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대화, 공개 채널로 바뀐다
  • 남문희 기자 (bulgot@e-sisa.co.kr)
  • 승인 2001.07.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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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단 '물밑 접촉' 한계 봉착…

관광공사 금강산 사업 참여로 전환점 마련


지난 6월20일, 앞으로 남북 대화의 흐름을 점칠 만한 움직임들이 있었다. 그 하나는 한국관광공사가 현대 아산이 주도해온 금강산 관광 사업에 참여하기로 한 것이다. 관광공사의 금강산 관광 참여는 그동안 자금난으로 좌초 위기를 겪었던 이 사업에 활기를 불어넣을 것이 확실해 보인다. 앞으로 육로 관광 문제를 둘러싸고 남북 당국자 회담이 불가피해짐에 따라 남북 대화에도 청신호가 켜진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이 날 한 정부 고위 당국자는 이런 분위기와는 상반되는 듯한 발언을 했다. 그 다음 날짜 신문들이 일제히 보도한 바에 따르면, 그는 "정부는 기금을 수천억원 갖고 있지만 김위원장이 서울에 오지 않으면 실질적인 대규모 대북 지원을 하기 어렵다. 정부의 햇볕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김위원장이 서울 답방 일정을 밝히지 않고 있는 데 대한 실망감도 작용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한쪽에서 대화의 창이 비로소 열린 마당에 그의 이같은 발언은 예사롭지 않게 받아들여졌다. 그런 발언이 나온 배경이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낸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이 고위 당국자의 발언이 있기 며칠 전에, 대북 문제에 깊이 관여 해온 청와대 고위 당국자가 각 일간지 정치부장과의 모임에서 했다는 발언이 그 실마리다. 이 당국자는 그동안 세간에 떠돌던 남북 비밀 접촉설과 관련해 "우리측은 김위원장 답방과 남북 대화 재개를 북측에 계속 요구했으나 북측이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라고 밝혔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앞서의 고위 당국자 발언은 그동안의 물밑 접촉을 마감하면서 우리측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날 있었던 관광공사의 금강산 사업 참여를 계기로 앞으로 남북 대화가 물밑 대화에서 공개 대화로 전환할 것이라는 점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동안 물밑 접촉은 과연 어떤 경로로 전개되었을까. 남북 간에 뭔가 진행되고 있다는 냄새를 맨 먼저 풍긴 이는 바로 김대중 대통령이다. 김위원장 답방 촉구 발언이 그 단서다. 첫 발언은 지난 5월24일 청와대 외신기자 초청 다과회 자리에서 있었다. 당시 대통령의 갑작스런 발언을 둘러싸고 기자들 사이에 상반되는 관측이 난무했다. 뭔가 접촉이 진행되고 있는 것 아니냐에서부터, 그 반대로 아무 것도 없으니까 답답해서 한 얘기일 수도 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 뭔가 있다는 쪽에 무게를 실어주는 돌출 발언이 나왔다.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인 장성민 의원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부시 대통령이 대북 대화 재개를 선언한 6월6일 언론 보도자료를 통해 △뉴욕에서의 북·미간 물밑 접촉 △ 금강산 육로 관광에 대한 남북간 협의 △북한 중·단거리 미사일 매입 폐기에 대한 북·일 접촉 과정 등을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하반기에 답방할 예정이라는 점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이 보도자료를 보고 기자들이 찾아가자 그는 답방 예정 시기를 하반기라는 모호한 표현에서 8·15 또는 9월께라고 더 구체화했다.


장의원이 낸 보도자료나 당시 언론 기사에는 그가 그렇게 판단하게 된 과정이 매우 추상적으로만 나타나 있다. 그런데 최근 여권의 한 고위 소식통이 그 전말을 털어놓았다. 그 출발점은 뉴욕에서 있었던 북·미간 비공식 접촉이다. 부시 대통령이 대북 정책 재개를 선언하기 약 한 달 전부터 뉴욕을 무대로 북·미 간에 접촉이 활발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이 미국측에 여러 가지 요구를 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식량 지원 요구도 들어 있었다. 즉 북한이 올해 50년 만의 대가뭄 때문에 식량이 1백50만∼2백만 t 부족한데 인도적 차원에서 미국이 지원할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측은 그 많은 식량을 미국 혼자 지원할 수 없다며 난색을 표했고, 남한에 요구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했다. 또한 전력 지원 문제도 거론되었다. 북한은 미국이 2003년까지 경수로 2기를 지어 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이므로 대체 에너지라도 지원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미국측은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도 남북 대화가 필요하며, 특히 김위원장의 조기 답방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그러자 북측이 조기 답방할 의사가 있다고 의외로 선선하게 대답했다는 것이다.

 


"북한, 김위원장 답방 관련해 6월15일에 우려 제기"

 




미국은 지난 6월6일 부시 대통령의 대화 재개 선언을 1주일 앞두고 그동안 접촉한 결과를 우리측에 통보했다. 미국의 통보를 받은 후 우리측이 북한과의 물밑 접촉에 착수해 상황이 급진전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즉 남북간 물밑 접촉에서 답방 시기와 관련해 1차로 8·15를 목표로 하고 그것이 안될 경우 9월로 하자는 얘기가 나왔다는 것이다. 당시 우리측은 답방 날짜를 공개하자고 요구했으나 북한측은 김위원장 경호 문제나 남한 내부의 반대 여론을 의식해 이를 반대했다. 이런 이유로 답방 날짜를 발표하지는 못했지만 상당 수준으로 대화가 진행된 것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이 여권 소식통의 얘기가 남북간 비밀 접촉 경위에 대한 가장 자세한 설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의문점은 여전히 남는다. 북·미 접촉에 이어 남북 접촉 과정에서 그토록 깊숙한 내용까지 오고갔다면 김대통령이 왜 거듭거듭 김위원장 답방을 촉구하는 발언을 했느냐는 것이다. 야당측 집계대로라면 20일 새에 여덟 번이나 말이다. 통일부 차관을 지낸 전직 각료는 "물밑 대화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협상이 잘 진행되지 않아 대통령이 외곽 때리기를 하는 것 같다"라고 지적했다.


초점을 물밑 대화 쪽에 맞춘다면 반드시 뉴욕에서의 북·미 대화가 아니라도 5월 하순을 전후한 시기부터 뭔가 진행되었다는 점은 여러 군데서 감지된다. 이름 밝히기를 거부한 한 대북 소식통은 "남북 경협을 논의하기 위한 비공식 자리에서 북한이 식량 지원 등을 요청했고 이를 계기로 접촉이 시작되었다는 얘기가 있다"라고 전했다. 접촉 방식과 관련해 파격적인 주장도 나오고 있다. 국정원 고위 당국자가 정보 라인을 통해 북한 고위 대표단이 5월 말께 아시아나 항공편으로 비밀리에 국내로 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당시 그는 이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실무자를 파견해 해당 기간 아시아나 항공편으로 입국하는 사람들의 신원을 조사했으나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국내의 한 대북 사업자는 5월 초 베이징에서 만난 북한 인민군 고위 관계자로부터 김위원장이 약속한 기간에 한국을 답방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그 시기를 6·15 1주년이 되는 6월 중으로 감을 잡았다고 한다. 당시 국정원측도 6월 답방설에 상당한 무게를 두고 촉각을 곤두세웠다고 한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김대통령의 표정 변화를 통해 뭔가 있다는 감을 잡기도 했다. 그동안 대통령의 표정이 안 좋았는데 김위원장 답방을 촉구해온 최근에는 표정이 밝아졌고, 또 당분간은 실무적인 일보다 큰 일을 위한 구상을 해야겠다고 하면서 의욕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의 청와대 고위 당국자나 정부 고위 당국자의 발언을 종합해 보면 결과적으로는 정부가 물밑 접촉에서 북한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가능하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징후가 바로 얼마 전 있었다. 고위 당국자들의 발언보다 며칠 앞선 지난 6월15일 금강산에서 남북 합동으로 6·15 공동선언 1주년 기념 행사가 치러졌다. 당시 이 행사에 북한측 고위급 인사가 참여했는데 그가 비공식 경로를 통해 김위원장 답방 문제에 대한 북한측 입장을 종합적으로 제시했다는 것이다. 내용은 주로 북한이 무엇을 우려하고 있는가에 대한 얘기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남한 내부 반대 세력이다. 예를 들어 김영삼 전 대통령이나 한나라당이 김위원장 답방을 저지한다거나,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는 답방이 어렵다는 점이다. 특히 이런 분위기에서 내려왔다가 신변에 불상사라도 발생할 경우 차라리 안 가느니만 못하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김위원장이 남한을 방문하고 난 이후 돌아가서 북한 주민에게 성과를 설명해야 하는데, 현재 여건상 정치·경제 어느 쪽에서도 성과를 내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정부 고위 당국자나 청와대 고위 당국자의 불만 어린 말이 그 며칠 뒤에 터져나온 것을 보면 이 북한측 관계자의 대답을 고비로 약 한 달을 진행해온 물밑 접촉이 무산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정부로서도 어느 정도 무리함을 감수하더라도 관광공사의 금강산 사업 참여 선언 및 당국간 공식 접촉 쪽으로 국면을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7월 당국자 대화→8월 답방 입장 천명' 시나리오 가능

 




그렇다면 물밑 접촉이 실패한 원인은 무엇일까. 우선 우리 정부의 추진 전략은 앞의 당국자 발언 또는 여권 소식통 발언에 잘 드러나 있다. 한마디로 식량 및 전력 지원과 김위원장 답방을 연계했던 전략이 먹혀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북한측이 가뭄 피해가 커서 식량난이 극심하고 더불어 전력난도 심각하다는 점을 활용해 조기 답방을 유도하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북한측 시각에서 보면 식량과 전력 지원은 장관급 회담의 안건이지 정상회담 안건이 아니다.


또 한 가지는, 북한측 고위 관계자도 지적했듯이 남한 내의 분위기에 대한 북한측의 우려를 과소 평가했을 수도 있다. 북한 사정에 정통한 재일 동포 전문가는 그런 분위기가 형성된 배경을 올 초의 한·미 관계에서부터 설명했다. 즉 지난 2월 한·러 정상회담에서 문제의 탄도탄 요격 미사일(ABM) 제한 협정 파문 및 한·미 정상회담을 지켜보면서 북한측은 이러다가는 남한 방문이 어려워질지 모른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한·미 관계가 나빠져 미국이 김위원장 답방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면 국내 보수 세력의 답방 반대 움직임이 힘을 받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답방을 위한 여건 마련이 안된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결국 물밑 접촉을 통해 최소한 6·15 1주년에 김위원장으로부터 답방과 관련한 메시지라도 받으려고 했던 정부의 노력은 무산되었다. 그러나 금강산 육로 관광이 현안으로 등장했기 때문에 공개 무대에서의 남북한 접촉이 새롭게 시작될 것이다. 이와 함께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 병행 추진론이 힘을 받게 되었다. 순서로 보면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우선 남한측이 금강산 관광과 관련한 미지급금을 먼저 북한에 지불하면 7월 중에 당국간 대화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당국간 회담이 열리면 북한측이 금강산 지역을 관광특구로 지정함으로써 분위기를 띄운다. 이와 함께 뉴욕 북·미 대화가 최소한 김계관 북한 외교부 부상과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수준으로 격상되는지 여부를 지켜보면서 남북 간에 장관급 회담을 연다. 이 회담에서 북에 대한 전력 및 식량 지원 문제가 논의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전력 지원 문제는 남북간 현안이자 북·미간 현안이기도 하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전력 지원을 북한의 과거 핵시설에 대한 조기 사찰과 맞바꾸려 하고, 북한측은 경수로 건설이 지연된 데 대한 당연한 보상이라고 맞받아칠 것이다. 또 남북한은 식량 및 전력 지원과 김위원장 답방을 연계하는 문제로 옥신각신할 가능성이 있다.


양쪽이 한동안 힘겨루기와 탐색전을 하다가 8월께 북·미 관계에서 고위급 접촉 움직임이 나타난다. 미국에서 파월 국무장관이나 제임스 켈리, 북한에서는 강석주 외교부 제1부상 등 현직 인물들이 움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나, 이보다는 페리 전 조정관 쪽의 발걸음이 훨씬 가볍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과 페리 전 조정관 사이에 남북 및 북·미간 현안에 대한 교통 정리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나면 김위원장이 좀더 가벼운 마음으로 답방 계획을 발표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여권 소식통들 사이에 김위원장이 8·15 기념일을 맞아 남한 답방에 대한 입장을 천명할 것이라는 얘기가 퍼지고 있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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