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배워야 할 '서독의 통일 비법'
  • 이인석(인천발전연구원장·전 청와대 경제비서관) (sisa@sisapress.com)
  • 승인 2001.07.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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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는 의존하되 '자주 외교' 펼쳐라/
'서방과의 갈등' 슬기롭게 해결…한·미 관계 '타산지석'


남북 정상회담 1년이 지난 지금 한·미 간에 주한미군과 군축 문제가 커다란 이슈로 등장했다. 부시 정부는 북·미 대화를 재개하는 조건으로 재래식 무기 감축 문제를 새롭게 제기했다. 인도주의적 원조 형태의 경제 지원을 통해 북한의 핵시설 동결과 미사일 개발을 중단시키면, 그 후의 문제는 한국 정부에 모두 맡기려고 했던 클린턴 정부 때와는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것이다.




대북 정책 추진에서 한·미 양국의 공조 관계가 인도적 문제보다는 안보 문제에 크게 좌우될 전망이다. 앞으로 양국 사이에 안보와 외교가 부딪칠 가능성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안보는 의존, 외교는 자주라는 목표를 추구했던 옛 서독은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


서독의 아데나워는 서방을 결속해 동독을 고립시키려 했고, 언제가는 힘의 정치 앞에 공산주의가 무릎을 꿇으리라고 굳게 믿었다. 이와 달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동유럽과의 화해 협력에 초점이 모아졌다. '하나의 유럽'을 들고 나온 콜은 유럽 통합에 힘을 쏟았다. 서독이 조정자가 되어 서유럽과 동유럽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었기에 독일 통일이 실현된 것이다.


독일 분단은 전후 처리를 둘러싼 미·소 대립의 산물이다. 때문에 태생부터 안보와 외교가 전승 4개국의 손에 들어 있던 서독은, 안보는 의존하되 외교의 자주를 확대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몸은 서방에 있지만, 마음은 동유럽에 가 있었다. 서유럽은 안보동맹, 동유럽은 화해 협력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분단 극복 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안보를 위해 외교를 대가로 지불해야 했고, 외교의 활동 폭을 넓히려는 서독과 안보를 내세우는 전승국들이 수시로 부딪치기도 했다. 그렇지만 서독은 정권이 교체되어도 의존은 필요한 만큼만 하고 자주는 가능한 한 확대한다는 전략을 일관되게 추구해 왔다.

 


콜, 아데나워·브란트의 정책 통합해 '독일 통일'

 




1969년 총선에서 승리해 39년 만에 집권한 사민당의 브란트 총리는 취임하자마자 동유럽과의 화해에 착수했다. 통일의 열쇠를 쥔 소련과의 평화 없이 분단의 고통을 줄일 길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970년 독·소 불가침 조약과 독·폴란드 기본조약이 체결되었고, 1972년에는 동·서독 기본조약이 맺어졌다. 그 대가로 동독을 국가로 인정해야 했고, 폴란드와의 국경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전자는 분단을 영구화하는 것이고, 후자는 2차 세계대전 전 독일 영토의 25%를 포기하는 것이어서 국내에서는 매국노라는 비난 여론이 비등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으로 서독과 미국 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3개월에 걸쳐 진행된 소련과의 협상 과정을 미국에 철저히 숨겼을 정도로 서독의 마음은 소련·폴란드·동독 등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동방정책 설계자이자 브란트의 막료인 에곤바르가 독·소 협상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미국에 닉슨 대통령을 만나러 갔다가 홀대를 받았다는 보고를 들은 브란트는 "서독이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국은 알아야 한다"라는 말을 그대로 전하라고 지시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 후 미국은 서독의 야당과 언론을 통해 '브란트 비난 공세'를 유도했고, 심지어 독·소 협상 문건 일체가 분실되기도 했다. 그러나 브란트는 국내외의 온갖 시련을 딛고 분단 극복을 가로막고 있던 '동독 인정' '폴란드 국경 인정'이라는 두 개의 큰 산을 넘었다.


1982년 사민당으로부터 정권을 인수한 기민당의 콜 총리는 전임자의 동방정책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브란트가 닦아놓은 소련·폴란드·동독 등 동유럽으로 통하는 길을 더욱 넓혀 나갔다. 하지만 인도주의적 문제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브란트와 달리 안보 문제를 외교 정책의 중심에 놓았다. 안보동맹 틀 안에서 외교의 자주·자결을 확대하려는 전략이었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독일 분단은 유럽 분단의 한 부분이다. 유럽 통합 없이 독일 통일은 생각할 수 없다"라고 역설하는가 하면, "우리 혼자서 분단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 분단을 극복하려면 서유럽의 안보동맹과 경제공동체의 지지가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정치는 난쟁이지만 경제는 거인인 서독을 보는 서방국들의 불안은 커지기만 했다. 특히 미국은 서독이 독자 노선을 가는 것이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영국 대처 총리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독일 통일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다.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은 모스크바로 날아가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 독일 통일을 막아 달라고 호소하기까지 했다. 폴란드·헝가리에서 자유화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을 때 콜을 만난 고르바초프는 "독일 분단은 역사의 결과이다. 이를 외면하면 그 불행은 독일의 책임이다"라고 하면서 동독만은 풀어 줄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했다.


서독 정치인들은 독일 문제가 독자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아데나워의 서방정책, 브란트의 동방정책 그리고 이 둘을 종합한 콜의 유럽정책은 바로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서독이 45년간 걸어온 길이다. 통일 레이스의 마지막 주자인 콜은 안보와 외교를 절묘하게 배합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유럽안보회의를 통해 동유럽과 서유럽 사이에서 조정자 역할을 했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곧바로 2+4 회의를 이끌어 냈다. 서독의 힘을 더 견디지 못한 전승 4개국은 패전 독일을 묶었던 밧줄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안보의 틀 안에서 외교의 자주적 영역을 넓혀온 서독의 외교력이 마침내 승리하게 된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 전후로 한반도를 둘러싼 움직임이 예전과 다르다. 이는 지난해 5월 김정일 위원장이 갑자기 베이징을 방문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고, 북한은 이를 미국에 과시했다.


여기에다 미국이 추진하는 미사일 방어(MD) 체제에 위협을 느낀 중국·러시아가 연대를 결성하고 있다. 게다가 중국이 볼 때 북한은 마지막 남은 사회주의의 보루이다. 이런 와중에 지난 2월 말 한·러 정상회담의 공동성명이 새로운 불씨가 되었다. 한국이 탄도탄 요격 미사일(ABM) 제한 협정의 필요성을 강조함으로써 러시아 편을 들었다는 해석을 낳은 것이다. 정부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중국·러시아·북한과 동맹국 미국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으로 비친 것이 사실이다.


냉전의 무대가 한반도에서 갑자기 동북아로 옮겨가고 있는 형국이다. 그 중심에는 부시 대통령의 미사일 방어 계획이 놓여 있다. 미국은 채찍을 들고, 자국의 안보 이익에 반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자세이다. 남북 대화도 이 틀을 벗어나기 힘들게 되었다.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동북아를 중심으로 해서 벌였던 다툼을 연상케 한다. 지난 날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해양 세력은 한반도를 대륙 진출의 관문으로, 대륙 세력은 해양으로 나가는 길목이라고 생각했다.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지점과도 같은 곳이다. 튼튼한 안보 기반 위에서 양안(兩眼)의 외교를 펼쳐야 할 때이다. 이런 점에서 독일 통일 과정을 다시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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