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어와 악어새 '추잡한 거래'
  • 워싱턴·변창섭 편집위원 ()
  • 승인 2001.05.3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재미 사업가 데이비드 장·토리첼리 의원의
'뇌물 수수 사건' 진상 추적


1999년 7월 초 어느날 주한 미국대사관의 한 직원 앞으로 미국 민주당의 로버트 토리첼리(50) 연방 상원의원 보좌관이 보낸 e메일이 접수되었다. 내용인즉, 토리첼리 의원이 곧 서울을 방문하는데 총리와의 면담을 반드시 주선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보좌관은 일전에 부정적인 회신을 받았던 듯, '(한국) 외무부에 다시 한번 면담 성사를 시도해 달라'고 강하게 요청했다. 마침내 토리첼리 의원은 7월 6∼7일 서울을 방문해 당시 김종필 총리와 강봉균 재정경제부장관을 면담하는 데 성공했다.




이상한 것은 토리첼리 의원이 두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 한국계 미국인 사업가인 데이비드 장이라는 의외의 인물과 함께 나타났다는 점이다. 토리첼리 의원은 왜 장씨를 대동했을까. 또 무엇 때문에 그토록 강력히 총리와의 면담을 요구했을까. 장씨는 그와 어떤 관계였기에 총리와 장관을 면담하는 자리에 동석할 수 있었을까.


토리첼리, 거금 받고 장씨 사업 도와


그간 베일에 가려온 두 사람의 '은밀한' 관계가 요즘 낱낱이 밝혀지면서 워싱턴 정가의 비상한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등 유력지는 물론이고 전국 텔레비전 방송까지 이번 사건을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토리첼리 의원과 데이비드 장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만났고, 그런 만큼 각자의 입지를 최대한 이용해 서로를 도우려 했다. 이를테면 7선 하원의원 출신으로 1996년 뉴저지 주 연방 상원의원 직에 도전한 토리첼리는 막대한 선거 유세 비용을 마련하느라 후원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반면 1990년대 초반 북한에 옥수수와 밀 등을 수출했다가 대금 7천1백만 달러를 떼인 장씨는 대금 회수를 위해 워싱턴 정가의 실력자가 필요했다. 토리첼리 의원이 서울을 방문한 목적도 실은 당시 부실로 휘청대던 대한생명을 인수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해온 장씨를 측면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연방수사국(FBI) 수사 결과 장씨는 토리첼리 의원을 알게 된 1996년부터 1999년까지 선거자금은 물론이고 이탈리아제 양복·롤렉스 시계·대형 텔레비전·고급 양탄자·보석 따위 선물을 제공했으며, 그 대가로 토리첼리 의원은 장씨의 사업을 돕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1999년 12월 체포된 장씨는 지난해 6월 수사 당국과 자신의 형량 감소를 전제로 유죄를 인정하는 이른바 '유죄답변 거래(plea bargain)'를 통해 토리첼리에게 총 5만3천7백 달러를 제공했다고 자백했다. 그러나 토리첼리 의원은 돈 받은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정작 불법 수수 혐의에 대해서는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수사가 바짝 옥죄자 토리첼리 의원은 지난 2월 발표한 성명에서 "이번 수사는 한마디로 말 바꾸기와 거짓말을 일삼아온 사람의 근거 없는 발언으로 좁혀지고 있다"라고 장씨를 강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최근 〈뉴욕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장씨는 1991년 당시 부시 행정부로부터 대북 사업면허를 딴 뒤 북한과 곡물 거래를 시작해 처음에는 돈을 제법 번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북한 핵 위기로 한반도에 전쟁 위험이 감돌던 1994년에 접어들자 장씨는 북한으로부터 곡물대금 7천1백만 달러를 회수하지 못해 곤경에 처했다. 북한은 미국내 북한 동결 자산 1천5백만 달러를 곡물대금으로 충당해도 좋다는 서한을 장씨에게 보냈고, 이를 근거로 장씨는 클린턴 행정부를 상대로 동결 자산을 해제하기 위한 로비를 벌였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장씨는 뉴저지에서 활동하는 공화당계 변호사 베렉 돈 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장씨를 토리첼리 의원에게 소개했다. 때마침 토리첼리 의원은 북한 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소속이었다. 1995년 여름 두 사람은 뉴저지 주에 있는 장씨 소유 힐튼호텔에서 만났다. 수사 결과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토리첼리 의원은 대북 사업의 어려움을 토로한 장씨에게 지원을 약속했고, 그 대신 자신의 선거를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토리첼리 의원의 약속은 곧 진가를 발휘했다. 〈뉴욕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토리첼리 의원은 1995년 9월22일 박길연 유엔 주재 북한대사에게 서한을 보내 장씨에 대한 채무 해결을 촉구했다. 서한 발송 이틀 뒤 이번에는 토리첼리 의원이 장씨에게 부탁을 했다. 자신을 위한 선거자금 모금 행사를 주최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런 행사를 치른 경험이 없던 장씨였지만, 그 해 12월4일 힐튼호텔에 토리첼리 의원을 초빙한 자리에 종업원과 친구 들을 모아 조촐한 모금행사를 가졌다. 그날 장씨가 끊어준 수표는 2만1천 달러였다.


토리첼리측의 내부 선거 관련 자료에 따르면, 장씨는 1996년 들어 1∼4월 모금액 목표를 10만 달러로 정해 토리첼리 선거자금 모금 후원회 인사 중 수위를 달린 것으로 되어 있다. 장씨는 1996년 3월에는 토리첼리 의원의 권유로 민주당 상원선거유세위원회에 2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연방 상원의원 선거가 종반으로 접어든 그 해 9월 토리첼리는 장씨 회사가 빌려준 전세 비행기를 타고 유세에 나서기도 했다.


장씨는 선거 지원 활동과는 별도로 토리첼리 의원에게 선물 세례도 퍼부었다. 1996년 7월15일 장씨는 8천1백 달러짜리 롤렉스 시계를 사두었다가 그 해 11월 토리첼리가 상원의원에 당선된 직후 축하 선물로 주었다. 장씨는 또 1997년 봄 그에게 이탈리아제 양복을 10벌 넘게 선사했는가 하면, 그의 여자 친구이던 주디 발라반에게는 보석을 사주기도 했다.


"장씨, 토리첼리에게 커미션 천만 달러 제시"




토리첼리 의원도 장씨의 이런 극진한 '정성'에 적극 호응했다. 그는 1995년 장씨의 대북 채권 문제 해결을 위해 유엔 주재 북한대사에게 서한을 보냈는가 하면 미국내 북한 동결 자산 해제를 위해 노력하기도 했던 것 같다. 1997년 말 그는 북한측 아연광 개발과 관련해 장씨측 사람들과 당시 스탠리 로스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 간의 면담을 주선하기도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장씨의 아연광 개발 계획과 관련한 국무부 청문회를 이끌어냈다.


특히 15억 달러에 이르는 대한생명 인수 문제와 관련해 토리첼리 의원이 장씨를 위해 쏟은 정성은 눈물 겨울 정도다. 그는 1998년 9월24일 김대중 대통령과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원장에게 장씨가 소유한 파나콤 사가 대한생명을 인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뉴욕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1999년 7월 초 토리첼리 의원은 장씨를 대동하고 강봉균 당시 재정경제부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대한생명 인수 건을 꺼냈지만, 강장관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뒤늦게 안 스티븐 보스워스 주한 미국대사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으며, 그 때문에 강장관에게 직접 사과했다고 한다. 토리첼리 의원은 이와는 별도로 1999년 7월15일에는 파나콤의 대한생명 인수를 강력히 지지하는 서한을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에게 보냈다.


〈뉴욕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장씨는 대한생명 인수가 성사될 경우 토리첼리 의원에게 천만 달러를 커미션으로 주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토리첼리 의원의 노력은 한국 정부가 그 해 9월 대한생명에 공적자금을 투입해 매각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실패했다.


장씨, 정·관계 인사 두루 '포섭'




공교롭게도 장씨는 북한에 물린 대금 회수는 물론 대한생명 인수 건이 완전히 물 건너간 1999년 12월 초 연방수사국 요원들에 의해 불법 선거자금 제공과 공무방해 혐의로 체포되었다. 수사당국과의 '유죄답변 거래'에 따라 그는 토리첼리 의원에 대한 불법 선거자금 제공 등을 포함한 관련 사항을 모두 털어놓았다.


장씨는 토리첼리 의원과 인연을 맺기 전인 1990년대 초까지도 열성 공화당 지지자였다. 그는 1990년대 초 자신의 대북 사업을 위해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과 중앙정보국 부국장 출신인 대니얼 머피 씨를 고용했다.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장씨가 1991년 북한에 대한 곡물 수출 면허를 당시 부시 행정부로부터 따낼 수 있었던 것도 머피 씨의 힘이 컸다고 한다.


장씨는 또 1997년에는 한국계 연방 하원의원인 제이 김씨의 불법 선거자금 모금 혐의에 연루되어 수사를 받기도 했다. 당시 그는 김의원에게 불법 헌금을 했다는 사실을 수사 당국에 털어놓기도 했다. 장씨는 또 1993년 한 공화당 후원회 관련 행사에서 만난 국무부 북한담당관 케네스 퀴노네스 씨에게 고급 승용차를 선물했다는 사실이 올해 초 뒤늦게 밝혀졌다.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퀴노네스 씨는 국무부를 은퇴한 1998년에 가서야 장씨가 자기에게 접근한 목적이 미국 내에 동결된 북한 자산 해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장씨는 사업 목적을 위해 이런 사람들과 교제했던 것이다.


지난해 장씨가 법원에 제출한 기록에 따르면, 그는 올해 57세로 중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성장했다. 19세 때 영국으로 건너간 그는 유수한 학교를 졸업한 뒤 중동의 원유 현물시장 거래를 통해 큰 돈을 번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번 돈으로 미국 뉴저지 주에 있는 현재의 힐튼호텔을 인수한 그는 한때 북한내 호텔 건설 계획에서 타이완 항공사 인수 계획에 이르기까지 거창한 사업 구상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수입원은 불분명한 것 같다.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그는 1997년 애틀랜타 시의 한 카지노 인수와 관련한 입찰 서류에 수입을 20만 달러라고 기입했지만 국세청 세금 보고서에는 6만6천여 달러로 적었다는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특히 검찰측 말을 인용해, 장씨가 상당한 재력가인 것처럼 행세하지만 실상 미국 내에 뚜렷한 수입원은 없다고 지적했다.


현재 이번 사건에 대한 수사는 연방수사국에서 메리 조 와이트 뉴욕 주재 연방검사에게로 넘어갔다. 토리첼리 의원은 사건이 진행중이라는 점을 내세워 언론 취재에 일절 응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선거자금 불법 수수 혐의가 인정될 경우, 민주당 유망주로서 내년 11월 상원의원 재선을 꿈꾸는 토리첼리 의원의 정치적 야망은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