계대전이라고 본다면 냉전 붕괴 후 새로운 세계 전쟁, 즉 제4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이 대전은 금융과 경제 시스템의 세계화를 둘러싼 각축이며, 무기는 텔레커뮤니케이션에 의거한 새로운 정보 기술이다.

제4차 세계대전에서 금융의 힘은 냉전 때의 핵무기처럼 도시와 인간을 사멸시키는 위협일 뿐 아니라, 낡은 국가 기능을 해체하고 전세계적인 금융 경제 시스템으로 재편하도록 촉진한다. 즉 거대한 금융 파워는 국가의 물적 기반과 주권을 공격해 국민을 ‘탈국민화’ 시키며, 국가 권력 자체를 거대 금융이나 자본 서비스 기관으로 변모시킨다. 이 신문에 따르면, 제4차 세계대전은 프랑스의 국가 기능을 약체화시킬 뿐 아니라 프랑스 문화 자체를 미국식 생활 양식으로 바꾸는 결과를 낳는다. 말을 바꾸면 제4차 세계대전이란, 냉전에서 승리한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이 최종 전쟁을 통해 세계화하는 과정이다.

일본의 보수 우파 지식인들도 이 기사의 결론처럼 일본 역시 미국에 의한 세계화 과정에서 들러리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음을 우려한다. 그러나 지금 나도는 일본의 ‘5월 위기설’ 을 음모론으로 전부 설명할 수는 없다. 일본은 미국에 의한 세계화 과정에 음모론으로 맞설 것인가 세계화로 맞설것인가.
세계 제2의 경제 기함 ‘니혼마루(日本丸)’가 침몰 직전의 타이타닉 호처럼 기우뚱거리고 있다. 얼마 전 도쿄 금융시장에서는 주식 · 환율 · 채권 가격이 한꺼번에 곤두박질치는 이른바 ‘3중 하락’ 현상이 일어났다. 미국의 신용평가 회사 무디스가 일본 정부가 발행하는 엔화 표시 채권의 신용 등급을 최상급인 Aaa로 유보한 대신, 장래 전망을 ‘안정적’에서 ‘비관적’으로 변경했기 때문이다.

무디스는 그 이유를 ‘경제 성장과 재정 수지 개선을 위한 정책 일치가 달성될 가능성이 불투명해 졌기 때문’ 이라고 설명했다. 무디스는 또 일본의 국내 경제 활동이 저조해 디플레이션 압력이 가중되고 있으므로 금융계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가 더 악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무디스는 최근 일본 정부가 내놓는 경기 대책이 장기적으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는지도 불투명하다고 평가했다. 무디스는 이런 분석을 바탕으로 미국 · 영국 · 독일 · 프랑스와 함께 최상급 판정을 받고 있는 일본의 국가 신용 등급이 앞으로 1년 반~2년 사이에 하향 조정될 수 있음을 예고한 것이다.

무디스가 일본의 장기 전망을 ‘비판적’으로 평가했다는 발표가 나오자마자 가뜩이나 약세를 면치 못하던 도쿄 금융 시장에서는 ‘일본 팔자 현상’에 가속도가 붙어 주가 지수가 15500대로 내려가고 엔 시세는 7년 만에 1백35엔대를 돌파했다.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朗) 총리가 4월9일 4조엔 감세를 중심으로 한 종합경제대책을 발표함으로써 일본 팔자 현상에 일단 브레이크가 걸렸지만 위기를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도쿄 금융 시장에서만 일본 팔자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대만 중앙 은행은 최근 일본 금융기관에 예치한 외화 준비금을 서둘러 회수했다. 그 금액은 약 10억달러로 알려지고 있다. 대만 중앙 은행은 일본이 해외 투자가의 신뢰를 회복하려면 상당한 시일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일본 금융 기관에 예치한 외화 준비금을 단계적으로 계속 회수할 방침이다.

미국도 일본 경제가 좌초할 위험성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루빈 재무장관은 지난달 초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전 총리에게 두 가지 정책 전환을 요구했다. 하나는 과감한 경기 부양책을 실시하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현행 5%인 소비세를 3%로 환원하라는 것이었다. 루빈 재무장관이 일본의 역경을 보다 못해 내정 간섭에 가까운 충고를 하게 된 것이다.
“최대 채무국인 미국부터 신용 등급 낮춰라”

그러나 일본의 위기를 바라보는 일본 국내의 시각은 좀 다르다. 하시모토 총리를 비롯한 자민당 정치가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외환 보유고 2천2백억달러, 대외 순자산 8천억달러, 개인 저축 1천2백조엔’ 이라는 숫자를 나열하며, 일본이 침몰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에 바쁘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일본의 위기가 외국 세력, 특히 미국을 비롯한 앵글로 색슨계 국가의 음모에서 말미암았다는 ‘음모론’ 을 전파하는 전도사로 발벗고 나섰다. 무디스가 야마이치 증권이 발행한 사채를 갑자기 ‘투자 부적격’ 으로 판정해 자진 폐업으로 몰고간 것이나, 일본의 신용 장래 전망을 느닷없이 ‘비관적’ 으로 변경해 일본 팔자 현상을 부추긴 것이 음모론을 주장하는 그룹들에게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무디스가 장래 전망 등급을 낮춘 직후 일본의 정 · 재계가 강력히 반발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일본 정부 대변인 무라오카 가네조(村岡兼造) 관방장관은 “일본은 여러 면에서 강한 펀더멘틀스(기초적 조건들)를 갖추고 있다”라면서 무디스의 조처에 거세게 반발했다. 일본 국제 금융계의 대부로 불리는 오바 도모미쓰(大楊智滿) 국제금융정보센터 이사장(전 대장성 사무차관)은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일본이 보유하고 있는 미국 국채를 제발 팔지 말아 달라고 부탁받고 있는 처지라며 “만일 일본의 신용 등급이 내려간다면, 순부채 1조4천억달러를 가지고 있는 세계 최대 채무국 미국은 그 이상 (신용 등급이) 강등되어야 마땅하다”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작년 6월 하시모토 총리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 국채를 매각하고 싶은 유혹을 종종 받은 적이 있다”라고 한 발언과, 야마사키 다쿠(山畸拓) 자민당 정조회장이 작년 말 “일본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미국 재무부 증권을 매각할 수도 있다”라는 발언과 일맥 상통한 얘기이다. 즉 일본 정부가 외화 준비금으로 보유하고 있는, 약 2천억달러에 달하는 미국 정부 채권을 한꺼번에 내다 팔면 미국 국채 가격이 폭락해 미국도 온전할 수 없다는 협박성 발언이다.

일본의 국제금융정보센터는 이런 정 · 재계의 반발을 등에 업고 미국계 신용평가 회사들을 평가하겠다고 나섰다. 이 센터의 발표에 따르면, 역평가 대상은 미국의 무디스 ·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를 비롯해 영국 · 일본의 8개 민간 신용평가 회사이다. 8개 신용평가 회사가 매긴 기업의 신용 등급과 그후 해당 기업이 발표한 경영 실적을 비교 검증해, 이들의 신용 등급 판정이 과연 신뢰할 수준인지 역으로 평가해 올 가을께 공표한다는 것이 이 센터의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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