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에 팔려가는 밀로셰비치
  • 프랑크푸르트·허 광 편집위원 ()
  • 승인 2001.07.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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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재판소 압송, 무리수 많아…

세르비아 총리 "서방 지원 빨리 받으려고…"


두달 전, 부정 부패 혐의로 체포된 밀로셰비치 전 유고연방 대통령이 지난 6월28일 헤이그 유고전범재판소로 압송되었다. 세르비아 정부 진지치 총리는, 이 날 긴급히 각의를 열고 밀로셰비치 압송을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헤이그 재판소가 밀로셰비치를 '인종 학살' 전범으로 못박고 지명 수배를 한 것은 1999년 5월이다. 그때 유고를 공습하고 있던 나토는 공습을 끝낼 명분을 찾고 있었다. 따라서 헤이그 재판소가 밀로셰비치를 전범이라고 못박은 것은 평화 협상을 지연시킬 뿐이며, 나토는 전범과 협상하는 우스운 꼴이 되었다는 지적이 나토 내부에서도 쏟아져 나왔다. 기껏해야 밀로셰비치를 압박하는 협상 전술로 보였던 헤이그 재판소의 결정이 2년이 지나 마침내 현실이 되었으니, 서방이 반색을 하고 나선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세르비아 정부가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렸으며, 이제야말로 발칸 반도에서 '국제 정의'가 회복되었다고 입을 모았다.


유고연방 대통령 "압송은 헌법 위반"


그런데 그 후부터 놀라운 사건이 줄을 이었다. 먼저 코스투니차 유고연방 대통령이 국영 텔레비전 담화에서 밀로셰비치 압송은 '헌법 위반'이며, 세르비아 정부가 '밀로셰비치 정권 때나 가능했던 비민주적인 행태'를 보여주었다고 비난했다. 그는 밀로셰비치가 압송된 사실을 언론 보도를 통해서 처음 알았다고 한다.


진지치가 현직 대통령도 모르게 '날치기 작전'을 벌이기까지는 몇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먼저 밀로셰비치를 헤이그로 보내라는 서방측 요구는 지난해 가을 총선 때만 해도 금기에 속했다.


진지치가 실권을 잡고 있는 '세르비아 개혁 동맹'(DOS)도 코스투니차를 대선 후보로 내세우면서 유고연방 국민은 어느 누구도 국제 재판소에 보내지 않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그러던 것이 세르비아개혁동맹이 정권을 잡자 변하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징조는, 밀로셰비치를 일단 부패 혐의로 체포하면서 헤이그 재판 협력 법안을 만들겠다고 미국에 약속한 것이다. 그러나 이 협력 법안은 연방 국회에서 부결되었다. 국회 동의를 받는 데 실패하자 연방 정부는 헤이그 재판소에 협력한다고 규정한 이른바 행정 명령을 급조해서 밀로셰비치를 압송할 방침을 굳혔다. 밀로셰비치 변호인단은 이 행정 명령이 국회 결의를 무시할 뿐 아니라 헌법에도 어긋난다고 반발해 헌법재판소에 이의를 제기했고, 헌법재판소는 최종 유권 해석을 내릴 때까지 행정 명령의 효력을 정지시켰다. 진지치가 긴급히 각의를 열어 밀로셰비치 압송을 밀어붙인 것은 바로 헌법재판소가 1차 판결을 한 날이다.


진지치는 유고 헌법에 따른 법 절차가 필요없다고 말한다. 헤이그 재판소에 협력하는 것은 헌법에 우선하는 국제법에 따른 의무이며, 어차피 밀로셰비치 정권 때 임명된 판사들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헌법재판소가 어떻게 해석하든 밀로셰비치를 6월29일 전에 압송할 복안이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6월29일은 브뤼셀에서 '유고 지원 국제 회의'가 열리기로 한 날이다. 미국은 유고 정부에 밀로셰비치를 헤이그로 보내야만 이 회의에 참석하겠다고 압력을 넣고 있었다. 진지치가 감추고 있던 '복안'이 바로 긴급 회의였던 것이다. 코스투니차는 행정 명령에도 복잡한 절차가 있어 밀로셰비치를 압송한다 해도 브뤼셀 회의 전에는 불가능하다고 밝힌 바 있다. 헤이그 재판에 협력한다 해도 최소한 법적인 절차는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압송할 것, 때를 맞추어서 서방의 지원을 빨리 받아야 한다. 어떤 이유를 대든 밀로셰비치를 붙잡고 있는 것은 사치가 아닌가?" 진지치는 이렇게 반문했다. 세계은행이 유고 지원액으로 추산한 액수는 앞으로 4년에 걸쳐 약 40억 달러. 여기에 미국과 유럽연합이 분담하는 원조액이 덧붙는다. 물론 이 자금은 대부분 이자를 붙여 갚아야 하는 채무이며, 유고연방의 대외 채무 1백10억 달러 상환 조건을 바꿀 때도 필요하다. 10년에 걸친 내전과 서방의 경제 봉쇄, 여기에 나토의 공습까지 겹쳐 유고 경제는 10년 전의 절반 수준을 밑돌고 있다.


정권이 바뀐 이후 치솟는 물가와 구조 조정의 여파도 무시하지 못해 진지치에게는 올 겨울이 고비이다. 그가 '국회와 헌법재판소까지 무시하는 쿠데타를 일으켜 밀로셰비치를 납치해 서방에 팔아 넘겼다'는 비난을 무릅쓴 배경이기도 하다. 반면 코스투니차는, 헌법이 통하지 않는 허울만 남은 연방의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코스투니차의 담화가 나온 지 하루 만에 유고연방 총리도 이번 사태를 비난하며 사임했다. 그는 유고연방에서 세르비아개혁동맹과 연정을 구성하고 있는 몬테네그로 사회주의민주당 소속이다. 그가 사임함으로써 연정은 자동 해체되었다. 사회주의민주당은 밀로셰비치 지지 세력이며, 몬테네그로에서는 분리 독립에 반대하는 마지막 정당이다. 그들이 차기 총선에서 실패하면 몬테네그로가 분리될 가능성이 있으며, 그 때는 유고연방 또한 사라지게 된다.


헤이그 재판소 고소장에 '인종 학살' 단어 빠져


밀로셰비치의 운명과 관련해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헤이그 재판소가 작성한 고소장에 '인종 학살'이라는 단어가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국제정보 제공 업체(Stratfor)는 이런 사실을 지적하면서, 코소보에서 알바니아계 만여 명이 학살되었다는 나토측 주장은 국제조사단이 현장 답사를 한 결과 더 내세울 수가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밀로셰비치에게 덮어씌운 범죄 혐의로 미국 정치인과 군 장성 들이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밀로셰비치가 소름 끼치는 범죄에 책임이 있다 해도 베트남 전쟁을 지휘한 인물들에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이렇게 논평했다. '움직이는 것은 다 죽인다는 전법도, 대인 지뢰나 네이팜 탄으로 농민들을 조직적으로 죽인 범죄도 코소보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키신저나 맥나마라처럼 베트남 전쟁에 책임을 져야 할 인물들이 존경받는 정치인으로 활보하고 있는 터에 밀로셰비치를 재판하는 것은 도덕적 가치를 모독하는 것이다.'


국제 재판소 판결이라면 1980년대 니카라과 봉쇄 때처럼 무시하기 일쑤이고, 또 국제형사재판소 설치에 앞장서 반대해온 미국이 유고 전범 재판에만 그렇게 집념을 보이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유고전범재판소는 1993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라 설치된 임시 기구이다. 과연 안보리가 사법 기구를 세울 권한이 있는가 하는 국제법 학계의 논쟁은 둘째치고라도, 유고전범재판소는 처음부터 중립성에 의심을 사고 있었다. 전 나토 대변인 셰아는 유고전범재판소를 설치하고 자금을 대는 쪽은 나토라고 실토하기도 했다. 그 재판소에 밀로셰비치가 압송된 6월28일은 6백12년 전 세르비아가 터키 제국에 항복한 '국치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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