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 체제'에 들이민 북한 뱃머리
  • 김민철 (군사 평론가) (sisa@sisapress.com)
  • 승인 2001.06.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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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선 영해 침범, '해상경계선 협상' 노린 도발인 듯…
국가 차원 대응책 시급


6월 초 북한 상선 4척이 우리 바다를 휘저으면서 때아닌 안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6월2일 백마강호와 령군봉호, 3일 청진2호, 4일 대홍단호 등이 잇달아 제주해협을 통과했고, 그 중 청진2호는 대청도와 연평도 사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해주로 들어갔다. 사태는 6월5일에 북한의 또 다른 상선 청천강호가 제주해협을 우회하여 공해로 항해함으로써 일단 진정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나, 그 뒤에도 일부 북한 상선들은 동·서해의 북방한계선 외곽 지역을 넘어갔다.




이번 사건은 겉을 보아도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일단 이번 침범 사건의 주체인 북한 상선은 비무장 민간 선박이지만, 아직 우리와 '특수 관계'인 국가의 선박이다. 그들이 통과한 제주해협은 분명히 우리의 영해이지만, 북방한계선 일대 수역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영해법이 규정한 영해는 아니다. 영해법상 영해는 기선으로부터 12km까지이나, 북방한계선은 서해 백령도 서쪽 42.5km, 동해 고성 동쪽 220km까지 그어져 있다.


통상 외국 선박이 매일 4백여 척씩 국제해양법에 규정된 대로 제주해협을 무해 통항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 상선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또 북방한계선이 우리의 안보에 매우 중요하지만, 군의 평시 통제도 이루어지지 않는 공해에서 이 선을 넘는 북한 민간 선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남북한의 해상 경계선이 완전히 합의되지 않고 있고 양쪽의 법적 관계도 미정된 상황에서 이는 모두 쉽지 않은 과제이다.

 


경제적 이익 챙기며 한국의 화해 의지 시험

 




북한 선박들은 과연 무슨 목적으로 영해 침범을 감행했는가. 정부 당국자는 얼마 전 북한 화물선의 충돌 사고가 있었고, 이로 인해 일본으로부터의 화물 유입이 늦어져 질책을 받을까 우려한 북한 선박회사가 '별뜻 없이' 제주해협을 통과하게 되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이 6월3일부터 불거져 언론에 대서특필되어 곧 북한 지도부에 알려졌을 텐데도 북한 상선의 침범이 이어졌고 북한 상선측도 이 항로가 '김정일 위원장이 개척한 항로'라고 한 점을 고려할 때 실무자의 판단 실수이거나 우발적인 침범으로 보기는 힘들다.


북한으로서 가장 큰 동기는 일단 경제적 실리 확보로 판단된다. 북한은 지형상 동서로 분리되어 있다. 동서 간의 선박 이동 과정에서 제주해협으로 단축 운항하면 약 27시간 이상 시간과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또 북한의 주요 항구와 산업 중심지가 서해안에 집중되어 대일 수송 물자가 제주해협을 지나 북한 서해안으로 직송될 경우 2일 이상의 운항일 감소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정치적 수준의 동기에 의해 남측 반응을 시험했을 가능성도 있다. 올해를 '우리 민족끼리 통일의 문을 여는 해'라고 규정하면서 대남 화해 조처를 강조하고 있는 북한으로서 6월15일∼8월15일 '민족 통일운동 촉진 기간'을 앞두고 우리의 대북 화해 의지를 떠보고 화해 내지 양보를 강요한다는 차원에서 '도발적 시험'을 자행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만약 이 사건이 치밀히 준비된 것이었다면 정전 체제의 해상 질서를 자의적으로 재편하려는 의지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북한은 1970년대 이후 북방한계선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12해리 영해선을 선언했으며, 1999년 서해 교전 이후에는 서해 5도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고 등거리선과 중간선으로 '서해 해상 군사분계선'을 설정했다. 북한은 이 과정에서 정전협정과 국제법에 기초해서 해상경계선을 새로이 그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여기서 정전협정은 경계의 기점을 정할 때만 쓰이는 구실에 불과하며, 국제법 역시 북방한계선 등 한국전쟁 이후 유엔군이 설정한 해상 질서를 깨뜨리기 위한 수단으로 차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번 침범 사건도 제주해협과 북방한계선 수역은 정전협정에 규정되어 있지 않으니 국제해양법으로 규율하면 된다는 발상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인다.

 


군 대응 자세만 문제 삼는 것은 지나친 단견

 


일단 이 사건은 6월5일 이후 잠복 상태로 들어갔다. 북한측의 향후 태도는 그들의 침범 목적이 어느 만큼 달성되었는가에 따라 규정될 것으로 판단된다. 아마도 북한은 이번 사건에 대한 남한측 태도와 국제 여론 등을 고려하면서 전반적인 대응 방향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이 사건과 관련한 북한의 태도에 관해서는 여러 시나리오를 생각할 수 있다. 사태는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지만, 앞으로 북한은 계속 관망 자세를 취하거나 우리측 요구대로 통보 후 무해 통항을 하거나, 영해 통과 자체를 포기하는 등 다양한 태도를 취할 수 있다. 현재로 보아서는 일단 이 문제를 부각하는 데 성공한 만큼 조기에 도발적 자세로 전환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우리측 요구대로 무턱대고 통보 절차를 밟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이번 사건에서 나타난 대로 영해를 통과하는 실익이 나름으로 있는 만큼 완전히 포기할 가능성도 적다.


따라서 북한으로서는 당분간 현상황을 유지하고 이따금씩 문제 제기를 하다가 남북간 해상 질서와 관련한 협의를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적은 대로 현재의 해상 질서를 유엔군이 주도해 짰으므로 이를 고치는 것은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사태가 잠복기에 들어가더라도 언제나 문제는 남는 것이며, 이는 전반적인 해상 질서 재획정 과정을 거쳐야 해결될 수 있다.


국내에서는 이번 사건의 처리 과정을 두고 논란이 크게 일고 있다. 정부는 남북 관계의 현실에서 유화적 대책이 불가피했다고 하고, 야당과 일부 언론은 국가 안보를 책임지는 군의 단호한 대응이 부족했다는 점을 질타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군사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만약 단순히 교전수칙만 철저히 지켜 물리적 대응으로 일관했을 경우 남북 관계 전반에 악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국제적 이미지도 상당히 구겨졌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문제는 국가 차원에서 풀어야 하는 것이며, 이번 일에도 초기에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회가 열려 일정한 원칙을 정한 것은 의미 있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군의 대응 자세만 문제 삼는 것은 지나친 단견으로 보인다. 물론 이번 사건에서 나타난 군사 차원의 문제점, 즉 북한이 침범을 강행할 때 효과적인 군사적 대응 수단이 미흡하다는 점과, 북방한계선 남단으로부터 월선할 때 이에 대한 명분 있는 대응이 부족하다는 점 등에 대해서도 효과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특히 북한이 앞으로도 국제법을 앞세워 정전협정과 정전 체제를 무력화하려는 시도를 계속할 경우 우리의 대응은 더욱 심각한 국가적 과제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남북 해상 질서 협상이 벌어질 경우 일정한 정도의 타협이 불가피한데, 북방한계선과 영해 개념을 혼동하는 대다수 국민은 여기에 단호한 입장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의 협상 자세가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중요한 과제의 하나인 이 문제를 직시하는 혜안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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