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문외한, 내조는 '9단'
  • 워싱턴·변창섭 편집위원 ()
  • 승인 2001.02.1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국 새 퍼스트레이디 로라 부시는 누구인가/힐러리와 대조적 스타일 보일 듯

사진설명 바위 같은 내조자 : 1월20일 대통령 취임 기념 무도회에서 남편인 부시 대통령과 다정하게 춤추는 로라 부시.

"착하고 우아한 분위기에 반해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미국민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지난 1월20일 취임한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동갑내기 부인인 로라를 두고 한 말이다. 정치하는 사람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던 신조를 접고, 1977년 5월 '정치인' 부시와 결혼한 지 올해로 24년째인 로라 여사. 한때 도서관 사서와 초등학교 교사로 평범하게 살던 그녀가 백악관 안주인으로 화려하게 변신하면서 많은 미국인이 벌써부터 그녀가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지 궁금해 하고 있다.


미국인 10명 중 6명이 호감 나타내

미국 주요 언론에 나타난 로라 여사에 대한 평은 한마디로 긍정 일색이다. <뉴욕 타임스>는 시아버지이자 대통령을 지낸 조지 부시의 말을 인용해, 그녀를 어떤 상황에서도 굳건히 남편을 뒷받침하고 내조할 수 있는 '지브롤터의 바윗돌'이라고 비유했다. 이 신문은 특히 영부인에 관한 저서를 낸 작가 길 트로이의 말을 인용해 '아마도 로라 여사는 역대 영부인 가운데 공개적으로는 권력에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았던 아이젠하워 대통령 영부인 메이미 여사와 비슷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런 언론의 보도 때문인지 몰라도 그녀에 대한 미국 국민의 호감도 역시 높다. 최근 <유에스에이 투데이>와 CNN방송이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10명 가운데 6명 정도가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고 응답했다.

텍사스 주 토박이로서 대학에서 교육학을, 대학원에서 도서관학을 전공한 로라 여사가 호감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 언론들은 그 주된 이유 중 하나를 부시가 텍사스 주지사로 있을 때 그녀가 보여준 이런저런 헌신적인 봉사 활동이라고 본다. 그녀는 텍사스 주지사 부인 자격으로 해마다 '텍사스 주 도서 축전'을 열어 여기서 나온 수익금으로 주내의 열악한 도서관을 돕는 데 앞장섰다. 1996년 이후 4년간 도서 축전을 통해 거두어들인 헌금이 89만 달러나 되었고 그 혜택을 받은 도서관이 3백50개나 된다고 한다.

그녀의 인기를 높인 또 다른 요인은 어린이 조기 교육, 나아가 문맹 퇴치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다. 초등학교 교사 출신인 그녀는 지금도 '어린아이들에게 언어라는 마술을 가르치는 것만큼 보람된 직업은 없다'고 말할 정도로 어린이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녀는 1998년 취학전 어린이의 학습 능력을 돕기 위한 조기 교육 개발운동을 펼쳐 텍사스 주 전역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그녀는 시어머니인 바버라 부시 여사의 이름을 딴 '바버라 부시 가족문맹 퇴치 재단'과 협력해 이 운동을 펼쳐 여론의 호평을 받기도 했다.

내성적 성격인 로라 여사는 뿌리 깊은 정치 혐오증 때문에 남편이 텍사스 주지사로 일할 때도 기자들의 관심을 끌 만한 일은 피했다고 한다. 심지어 지난해 여름 남편이 대통령 후보에 나서겠다고 선언하자 못마땅하게 여겼을 정도다. 그녀는 당시 한 언론과의 회견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비난받고, 그로 인해 우리 가정이 나쁜 영향을 받을 것이 두려웠다"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부시가 대선 가도에 나서기로 발표한 뒤부터는 수동적인 내조자 역에서 벗어나 누구보다 열성적인 후원자로 변신해 화제를 낳기도 했다. 그녀가 남편과 함께 유세를 다닌 주만 해도 25개에 달했다. 그녀는 마침내 지난해 7월31일 대통령 후보를 뽑기 위한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첫 번째 연사로 나섬으로써 그녀를 조용한 내조자로만 알던 미국인을 놀라게 했다.


교육·문맹퇴치에는 나름의 목소리 낼지도

사진설명 "정치는 몰라" : 지난해 12월18일 백악관에서 만난 로라 부시와 힐러리(오른쪽 아래). 어린이 교육에 각벽한 관심을 기울이는 로라 부시는 정치적 야심이 큰 힐러리와 대조적이다.

부시가 그녀를 만난 것은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을 졸업하던 1975년이었다. 정치를 싫어하던 그녀는 애당초 부시에게 관심이 없었으며, 때문에 그의 데이트 신청을 여러 번 거절했다. 결국은 친구들이 두 사람의 만남을 위한 바비큐 파티를 열기에 이르렀고, 여기서 부시는 비정치적 얘기로 로라의 관심을 끌어 사랑의 '불길'을 댕기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어렵게 결혼했지만, 로라는 부시의 음주벽 때문에 무척 마음 고생을 했던 것 같다. 대학 시절 음주 단속에 걸려 처벌받은 전력이 있던 부시는 1986년 40세에 이르러야 비로소 술을 끊었다. 주벽이 심하던 그가 이처럼 중대한 결심을 할 수 있었던 데는 물론 아내의 끈질긴 압력이 주효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말하자면 '주정뱅이 부시'를 개과천선시켜 마침내 백악관 주인으로 만든 주인공이 로라 여사인 셈이다.


로라 자신도 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8년 전까지만 해도 10대에 피기 시작한 담배를 끊지 못해 애를 먹었는가 하면, 열일곱 살 때는 정지 신호를 무시하고 차를 몰다가 교통 사고를 내기도 했다. 또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그녀는 철저한 민주당원이었다. 굳이 흠이라면 흠일 수 있는 이런 부분에 대해 미국 언론들은 별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보다는 미국인에게 실질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교육과 문맹 퇴치에 대한 그녀의 열성에 더 관심을 보인다. 그녀는 부시가 취임하기 직전인 지난 1월19일 문맹 퇴치 사업의 하나로 유명한 작가 18명을 워싱턴 컨스티튜션 홀로 초빙해 낭독회를 열어 언론에 대서 특필되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로라 여사가 책을 사랑하고 아이들 교육에 이처럼 열성인 까닭에 그녀가 부시의 내조자 역에 머무르지는 않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과거 텍사스 시절처럼 백악관 차원에서 조기 교육 문제와 문맹 퇴치 사업을 위해 나름으로 기여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뉴욕 타임스>는 미국 대통령 가문 연구가로 이름 높은 칼 앤서니의 말을 인용해 '그녀가 다른 것은 몰라도 교육 개혁 문제만큼은 남편에게 적극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뉴욕 타임스>는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녀가 힐러리 여사처럼 노골적으로 국사에 간섭하는 '주제넘은 일'을 하지 않으리라고 내다보았다. 로라 여사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남편과는 아이들과 애완용 동물 등과 같은 지극히 세속적인 화제를 주제로 얘기할 뿐 정치 문제는 거론조차 안한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런 그녀도 예민한 정치·사회 이슈인 낙태 문제에는 각별한 관심이 있는 것 같다.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민주당 지지자였던 그녀는 최근 ABC 방송에 출연해 "생명의 존중함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과거 낙태 합헌 판결을 내린 대법원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적어도 낙태 문제에 관한 한 공화당 수장인 남편과는 견해를 달리한다는 뜻이다.

아무튼 로라 여사가 힐러리처럼 행동파 영부인으로 변신할 가능성은 적어 보이지만 교육 등 일부 관심 분야에서는 나름의 역할을 주장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하와이 대학에서 영부인학을 가르치는 로버트 왓슨 교수는 최근 <유에스에이 투데이>와의 회견에서 "그녀는 힐러리 여사 같은 활동파가 아니라 남편 부시의 마음을 다잡아주는 닻과 같은 내조 역에 머무를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